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입소신청서를 앞에 놓은 기자들.
안정된 직장을 찾은 안도감,
신문사를 뛰쳐 나올 때의 기개, 명분에의 아쉬움
착잡한 표정들.
들어서던 김 청자, 무거운 분위기에 멈칫,
이 선생에게 조용히 다가 간다.
"정어리 좋아하세요?
"난데없이 정어리라니...?
"저녁 메뉴는 정어리로 할까 해서요.
"아, 좋지요. 그런데 무슨 일 있나요?
"하 사장이 한 잔 하자는데 준비차 온 거예요.
"조옷치요.
안 그래도 그냥은 못갈 기분이었는데 조오와요
아직은 가을 햇살이 따갑다.
나무그늘에 차려진 식탁,
얼음 채운 나무 통마다 포도주 두세 병씩,
드럼 통의 49공탄이 한창 벌겋다.
바게쓰의 절인 정어리들을 넓직한 석쇠에 굽는
아줌마와 검게 그을은 얼굴의 청년, 자욱한 연기.
스티로폴 접시를 들고 구운 정어리를 담아가는 사람들.
"청어알 맛 보세요."
말린 청어알 쟁반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청자.
문득 잔을 포크로 두드리는 맑은 소리.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선생님들 역시 그러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베링철도를 위하여."
"위하여"
수십 배로 늘어난 소리가 화답한다.
"베링 철도라, 멋진 이름인데."
기자 한 명이 중얼거렸다.
차츰 활기를 띄기 시작하는 사람들.
빈 포도주 병이 나오자 소주를 찾는 소리.
"예. 그게 바로 러시아식입니다.
정어리에 보트카,
베링 체질이십니다."
웃는 틈을 잡아 말했다.
" S라인 항해사로 있는 아들 녀석입니다. 이 녀석이 SLB 얘기를 했었지요.
생선 집게를 내려놓고 꾸뻑 하는 동수.
"하 동숩입니다. 선생님들 말씀, 자주 들었기 때문에
처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양 손을 모아 허리를 꺾는 정중한 절,
일본식 매너가 엿보인다.
앞치마를 두르고 정어리 굽다 넙죽 절하는 청년에게
사람들은 호의 어린 시선으로 끄덕여 주었다.
"해양대 나왔다지.
나도 거기 나왔어. 몇 기지 ?
이 선생이 자기보다 훨씬 높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21깁니다. 선배님께선 ?
"내가 바로 거기 1기야, 이거 반갑구먼. 한잔 받게.
"영광입니다. 대 선배님.
잔을 받아 고개를 돌리더니 단숨에 비우고 돌려 준다.
"어-- 이 사람, 배는 안 몰고 술만 마셨구만.
흐뭇한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우리 후배를 생선만 굽게 할 거요?
"가족들까지 준비되어있다는 뜻으로 시중들게 했습니다만...
눈치 없는 고지식한 응대
머쓱해진 이 선생, 동수가 나섰다.
"오늘 스승으로 모실 분들께 인사드린다 알고 나왔습니다만...
한 분은 선배님으로 강등되신 것 같습니다."
이 선생은 파안대소 했다.
"그래 좋고 말고, 선배라 불러."
"실은 전에도 호칭이 헷갈려 애먹은 적이 있습니다."
동수는 자료실 멤버들을 가리켰다.
"가친께서 대학을 워낙 늦게 다녀 동창분들께선 대략 십 여년 연하시죠.
그래도 제겐 아저씨 뻘이시니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청자 누나는"
느닷없는 해양대 동창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아줌마라면 질색하시는 겁니다.
혼삿길 막을 일 있냐며 누나라 부르라는 거예요."
일제히 웃는다.
무슨 일인가 다가오는 김 청자
"그래서 누나라니까 이번엔 어머니가 혼을 내키세요.
아버지 친구 분께 누나라니,
이게 무슨 상스런 소리냐?"
그제야 사태가 파악된 청자가 버럭 했다.
"동수 너, 그만두지 못해? 어디 할 얘기가 없어 그딴 얘길"
찔끔해 자라목이 되는 정수,
재미있는 얘기에 초친다고 청자를 윽박지르는 기자들,
기죽지 말라며 동수를 격려한다.
"나중 혼나요. 누님이 태권도 2단인 거 아세요?"
와아--, 탄성.
포기했다는 듯 청어알 접시를 든 팔을 벌려보이는 그녀.
큰 체구에 어울리는 제스처.
"그래서 아줌마로 되돌아갔는데 얼마나 무섭게 다그치는지,
전 고등학생이지요 누난 대학생인데다 태권도까지...
결국 누나로 낙착을 봐 지금까지 계속 누납니다."
박장대소 하는 기자들
싱글벙글 하는 종문과 중구, 지리자료실 동창들
"너 이렇게 나올 거야?
이젠 컸다고 아쭈, 후환이 두렵잖다 이거지 ?"
"글쎄 저렇게 공갈협박 한다니까요."
능청스런 댓거리에 파르르 하는 청자.
토닥거리는 남매의 모습 그대로다.
여기저기서 동수에게 잔을 건네기 시작했고
넙죽넙죽 비워 되돌리는 바람에
신이 난 사람들은 소주를 찾기 시작했다.
베링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시베리아 철도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선박들.
이물과 고물에 각각 대형 서치 라이트를 설치해 충돌에 대비한다.
