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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통치자와 나라는 존재가치가 없다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안치환 1+2집 1994
시 : 박혜정
곡 : 김상헌
노래:안치환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 질 때
눈 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지는 풍경으로
상처받지 않으리
별 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에 우산들처럼
말 없이 돌아가지만
아아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통치자는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백성들을
재난과 경제적 고통으로부터 보살필 의무가 있다
세월호참사로 운명을 달리한 우리 학생들 나이인 18세에
태왕에 즉위하자 마자 거란으로 도망갔던 1만의 백성부터
구해 왔으며, 국방을 강화하여 주변의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내면서 영토를 크게 넓히고 백성들을
풍족하게 하여 좋으신 큰임금(호태왕)으로 칭송을 받은
우리의 영광스런 코리아 국강상 광개토태왕을 추앙하며..
제19대 광개토태왕<廣開土王 392~413 재위기간 21년>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19.광개토왕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었다. 9년에 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9월,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생포하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 왔다. "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이 때에 백제,신라,가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 지역) 모두 평정하고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왜 즉 왜구와 그 이웃 무리까지도 신하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위세가 떨침은 이때가 그 극성기였다."
광개토태왕비문의 경우 태왕의 의롭고 공의로운 전쟁내용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기록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비문의 해석에 있어 논란을 가져다 주는 요인은 비석의 내용을 파렴치하게 일제가 훼손하고 날조하는 바람에 중요한 한자들이 많이 삭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이나 [한단고기] 기록내용을 비교대조해서 태왕의 전쟁기록이 어떤 내용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단고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 관련 기록은 광개토태왕비문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이여서 사실성을 더해 준다. 왜 지나국의 동북공정론자들과 일본의 식민사관론자들이 [한단고기]를 위서취급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를 통해서 광개토태왕은 만주.한반도.일본열도.지나 북부지역까지 평정하여 모두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게 하였고, 임나가라(대마도)에 고구려 연정을 설치하여 일본열도까지 평정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이 때에 백제,신라,가야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지역) 모두 평정하고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왜 즉 왜구와 그 이웃 무리까지도 신하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위세가 떨침은 이때가 그 극성기였다."
[광개토태왕비문]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 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
"영락6년 丙申(*****)에 태왕은 몸소 □軍(수군)을 통솔하시고 잔국(웅진백제)을 토벌하시어 軍(군)의 □□首( ? ? 수)를 공격하여 18 城(18성)을 쟁취하고 模盧城(모로성) 幹 利□城(간저리*성) 閣 城(각미성) 牟盧城(모로성) 沙城(미사성) □ 城(*조성) 阿旦城(아단성) 古利□(고리성) 利城(이성) 雜 城(잡미성) 奧利城(오리성) 句牟城(구모성) 古模能羅城(고모능라성) 頁□力而耶羅(혈*력이야라) <28字***缺(결> 利城(이성) 鄒城(미추성) 利城(리성) 大山韓城(대산한성) 掃加城(소가성) 敦拔□(돈발*) 婁賣城(루매성) 散□城(산*성) □婁城(*루성) 細城(세성) 牟婁城(모루성) 兮婁城(혜루성) 蘇灰城(소회성) 燕婁城(연루성) 析支利城(석지리성) 巖門至城(암문지성) 林城(림성) □城(*성) 就鄒城(취추성) □拔城(*발성) 古牟婁城(고모루성) 閏奴城(윤노성) 貫奴城(매노성) 三穰城(삼양성) □羅城(*라성) 仇天城 (구천성) □□□□을 쟁취하였다. "
*각주/광개토태왕이 한성백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본진이 있는 웅진과 주변지역의 수 많은 성들을 토벌했다는 기록이다.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에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내용을 명확히 증거하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帝躬率水軍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以環」"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 왔다."가 그것이다.
