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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도엽의 [지금은 노동자 시대] 원문보기 글쓴이: 오도엽
“엄마는 꽃을 꽂아야 이뻐요” 고무공장 노동자 김명선의 20년 이야기 지난해 늦가을이었다. 늦은 밤 숙소로 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기 화양리 건대부속병원 응급실인데, 좀 와 줄 수 있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다. 그보다 응급실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온갖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 맴돈다. 자주 오가던 곳인데, 몇 호선으로 갈아타야하는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지하철을 타면 반대 방향이고, 내리면 엉뚱한 역이다. 결국 건대입구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지나치고 말았다. 택시를 탔다. 허겁지겁 응급실을 찾아갔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있다. 빠짝 마른 팔에는 주사바늘이 꽂혀있다. 살며시 손을 만졌다. 굳어있다. 눈을 뜬다. “괜찮아. 링겔 다 맞고 나가면 된데.” 그는 보육교사다. 그리고 전국보육교사노동조합 위원장이다. 150센티의 키에 38키로. 뒷모습을 보면 초등학생과 같다. 짧은 단발머리에 화장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얼굴. 세월이 할퀴고 간 주름살만 없다면 아직도 소녀와 같다. 세월이 할퀸 주름살 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몸이 굳어져 혼자 병원을 왔다고 한다. “어디로 갈래?” “연맹 사무실에 숙소가 있어.” “이 몸으로 사무실에서 잔다고?” “거기 짐도 있고, 할 일도 남아 있고, 회의 결과도 알아봐야 하고….” “지금 뭔 말을 해. 이 몸으로, 아유.”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데려갈 곳도 없다. 나도 객지 생활이라 늘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는 형편이고, 더구나 여자를 이 밤에 데리고 가 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사무실 숙소도 잘만하다고 우겼고, 나는 도저히 그를 사무실로 재울 수 없다고 우겼다. 숙소를 보고 결정하자고, 보육노조가 사무실이 있는 공공연맹 사무실로 함께 갔다. 그의 집은 부산이다. 남편도 있고, 아들딸이 한 명씩 있다. 한국보육교사회 공동대표를 하다 2006년에 보육노조를 만들었고,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전국 8개 지부를 일 년 삼백예순날을 돌아다니는 게 그의 일이었다. 깡다구로 버티기에는 그의 자그마한 몸이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저 먼 남녘땅 경남 통영에서 시작된다. 마을에서 꽤 있는 부잣집의 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일을 다니셨고, 그는 ‘통영엄마’라고 불렀던 가난한 아주머니의 품에서 컸다. 그를 배곯지 않게 해주는 상류층 부모와 ‘통영엄마’라는 또 다른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세상을 배워갔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큰 땅을 지녔고, 마을 사람들은 그 땅에서 소작을 하였다. 가을 추수 때면, 자기 또래의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 리어카에 나락 가마니를 실고 와 자신의 집 곳간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는 이게 너무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부모님이 주는 물질의 풍요와 함께 가진 것 없는 이웃들이 베푸는 정을 한 몸에 소화하기에 너무 벅찼다. 부잣집 딸과 ‘통영엄마’ 마을에서 놀다 끼니때가 되면, 서로 그의 손을 당겼다.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 더 놓고 소박한 밥상 앞에 그를 앉혔다. “부모들이 바쁘니 우짜노, 여서 밥이라도 묵어라.”며 밥을 주던 이웃들을 소녀는 잊지 못했다. 83년에 대학에 들어가자 그는 세상을 알 수 있는 동아리를 스스로 찾아 헤맸고, 스스로 ‘운동권’이 되었다. 4학년 2학기 때 그는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노동 현장에 들어가 자신을 길러주었던 ‘통영엄마’, 자신을 툇마루 소박한 밥상 앞으로 데려와 밥을 주던 민중과 함께 살기로 결심을 했다. 졸업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국제상사의 미싱사가 되었다. 프로스펙스라는 상표의 운동화를 만들던 곳이었다. 다음해에 있을 88올림픽을 앞두고, 공장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고, 그 덕에 기술도 없던 그는 쉽게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가 노동자가 되던 1987년은 박종철이라는 서울대 학생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죽었다. 