1977년 겨울, 홍해의 젯다 외항
하역할 선석 차례를 기다리는 화물선들이 대거 몰려 있다.
동수의 2만 5천톤급 벌크선 미스 마리에타도
벌써 열흘 째 대기 중이다.
애가 탄 현지 지점에서 항만사무소에 로비를 했지만 별무 효과.
웃통을 벗어부친 반바지의 동수와 돈희
갑판 그늘에서 오징어 말리기에 몰두해 있다.
돈희가 배를 따 내장과 뼈를 들어내면 동수는 낚시줄로 길게 엮는다.
이렇게 널어야 갈매기가 훔쳐가지 못하고
마르면서 오그라 들지도 않는다.
새벽부터 일어난 동수와 갑판 미나라이(잡역) 돈희는
선미 써치 라이트로 오징어 떼를 모았다.
검은 밤바다 속에서 푸른 인광을 번득이며 몰려드는 오징어 떼.
처음에는 미끼를 달았지만 너무 잘 낚여 빈 낚시를 던져 보았다.
추 끝에 달린 바늘이 세 가닥으로 갈라진 삼봉 낚시,
그냥 걸려 올라온다.
던질 때마다 한 두 마리씩 바늘에 꿰여 올라온다.
찍찍 물을 뿜으며 불빛 속에 나타나는 핑핑한 오징어
한국산의 두 배가 넘는 크기다.
바다가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어갈 때 쯤
더이상 담을 데가 없을 만큼 잡았다. 백 마리도 넘어 보인다.
입이 귀에 걸리는동수와 돈희.
일인들은 말린 오징어 냄새라면 질색한다.
하지만 고급 선원 3명을 빼면 모두 한국인인 이 배에서
그들의 오징어잡이는 선원들의 압도적 성원 하에 감행되곤 했다.
지난번 잡은 놈들은
반쯤 말려 꾸덕꾸덕할 때 버터구이를 했었는데 대인기였다.
선원들은 두고두고 그 맛을 못 잊어 했다.
`이번에는 세 마리 씩 안겨줘야지.
그때도 갈매기가 훔쳐가지만 않았더라면 꽤 많았는데`
돈희뿐 아니라 선원들 대부분이 이런 동수와 잘 어울린다.
가끔 저질러 초사(1등 항해사)에게 기압도 받지만
활기 넘치는 동수가 뭔가 하자 꼬드기면 대개 따라나선다.
2등 항해사와 2등 기관사는 갑판부, 기관부의 선임하사다.
하급 선원들 십여 명씩을 통솔해야 한다.
하지만 선원들 대부분은 해양대를 갓 나온 햇내기 2항사의 연배들이다.
부득불 직급에 의지해 통솔할 수밖에 없는데,
직급만 내세워 선원을 다루는 배는 사고가 잦아 활기 없는 항해가 되기 쉽다.
그러나 동수처럼 인망 있는 2항사의 경우라면 얘기는 다르다.
평소의 문제점을 선원들이 시시콜콜 알려주기 때문에
사고를 미리미리 예방할 수 있다.
덕분에 동수가 온 이래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 통솔력을 높이 산 선장은 웬만한 탈선쯤은 못본 척 넘겨주고 있다.
"싱싱하네.하 상"
브릿지의 사관실로 가던 사토오
갓 잡은 오징어 얘긴지 벗어부친 동수의 미끈한 체격 얘긴지
애매하게 들리는 말을 건네며 다가온다.
국장(통신사 겸 급식 책임자) 몰래 빼돌린 고기로 스테이크를 굽는
기관실 야식에도 이따금씩 불러 주는 그는 니이가타 출신의
고참 1기사(1등 기관사)다.
"본사에서 SLB 포워딩 사업을 검토 중이라던데... 들어 봤어?"
" ..... ?"
"내 그럴 줄 알았어"
사토오는 빙긋 웃었다.
본사 사정 따위에 쫑긋할 녀석이 아니니까.
"가끔 본사 소식 정도는 좀 알아두는 게 어때 ?
어쩌면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에이, 사무실 서류 일, 전 싫습니다."
"이번은 그런 게 아니고... SLB 코스 조사팀 후보자를 물색하고 있다네."
그제야 귀를 쫑긋 한다.
SLB --시베리아 랜드 브릿지. 꿈에도 그리던 코스.
"아이구 선배님"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다.
사람 좋게 껄껄 웃는 사토오.
"내 그럴 줄 알고 벌써 추천했네 이 사람아.
본사에서 후보자 추천의뢰가 왔는데 초사급 이상이 좋겠대.
하지만 직급보단 열의나 추진력이 중요하다며 하상을 추천했더니
선장님, 기관장님 모두 끄덕이시던데.
시베리아 가면 아마 곰 사냥 나설 거라며 웃으시데."
"고맙습니다 선배님,
오늘 야식은 오징어 덴뿌라로 모시겠습니다."
"허, 이 친구, 와이로는 선장님께나 갖다 드려."
껄껄대며 사관실로 올라가는 사토오.
열대의 바다를 바라보며 시베리아의 빙원을 그리는 동수.
어느덧 중천에 솟아 작열하는 홍해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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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소한 교정:
1. 49공탄은 19공탄의 오타?
2. 70년대에는 1회용 접시로 스치로폴보다는 알미늄포일이 주로 쓰인 걸로 아옵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