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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8. 주일설교
나도 탕자인가?
(눅 15:11~32)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도 탕자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어떤 부요한 농군이 두 아들을 길렀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말도 순종 잘하고 훌륭한 아들들이었는데 나이 먹어서 장성하니까 이제는 아들들이 성품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말을 잘 듣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농사일을 하는데 둘째놈은 시간만 있으면 시내로 나가버려요. 며칠씩 시내에서 놀다가 돌아오고 돈이 있으면 다 허랑방탕하게 써버리고 아버지 속을 썩였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를 않습니다. 자식을 겉으로 낳았지 속으로 낳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속의 삐뚫어진 마음을 고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둘째가 아버지께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기왕 세상 뜰 것 아닙니까? 세상 뜨면 재산은 아버지가 가지고 못가니까 미리 나누어 주십시오. 내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십시오.” 정말 야박한 일입니다. 내일 세상 뜰 것이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받들어야 될 것인데 아직도 청청한 아버지를 보고 곧 세상 뜰 것이니 재산을 나눠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자식의 간청을 이겨낼 아버지가 없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해서 아버지께 간청을 하니까 아버지가 재산을 반쪽씩 나누어서 맏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 둘째가 그것을 곧장 가지고서 청산해서 돈으로 만들어서 아버지가 보지 않는 먼 나라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돈 있고 젊은 사람이니 친구들이 얼마나 따르는지 몰라요. 아주 영웅입니다. 친구들이 따르고 돈이 있으면 또 화려한 카바레나 카페에 가서 놀기 때문에 여자들도 많이 따릅니다. 돈이 한없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꾸 쓰니까 돈이 점점 없어져서 나중에는 바닥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직장도 없고 돈도 없는데 기근이 다가왔으니 이제 살아갈 도리가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큰일났다 생각이 났습니다. 기근이 다가오면 남자들은 뭐하는지 압니까? 포켓트에 손을 넣어보고 자꾸 뭐가 있는지 찾아봅니다. 여자들은 핸드백 열어서 거울을 보고... 최후의 살길을 위해서 마지막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켓트를 아무리 뒤져도 돈이 없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가장 천한 직업에 응모를 했습니다. 가장 천한 직업이란 돼지 치는 직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직업이 천하다 좋다 말할 수 없어요.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돼지 치는 곳에 가서 돼지 치는 일꾼이 되었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좀 같이 먹으려고 해도 돼지에게 물리기만 하고 쥐엄열매도 충분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고향생각이 나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든지 있는데 나는 여기에서 주려 죽는구나. 비로소 생활에 어려움이 다가오니까 깨어지고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깨어지는 것이 참 중요한데 평범한 생활 속에서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해서 감당할 수 없으면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깨어졌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잘못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시겠냐. 내가 고약한 짓을 했으니 안 받아 주시겠지? 그러므로 아들로 취급을 하지 않고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고 가면 아버지가 봐주실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하루결심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맨발 벗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은 여위어서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되어서 아버지 계신 곳으로 가니까 아버지가 그 아들이 집을 떠난 후에 하루도 쉬지 않고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구했는데 아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자 아버지가 뛰어 나갔습니다. 아들이 뛰어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뛰어가서 오는 아들을 맞이해서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야 이놈아, 어찌하여 집을 떠나서 어디가 살다가 이 모양이 되어 오느냐!”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회개할 기회를 얻어서 회개하려고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야 야, 시끄럽다!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집에 가서 우리에 들어가서 가장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먹고 즐기자!” 아들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너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나는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종중에 하나로 봐 주시옵소서.” 대답도 안합니다. 아들로 받아들인 증거로써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좋은 옷을 입혀서 환영을 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이렇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자식은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없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아버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밭에서 일하고 난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데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휘황찬란하게 불을 켜놓고 노래 소리가 들리고 춤추는 모습이 보여서 이 웬일인가? 종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당신의 둘째가 몸 성하게 집에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기뻐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뭐 어째고 어째? 이 놈의 집안 이제는 거꾸로 돌아간다. 난 안 들어간다.” 아버지가 와서 “야 빨리 돌아오너라! 너희 동생이 돌아왔으니 우리 함께 먹고 즐기자!” “아버지, 동생이 돌아왔다고요? 저 놈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가서 나쁜 놈들하고 다 탕진가산하고 이제는 병들어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왜 그를 영접하는 것입니까? 나쁜 놈인데... 처벌해야지요. 그런 놈하고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안 들어가겠습니다.” 아버지가 “얘야, 그래도 네 동생 아니냐. 