[환단고기]를 아직도 위서라는 지나국과 일본국의 세작노릇하는 역사학자들을 단번에 고꾸라뜨리는 내용이다.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훨씬 이전에 [환단고기]기록에는 장수태왕의 연호가 건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은 그러한 기록을 사실로 입증했다. 대진국(발해) 황제의 연호에 대한 [한단고기-대진국본기]기록도 대진국 공주의 무덤발견으로 증명되었다.
발해는 대조영이 세운 국호가 아니라 당나라가 부른 국호임에도 아직도 한국인들은 발해라고 부르고 있다. 소중화 사대주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아서다. 대조영이 세운 나라이름은 대진국이다.그리고 일본 등에 보낸 외교국서에는 '고려'로 기록하여 (고)고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천명했다.
또한 "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에서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잔국이 웅진백제임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단고기를 내세우는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광개토태왕이 지나대륙에서 백제와 전쟁을 한 것인양 곡해하고 있다.
보충사료▣ 광개토태왕비문과 크게 다르지 않는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의 기록내용
고구려 제19대 광개토경호태황은 재위기간이 391년~413년이며, 연호는 영락(永樂)으로 일명 영락대왕이라고도 한다. 사후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했다.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즉,공이 크며 성인과 같은 덕이 탁월하였다.
온 세상의 나라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하였다.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예로서 진열하고 예로서 하늘의 음악으로 연주했다.군진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가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각주/나이 18세에 태왕에 오른 광개토태왕.결코 나이18세가 어리다고 볼 수 없다. 나이가 많아도 어린아이같은 뇌를 가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이와 상관없이 교육을 통하여 뇌에 어떠한 내용을 저장시켜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불의와 침략과 독식은 물리치고 공존번영할 수 있는 대동홍익주의를 심어 주는 일이다.18세에 태왕에 즉위한 광개토태왕의 뇌구조가 그랬다고 볼 수 있다.)
말을 타고 순시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하늘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인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광개토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 3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돌아 왔다.(*각주/이 기록에서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고 고구려 대방땅을 공격한 왜의 실체는 광개토태왕비문에 잔국으로 비하하여 기록된 웅진백제를 중심으로 서남해 해상세력임이 명확해진다.)
이 때에 백제,신라,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지역) 모두 평정하고 굴복시켰다.임나와 이왜 즉 왜구와 그 이웃무리까지도 신하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위세가 떨침은 이때가 그 극성기였다.
(일본열도 세력은)3국이 바다 섬들에 있고 7국은 육지에 있었다. 처음 변진 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산 적이 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하였다.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고구려)골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즉 고구려 제19대왕이신 광개토대왕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였으며 성이 같다.옛날부터 웅습성이 있었다.지금의 구주의 웅본성이 그것이다.(*각주/[한단고기]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記) 기록에 "먼 옛날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대마도·일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 지역은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이후 북방에서 한반도로 남하한 부여.흉노.선비족이 마한영역이였던 일본열도로 이주해서 많은 나라들이 생긴 것이다.)
영락 10년에 세 가라(대마도 세력)가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었고,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모두 열제의 명령에 통제되었다.(*각주/광개토태왕은 백제연방군를 정벌할 때 임나가라-대마도까지 복속하여 대마도에 고구려의 임나연정을 세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이 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안라인을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그것은 다라국이나 안라국은 고구려인들이 대마도 지역에 세운 고구려나라들이기 때문이였다.)[광개토태왕비문]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10년 庚子(경자)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 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후퇴하기에 황급히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으로 하여금 군대를 관리하게 하였다.신라와는 친하게 지내 온 관계로 신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나, 광개토태왕께서는 신라에게도 조공을 바치게 하셨다. "
*각주/신라를 침략한 백제연방군(가야포함 왜군)을 개마무사를 파견하여 몰아 내고 백제와 일본열도를 잇는 대마도까지 정벌하고 고구려출신의 안라인에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고구려는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을 통하여 10여년간 백제와 왜의 연합을 단절시키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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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비는 서기 414년 태왕의 장례 때 태왕릉에서 동북쪽 200m되는 곳에 비석을 세웠다. 무려 1,600여년의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진실을 품고 지금까지 우뚝 서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새긴 비석은 한 덩어리의 각력 응회암을 쪼아 만든 것으로 불규칙한 방주형이다.