또한 4․13호헌 발표는 국민들의 숨죽어있던 민주화의 열망을 들끓게 하였다. 6월 민주화항쟁에 뒤이어 노동자들의 투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가 다니던 국제상사는 부산지역 고무노동자들의 투쟁 중심이 되었다. 공장에서 만난 뜻있는 노동자들과 함께 그는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만들었고, 유인물을 돌린 다음날 국제상사 천오백여 노동자들의 투쟁은 시작되었다. 당연히 해고되었고, 복직투쟁을 거쳐 다시 고무공장 노동자로 그의 삶은 이어진다. 고무공장 노동자 투쟁에 지칠 때쯤 그에게 허리 디스크가 온다. 옴짝달싹할 수없이 아파 수술을 하게 된다. 또한 현장생활에 대한 좌절이 찾아왔다. “내가 노동현장에 맞지 않았는지, 적응하기가 힘들었어. 정치적 입장을 두고 생기는 갈등의 한복판에서 버티기 힘들었고, 활동가들의 생각이나 방식이 동료로 함께 하거나, 나를 끌어당겨주거나 하는 감동을 주지 못했어.” 허리 수술을 하고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지쳐도 지울 수없는 것이 있다. 국제상사에서 만난 어린동생들이다. 열대여섯 살에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산업체학교를 찾아야 했던 동생들. 산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찾아와 신발공장의 본드 냄새에 취하며 공장과 학교 기숙사를 오가던 어린 동생들을 현장을 떠나도 잊을 수가 없었다. 산업체 학교를 다니던 동생들의 얼굴은, 아버지와 함께 리어카에 소출을 실고 오던 통영의 또래 친구들의 얼굴과 겹쳐졌다.
그 해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일어난다. 세 살, 다섯 살이던 혜영이 용철이 오누이가 단칸셋방에 갇혀 불장난을 하다 죽은 일이다. 가난한 부모는 요강과 밥상을 아이들과 함께 둔 채 바깥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일을 나가야 했다. 갇혀 하루 종일 부모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성냥을 가지고 장난을 쳤고, 불이 나자 밖에서 잠근 방문이 열리지 않아 방문을 부여잡고 엄마를 부르다 연기와 함께 사라져야 했다. 엄마, 문 열어줘 이 일은 그의 삶에 변화를 주었다. 수배 중이던 남편과 90년에 결혼해서 애를 갖은 그는 이 모든 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보육교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남편은 구속이 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갔다. 그는 돌 지난 아이를 업고 양산에서 부산대학교를 오가며 보육교사 교육을 받아 자격증을 땄다. 징역 뒷바라지에 육아, 공부까지 그의 몸은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아이들이 미래에는 좀 더 행복한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온갖 어려움을 이기게 했다. 보육현장은 만만치 않았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화장실에 갈 시간,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고된 노동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아직도 십 년 전 만난 아이들이 고스란히 눈에 떠올라. 아이들이 입었던 옷, 움직이는 모습, 자세, 표정, 말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어. 둘이만 나눴던 정서, 그런 것 있잖아, 아무도 모르게 서로 나누는 눈빛, 눈으로 이야기 하는 것, 그런 것을 잊을 수가 없어.”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 할지라도 생계의 어려움을 당하면 떠나야하는 보육현장의 현실과 마주한다. 보육교사의 현실 “보육교사의 삶이 고달파서는 제대로 된 보육을 할 수 없어요.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보육교사의 삶이 행복해야지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어요.” 보육은 국가가 책임지고 풀어가야 할 일이라는 생각과 보육교사의 안정된 삶이 보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고민을 가지게 된다. 2002년 부산보육교사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보육교사회 공동대표를 거쳐 보육노동조합을 만들어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전국보육교사노동조합의 마지막 위원장이기도 하다. 산업별 노동조합에 합류해 이제 공공노조 보육지부로 조직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거창한 투쟁을 위해 보육노조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질 높은 보육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과 보육교사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터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예요.” 보육현장에서 만난 조합원들을 너무 좋아한다.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위원장인 자신을 너무 챙겨주고, 사랑을 해준다’고 한다. 내가 만난 보육노조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조합원들을 끔찍이 챙겨주고, 사랑을 해준다’고 말한다. 