비석 매행마다 41자, 전부 1,775자이며 세월이 흘러 내려온 1600여년의 수와 비슷하게 현재 1,590여 글자는 판별하여 해독이 가능하다.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 개국의 전설과, 호태왕 일생의 업적과, 묘를 지키는 제도와 관련법령으로 나누어 있다. 호태왕비는 훌륭한 서법 예술품으로서 “해민족의 보물 ”이다.
그럼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통하여 당시 고구려의 영토와 국제적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아 보자.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창업하여 기반을 마련하셨다. 천제의 아들이시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으로 알을 깨고 탄강하시여 세상에 출생 때부터 聖德(성덕)을 갖고 태어 났다."
* 각주/고구려 개국시조 고추모의 혈통은 부여를 개국한 해모수(47대 고열가 단군의 친척)의 둘째 아들 고진(부여연방 고리국왕)의 손자 불리지(고모수-부여연방 옥저왕)가 압록하(요하강)을 순찰하다가 강무역에 종사하는 하백씨의 딸 유화의 미모에 반하여 사랑을 나누게 되어 임신한 아들이 고추모다. 부여법에 여자가 혼전임신을 하면 크게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집에서 쫓겨난 미혼녀 유화는 고추모를 임신한 채 자신을 의탁하기 위해서 불리지를 만나러 길림지역 웅심산을 찾아 갔으나 이미 죽고 없었다.
당시 부여는 해모수왕조가 끝나고 흑룡강지역의 부여연방의 고리국 왕의 아들인 고두막이 한나라를 크게 물리치고 부여연방의 단군에 올랐고, 해모수의 손자였던 해부루가 부여연방의 단군직을 고두막에게 넘기고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가섭원 부여(동부여)를 세운 시기였다. 유화는 자신을 의탁할 곳이 고추모의 직계친척인 해부루 밖에 없었기에 동부여로 찾아갔고 해부루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해부루는 아들이 없어 양자로 삼은 금와를 왕으로 삼았다. 금와는 해부루와 혈족인 고추모가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위해서 고추모를 제거되야 할 대상이였다.
유화는 이를 눈치채고 동부여를 떠날 것을 고추모에게 권유하고 오이.마리.협보 등을 데리고 고추모를 송화강(엄리대수)을 건너서 부여로 망명을 하게 된다. 이 때 부여의 단군은 아들이 없던 고무서 단군이였다. 고무서는 망명한 고추모가 비범한 인물로 알아 보고, 부여의 통치를 맡길 후계자로 정하고, 이미 사별하고 홀로 된 둘째 공주 소서노와 혼인을 시킨다. 그러나, 고추모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부여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다시 남하하여 압록강지역의 토착세력을 모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상의 나라이름인 고리(고려)라 정하니 고씨의 <구려>다. 이러한 배경으로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를 창업했다."고 비문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고고리로 고씨의 고리국이라는 의미다.'해'는 한자로 '고'다. 해모수=고모수/해추모=고추모
고구려는 단군조선 말기에 5가 공화정의 승인을 받아 단군에 직위한 해모수의 혈통을 직접 받았고, 부여7대 단군에 직위한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고추모의 나라였기 때문에 외세의존성을 철저히 배격하였고, 단군조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고추모의 다물국시를 계승하여 자주국방을 토대로 주변 나라들을 하나 하나 복속하여 만주의 패권을 장악해 나가면서 지나대륙으로 진출하였던 것이고, 300만 지나세력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추모왕께서는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받고 수레를 타고 순행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 臨津(임진:나루터)에서 추모왕께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나를 위하여 거북을 떠오르게 하여 다리로 연결하여 강을 건너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라고 소리치시니 곧 거북이가 떠올라 교량을 만들어 주어 강을 건넌 후에 거북이는 흩어 졌다. 이에 비류곡 忽本(골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건국하였다."
*각주/마치 이집트군에게 쫓겨 홍해 앞에 서 있는 출애굽 이스라엘 민족의 다급함과 같다. 동부여를 탈출하여 부여로 망명할 때 건넌 엄리대수는 지형상 동부여가 오츠크해와 접하는 연해주 지역이기 때문에 연해주 서쪽지역에 위치한 부여로 망명을 하려면 송화강 밖에 없다.
부여에서 남하한 고추모 세력은 처음에 비류강가에서 지내다가 忽本(골본) 서쪽 산(오녀산)에 성을 쌓고 고구려를 세웠다. 비류강(혼강)위의 오녀산성은 100미터가 넘는 난공불락한 험준한 바위성으로 700년 고구려의 토대을 암반위에 다졌다. 고추모께서는 개국훈시에서 사람은 3신1체 조물주께서 창조하신 존재라면서 정치란 사람을 평안케 하는 일이고, 병력이란 침략을 저지하는 수단임을 명백히 하면서 지상낙원이였던 단군조선의 모든 땅과 정신을 침략자들(지나세력)로부터 회복하는 다물정신이 국시임을 선포하였다.
不樂世位, 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 履龍首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추모왕은 세속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즐거워 하지 않으시자 하느님께서 황룡을 내려 보내시니 왕은 반갑게 맞이하시었다. 추모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 가시며, 세자 유리왕을 걱정하시며 <도로써 잘 다스려 나라를 부흥시켜라>라고 말씀하셨다."
*각주/편모 슬하에서 자라나 한 평생 고난과 시련,그리고 정치적 박해로 점철된 고추모가 고구려 태왕에 오르자, 동부여에서 혼인한 예씨 부인과 아들 유리가 찾아 왔다. 소서노는 고구려의 권력내분은 당시 한나라의 침략을 용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대릉하 하류지역에 고구려 제후국을 세우니 어하라다. 고추모는 2대 태왕에 즉위하는 유리에게 도(순리=양심)로써 고구려를 잘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온조는 어하라를 떠나 무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와 부천을 거쳐 서울 한강지역에 위례성을 쌓고 십제를 세웠다. 비류가 어하라 왕에 즉위했으나 민심이 따르지 않자, 소서노와 비류도 나중에 인천 소래포구로 들어 왔다. 비류는 동생 온조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보고 자책감에 빠져 자결하였고, 소서노 또한 아들 온조를 만나기 위해 위례성으로 들어 가는 도중에 숨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온조세력과 비류세력과의 권력싸움과정에서 빚어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류가 어하라왕에 오르자 민심을 상실했다는 [환단고기]기록내용은 고구려 권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구려에 대적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였나 추정된다.