그에게 보육교사는 하늘이 점지해준 직업인 것 같다. 그 날 병원에서 만난 뒤로 그는 계속 아팠고, 지금은 쉬고 있다. 교감신경이 강해 부교감신경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경계통의 이상으로 긴장 상태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 잠을 자도 긴장 상태가 유지되어 몸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쉼 없이 달려왔던 그의 삶에 몸은 브레이크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시운전을 하고 있다. 부산에 내려와 그동안 챙기지 못했던 초등학교 3학년 딸과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요가와 산책을 통해 몸을 단련시키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집 근처 어린이집에 오후에는 ‘나들이 자원봉사’를 다니고 있다. “우선 다시 보육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야지. 위원장을 하느라 너무 현장과 떨어져 있었던 것 같아. 다시 현장의 기를 받아야 건강해질 것 같아. 현장의 기는 아이들의 기잖아. 아이들과 함께 뛰놀며 기를 받아 건강해져서 다시 일을 해야지.” 아이들의 기를 받아 그의 딸인 온비와 함께 집 뒷산을 오른다. 보육교사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너무 소홀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물론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많아 미안하지. 양적으로는 너무 부족해. 하지만 짧은 만남이라도 최대한 사랑을 듬뿍 주려고 노력했어. 아이들도 잘 커줬고. 애들이 자신들의 눈높이로 부모를 바라보며 관계를 형성해. 스스로 일을 하고, 부모의 생활도 이해해 주고.”
이제 중학생이 된 아들 강산이가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갈 때 했다는 인사가 떠올랐다. 새벽까지 회의를 하고 들어와 쓰러진 부모에게 학교를 가며 하는 인사말이다. “어머니 밥은 거르지 말고 챙겨 드시고, 길 건너실 때 차 조심하시고, 지하철 탈 때는 안전선 밖에서 기다리세요.” 지난 성탄절 그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딸 온비는 한 순간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병간호를 했다. 사랑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생각이 그의 가정을 들여다보며 떠오른다. “엄마는 꽃을 꽂아야 이뻐요.” 내가 사진기를 꺼내자 딸이 벚꽃을 꺾어 엄마의 머리에 꽂아준다. 아들의 키는 엄마를 따라잡은 지 오래고, 딸도 엄마와 눈높이를 함께 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자그마한 키에 왜소한 몸. 그의 몸에서 건강한 아들딸이 커가는 모습이 참 신기하다. 아직 그는 걷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릴 때 다리가 꼬여 엉덩방아를 찧기도 한다. 그의 눈에는 보육현장에서 일하는 선생님들의 숭고한 노동이 떠나지 않고, 그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도 떠나지 않는다. ‘통영의 엄마’도, 산업체학교를 다니던 여공도, 단칸 셋방에서 죽어간 오누이도. 처음 응급실에 실려 가던 날, 그가 자겠다고 고집하던 연맹 사무실에서 억지로 끌고 나왔다. 하지만 난감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좀체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었다. 연맹 사무실인 성수동에서 다짜고짜 택시를 잡아 태우고 화양리로 갔다. 술집과 모텔의 불빛이 야하게 반짝이고 있다. 모텔로 가다 모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 몸으로 사무실에서 우찌 자.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병원으로 가.” 방문을 열어 그를 방안으로 밀어 넣고, 열쇠를 건넨 채 나왔다. 모텔 문을 나서며, 이 시간에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를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기에 편지봉투가 뜬다. ‘오늘 고마워’ 그의 이름은 김명선이다. 노동자가 된 지 스무 해가 되는 그의 나이는 마흔 넷이다. 그를 본 적이 있다. 21년 전 서울에서. 유난히 키가 작아 돋보인 그를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하던 곳에서 두세 번 지나치며 봤다. 노동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어왔고, 그가 내 선배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가 고무공장 노동자를 그만 둘 때쯤 나는 용접공이 되었고, 내가 15년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사진기를 들고 집회장을 기웃거릴 때, 보육노조 위원장이라고 분홍조끼를 입고 있는 그를 다시 만났다. 그 날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 숙박비를 내가 내지를 못한 것은 평생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