大朱留王紹承基業. □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 太王 恩澤 洽于皇天 威武 橫披 四海 掃除 □□庶寧 其業 國富 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州有九宴 駕葉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 遷就山 陵於 是立碑銘 記勳績 以永後世焉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시조께서 창업하신 국가 기반을 다지셨다. □ 제 17대 世孫(세손)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 연호를 永樂(영락)이라 하였다. 태왕(호태왕)께서 베풀어 주신 은택과 하느님의 위세와 武勇(무용)에 힘입어 四海(사해: 천하 사방)을 掃除(소제=평정)하여 □□태왕께서 바라시던 나라는 질서가 안녕되어 가업에 종사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백성들은 넉넉한 재물로 잘 살게 되었다. 하늘과 같은 큰 은혜를 끝없이 베풀어 주시고 갑자기 돌아 가신 후 九州(9주)의 백성들은 슬퍼하며 酒宴(주연)을 올리며 항상 잊지 못하고 있다가 駕葉國(가섭국)으로 甲寅年(갑인년:서기 414년) 9월 29일 乙酉(을유)일날 就山(취산:산능)에 移葬(이장)을 하고 이 능에 비석을 세우고 碑銘(비명)에 훈적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게 하였다. "
其辭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 叉躬率住討 □富山 負山 至鹽水上破其丘部洛 六七百當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平道 東來 □城 力城 北豊五□ 遊觀土境田獵而還
"그 업적을 말하면 영락 5년 乙未(을미)년에 태왕은 碑麗(비려/거란)가 쉬지 않고 침략함으로 몸소 군사를 통솔하고 토벌하여 □富山(부산)과 負山(부산)의 鹽水(염수) 위에까지 이르러 그 부락 6-700을 파괴하고 牛馬(우마)와 양때를 얻은 것은 이루 칭할 수 없었다. 돌아 오시는 길에 수레를 타고 □平道(평도)를 지나 東來(동래)의 □城(?성)과 力城(역성)과 北豊(북풍) 五□(5성)을 유람하시면서 국토의 경계를 관찰하시고 수렵도 하시고 환도하시었다."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以 倭以 辛卯年 來渡海破 百殘新羅以 爲臣民以
"百殘(백잔:한성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다. 倭(왜)는 辛卯年(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와 파괴하고 백잔(한성백제)과 신라를 臣民(신민)으로 삼았다."
*각주/백잔은 한성백제를 의미한다. 또한 倭(왜)는 당시 잔국(웅진백제)에 복속한 한반도.일본열도의 해상세력을 총칭한다.왜가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의미는 백제가 개국된 웅진의 백제가 서남해 해상세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백제연방에 편입시키기 위해 신라를 위협하는 등 남한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기록이다. <왜>를 일본열도의 해상세력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일본열도의 해상세력까지 동원할 수 있는 지배집단(웅진백제)을 이해해야 왜의 실체가 밝혀 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문에 잔국으로 비하되어 표기된 웅진백제와 왜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비문내용을 보면 왜의 실체가 명확해진다.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잔국토벌에 나선 기록이 그것이다.
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攻 取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
"6년 丙申(*****)에 태왕은 몸소 □軍(수군)을 통솔하시고 잔국(웅진백제)을 토벌하시어 軍(군)의 □□首( ? ? 수)를 공격하여 18 城(18성)을 쟁취하고 模盧城(모로성) 幹 利□城(간저리*성) 閣 城(각미성) 牟盧城(모로성) 沙城(미사성) □ 城(*조성) 阿旦城(아단성) 古利□(고리성) 利城(이성) 雜 城(잡미성) 奧利城(오리성) 句牟城(구모성) 古模能羅城(고모능라성) 頁□力而耶羅(혈*력이야라) <28字***缺(결> 利城(이성) 鄒城(미추성) 利城(리성) 大山韓城(대산한성) 掃加城(소가성) 敦拔□(돈발*) 婁賣城(루매성) 散□城(산*성) □婁城(*루성) 細城(세성) 牟婁城(모루성) 兮婁城(혜루성) 蘇灰城(소회성) 燕婁城(연루성) 析支利城(석지리성) 巖門至城(암문지성) 林城(림성) □城(*성) 就鄒城(취추성) □拔城(*발성) 古牟婁城(고모루성) 閏奴城(윤노성) 貫奴城(매노성) 三穰城(삼양성) □羅城(*라성) 仇天城 (구천성) □□□□을 쟁취하였다. "
*각주/광개토태왕이 한성백제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본진이 있는 웅진과 주변지역의 수 많은 성들을 토벌했다는 기록이다.[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에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내용을 명확히 증거하는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帝躬率水軍攻取熊津林川蛙山槐口伏斯買雨述山進乙禮奴斯只等城路次俗離山期早朝祭天以環」"제(帝)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註 공주), 임천(註 부여 임천), 와산(註 보은), 괴구(註 괴산), 복사매(註 영동), 우술산(註 대덕), 진을례(註 금산), 노사지(註 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 왔다."가 그것이다.[환단고기]를 아직도 위서라는 지나국과 일본국의 세작노릇하는 역사학자들을 단번에 고꾸라뜨리는 내용이다.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훨씬 이전에 [환단고기]기록에는 장수태왕의 연호가 건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중원고구려비의 발견은 그러한 기록을 사실로 입증했다. 대진국(발해) 황제의 연호에 대한 기록도 대진국 공주의 무덤발견으로 증명되었다.
其國城賊不服氣敢 土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 遺刺迫城橫 □使國城百殘王困逼獻出男女生白一千人細布 □歸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御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村七百將殘王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그 나라 城(성)의 도적들은 광개토태왕의 기풍에도 감히 百殘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대왕은 성난 노도와 같은 위세로 아리수(한강) 강을 건너 승리를 거두었다.城(성)을 종횡으로 압박하자 刺史(자사)를 사신으로 파견하고 백잔과 그의 왕(아신왕)은 곤경에 처하자 남녀 1,000명과 비단을 헌납하면서 대왕을 찾아와 금일 이후는 영원한 노예가 되어 복종하고 태왕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서약을 시켰더니 自進(자진)하여 사죄함으로 御錄(어록)에 남기고 赦免(사면)해 주었다. 그 후는 지극 정성을 다하여 순종하였다. 이에 58성과 촌마을 700과 將帥(장수)와 殘兵(잔병)과 왕의 동생과 아울러 대신 10명과 법사도 도읍으로 돌아 가도록 하셨다."
*각주/웅진백제를 궤멸하고 한성백제를 정벌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고 국내성으로 돌아 갔다는 기록이다. 광개토태왕의 백제정벌로 백제유민들과 서남해 해상세력(왜)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를 하게 되어 일본사에서 인구가 가장 급증한 시기로 기록되었다. 웅진백제가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한반도에는 한성백제만 남게 되었다.웅진백제는 일본열도를 지배하며 일본천황가의 주인이 된다.한성백제가 일본열도의 웅진백제(일본천황가)에 태자들을 볼모로 보낸 것은 동족으로서의 협력과 약속이행에 대한 친선관계유지에서 나온 것이다.그래서 한반도백제부흥전쟁 때 일본열도의 웅진백제가 도운 것이고 한반도 한성백제가 망하자,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웅진백제세력과 합하여 일본국을 개국한 것이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0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口事」 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영락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 기마부대를 편성하여 백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구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 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그들은 이때부터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
*각주/ 백신과 토욕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서천태왕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 후 영락 8년(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북쪽지역이다.
그리고 토욕(土谷)은 [위서(魏書)]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吐谷渾)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 청해성 방면에 있었다. 토욕을 토벌한 것은 당시 지나 북부지역에서 흥기하는 북위의 기선을 제압하고 북위 후방의 토욕이 북위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고성에서 나온 조치였다.북위는 결국 고구려 귀족 여성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장수태왕 떄는 북위의 왕족의 족보를 고구려에 보내고, 고구려 귀족의 여성이 낳은 아들이 북위왕이 되어서는 고구려 개국성조 고추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북위 궁궐안에 설치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북위가 고구려의 제후국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행위들이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10년 庚子(경자)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 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후퇴하기에 황급히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으로 하여금 군대를 관리하게 하였다.신라와는 친하게 지내 온 관계로 신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나, 광개토태왕께서는 신라에게도 조공을 바치게 하셨다. "
*각주/신라를 침략한 백제연방군(가야포함 왜군)을 개마무사를 파견하여 몰아 내고 백제와 일본열도를 잇는 대마도까지 정벌하고 고구려출신의 안라인에게 임나연정의 책임자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고구려는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을 통하여 10여년간 백제와 왜의 연합을 단절시키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통제했다.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한 이유는 신라가 이뻐서가 아니라, 신라를 백제를 겨냥한 군사방어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신라구원으로 고구려는 100여년간 신라를 제후국으로 삼아 왕을 친고구려계 인물로 삼았고, 신라는 고구려를 상국으로 삼아 고구려 태왕에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 고대 은나라 왕들이 산동지역의 태산에 올라 단군조선의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와 동일했다. 실제로 경주지역에서는 광개토태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기용 청동솥이 출토되어 사실성을 입증했다.
十四年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 □連船 □平穰□ 相遇王 幢要截 蕩刺 倭寇潰 敗斬 煞無數
"14년 甲辰(갑진)에 왜(백제 해상세력)는 궤도를 벗어나 약정을 지키지 않고 帶方界(대방계)를 침입하여 □石城(석성)에 수많은 선박(배)를 연결해 놓고 平穰(평양)의 □에서 왕과 서로 만나 줄 것을 요청하면서 幢旗(당기)에 칼을 꽂아 찌를 듯이 방탕한 짓을 하기에 倭寇(왜구)를 궤멸시켜 참패시키고 무수히 참살시켰다. "
十七年丁未敎遣出騎五萬 □師□合戰 斬煞湯盡所稚鎧鉀一萬餘領 軍資 器械不可稱數 還破沙□城 婁城城
"17년 丁未(정미)에 교서를 내려 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후연)과 전투를 하여 다 참살시켜 소탕하고 갑옷 1만여 벌과 군수 물자와 기계를 칭할 수 없는 숫자를 노획하고 沙□城(사( )성),과 婁城(루성)의 城(성)을 파괴하고 돌아 왔다. "
*각주/지나국이 비문을 훼손했다면 이 기록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기록내용과 짝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즉, 광개토태왕은 17년 초에 후연을 정벌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여 미천태왕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가져 가고,고국원태왕의 황후와 태후를 인질로 끌고 가 할아버지 고국원태왕에게 온갖 모욕을 주었던 모용왕조를 도륙하고 고구려출신 고운을 왕으로 세우고 돌아 온 기록이다.고운이 왕이 된 북연은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었다는 의미다. [삼국사기]"17년 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를 나누었다. 북연의 왕 고운이 시어사 이 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고운의 조부 고화는 고구려인인데, 자칭 고양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 보가 태자가 되었을 때, 운이 무예가 뛰어나다 하여 동궁을 모셨는데, 모용 보가 고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었다."
卄年 庚戌 東夫餘 舊是鄒牟王 屬民中 叛不貢王 躬率往 討軍到 餘城而 餘城國변 □王恩 普處於是旋還 叉其慕化隋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立婁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20년 庚戌(경술)년에 동부여의 옛 추모왕의 속민 중에서 반란을 하였거나 조공을 받히지 아니한 왕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토벌하시고 나머지 다른 城(성)과 다른 국왕은 곳곳을 돌면서 은혜를 베푸시고 환국 하셨다. 또한 (호태왕)의 은덕에 감화되어 따라 온 관리는 미구누압노,비사마압노, 사누압노, 숙사사압노, □입누압노, 이다. 무릇 공격하여 파괴시킨 성은 64개이고, 마을은 1400개 이었다."
守墓人 烟戶 賣句余民國 烟二 看烟三 東海賈國 烟三 看烟五 敦城( ) 四家盡爲看烟 ( )城一家 爲看烟碑利城 二家爲國 烟 平穰城 民國 烟一 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住 婁人國 烟一 看烟십二梁谷 二家爲看烟 梁城 二家爲看烟 安連 卄二家 爲看烟 改谷 三家爲看烟 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 一家爲國烟 新來 韓穢 沙水城國烟一 看烟一 牟婁城 二家爲看烟 豆比鴨 岑韓五家爲看( )句牟客頭二家爲看烟永底韓一家爲看烟舍조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古家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各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弓利城國烟二看烟( )( )( )城國烟六看烟<11字缺>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二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大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一閏奴城國烟二都烟卄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전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三穰城卄四家爲看烟( )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句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宴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
守墓人(수묘인) 烟戶(연호)는 賣句余民國(매구여민국)과 東海賈國(동해매국)의 敦城(돈성) ( )( )城. 碑利城(비리성). 平穰城(평양성) 婁人國(루인국)의 梁谷(양곡), 梁城(양성) 改谷(개곡) 新城(신성) 南蘇城(남소성) 韓穢(한예)의 沙水城(사수성) 牟婁城(모루성) 豆比鴨岑(두비압잠) 句牟客頭(구모액두),永底韓(영저한) 舍조城(사조성) 耶羅城(야라성) 炅古城(경고성) 客賢韓(객현한),阿旦城(아단성) 雜珍城(잡진성) 巴奴城(파노성) 模盧城(모로성) 牟水城(모수성),幹弓利城(간궁리성) ( )( )( )城. <11字 **** 缺결> 豆奴城(두노성) 奧利城(오리성) 須鄒城(수추성) 百殘(백잔) 南居韓國(남거한국),大山韓城(대산한성) 農賣城國(농매성국) 一閏奴城國(일윤노성국) 古牟婁城(고모루성),전城(전성) 味城(미성) 就咨城(취자성) 穰城(양성). ( )那城(나성) 那旦城(나단성),句牟城(구모성) 利城(리성) 比利城(비리성). 細城(세성) ****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 敎言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守墓酒掃 吾로慮舊民轉當리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令備酒掃言 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삽看烟三百都合三百家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생존시에 시조왕과 선대왕에 대하여 하교하신 말씀은 먼 옛날과 근래에 쟁취한 신민국의 백성들에게 “묘소를 지키는 법”과 酒掃法(주소법)을 교지로 말씀하셨다. <내가 염려되는 것은 오래되면 환경이 좋지 않아 백성은 당연히 옮겨서 살게 될 것이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만년 후에 세력이 약해지더라도 묘소만은 안전히 지켜야 된다. 다만 내가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취득한 곳에 침략자가 쳐들어 오면 韓,穢(한.예)에 령을 내려 대비하고 酒掃法(주소법)은 교지와 같이하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敎令(교령)에 따라 韓,穢(한.예)에 220가구를 취하여 묘를 지키게 하였으나 염려한 것과 같이 법칙을 잘 알지 못하여 다시 옛 부터 지켜온 백성과 새로 110가구를 취하여 都合(도합) 330가구를 守墓(수묘)하여 看守(간수)하도록 하였다."
*각주/광개토태왕은 광개토태왕비를 지키는 사람들로 韓,穢(한.예)인들을 삼았다는 것이다. 즉, 해머리땅 사람들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광개토태왕의 뿌리의식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광개토태왕이 군대깃발에 새긴 #문양자체가 벌써 해와 물을 상징하는 해머리땅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만약 지나인들로 지키게 했다면 오늘날 지나국이 어찌 말할 것인가? 광개토태왕은 지나왕이고 고구려는 지나나라였다고 주장할 것이 아닌가? 광개토태왕은 훗날(오늘날)까지 염두에 두고 비를 해머리땅 사랑들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이다.
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羌錯 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 其烟戶 不合羌錯 又制守墓人 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亦不得천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시조 上王(상왕)부터 先王(선왕) 이래로 묘소를 안전하게 지키지 못 할 것 같아 碑石(비석)에 묘를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烟戶(연호)한 것이니 착오 없어야 한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시조왕과 先王(선왕)의 묘소에 다 碑石(비석)을 새우고 그 碑銘(비명)에 烟戶(연호)를 기록하였다. 守墓人(수묘인) 제도를 착각하거나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거나 금일 이후부터 서로 매매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비록 부유하여 풍족한 사람이라도 역시 매입하여 취득 할 수 없다. 법령을 위배하며 매입하는 자는 제정된 수묘 법령에 의하여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해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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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개소문의 제안을 신라 김춘추가 들었더라면....
국방이약한신라가 3국통일햇다는데 요즘은 신라가 당나라에 이용당한거같은 생각도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