죽어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찾지 않았느냐.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나는 기뻐하지 못합니다. 나는 아버지조차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저렇게 나쁜 놈을 아버지는 용서하시고 사랑하고 받아들이신다니 콩가루 집안 아닙니까? 집안에 질서가 서겠습니까? 나는 저런 놈이 집안에 있으면 나는 이 집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주더니 얘에게는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까?” “야~ 너는 나하고 같이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고 염소 새끼 아니라도 황소라도 네가 잡아먹고 싶으면 잡아먹으면 그뿐 아니냐. 왜 그러냐? 정죄하지 말고 심판하지 말고 들어오너라.” “나는 못 들어갑니다. 안 들어갑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은혜를 가지고 자식을 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죄를 다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와 사랑이 정의냐,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정의냐, 둘 중에 어느 것을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한때 미국의 종교철학자가 정의에 대해서 말을 해서 그의 책이 발간되어서 한국에서도 많이 읽고 선전도 많이 되었습니다. 정의, 정의가 무엇이냐. 여러분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이 성경에 보면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교회의 정의, 하나님의 정의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면 여러분 삼위일체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람은 육체적 사람, 혼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되어 있어서 삼위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은 영의 사람, 혼의 사람, 육의 사람 세 사람이 합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영의 나와 혼의 나와 육의 나와 삼위일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의 나는 육신을 쫓는 것인데 이 둘째 아들은 육신을 쫓는 육신의 나에 잡혀서 혼도 육신의 노예가 되고 영도 육신의 노예가 되어서 영이 노예가 되어서 끌려 다녔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노에가 되어서 영도 혼도 끌려갑니다. 육신의 일이 무엇입니까?
<본론>
1. 육신적인 사람, 둘째 아들
갈라디아서 5장 19절로 21절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아담과 하와가 사람을 만들었을 때 육체의 사람, 혼의 사람, 영의 사람 삼위일체로 만들었는데 육의 사람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는 이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육이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육의 사람은 혼과 영을 담고 다니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아주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육체가 있어야 삶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육이 타락하고 난 다음 죄가 들어오므로 부패하니까 육체의 일은 아주 더러운 것으로 꽉 들어차고 만 것입니다. 육신적인 자아가 혼적 자아와 영적 자아를 끌고 갈 때 그 사람은 꿈도 삶의 목표도 없는 부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육신이 왕이 되어서 혼과 영을 끌고 가면 그 사람은 부패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은 방탕한 삶의 결과 기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돼지 치는 직업은 가장 천한 직업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이 누더기 같이 썩었다는 것을 돼지를 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육을 따라가다가 보니까 혼도 파괴되고 영도 파괴된 것입니다. 여러분 혼은 자기 중심의 이론적인 삶을 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혼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자아가 혼의 자아인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자아를 가지고 살다가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했습니다. 육의 자아를 깨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면 육체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을 정복하고 마음속에 희망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죄를 고백하고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로 19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육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배고프고 고달프니까 안 깨어질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르기를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는 아버지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회개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여긴 것입니다. 자식이 깨어져서 돌아온 것을 아버지는 너무나 반갑고 기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자기 동생이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아주 미웠습니다. 맏아들은 혼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2. 혼적인 사람, 맏아들
맏아들은 무엇이든지 이성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동생을 용서와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생은 율법으로 죄를 지은 놈이고 죄를 지은 놈은 벌을 받아야 한다. 아주 혼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동생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아버지에 대해서 반항을 가졌습니다. 아버지의 비이성적이고 비율법적인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아버지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저런 나쁜 놈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우리 아버지가 법을 어겨도 유분수가 있지 집안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탕남, 탕녀와 함께 다 먹어버린 이 자식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도 잘못 되었고 동생은 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생인 둘째에게 사정없는 정죄와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동생의 허다한 허물을 덮고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에게 분노가 넘쳐흘렀습니다. 저런 분이 우리 아버지가 될 수 있느냐. 저런 부패한 동생을 내버려 두고 사랑하다니 있을 수가 있느냐.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입습니까? 동생을 정죄하고 심판한 그 형이 올바른 것입니까? 그 동생을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올바른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누가 옳습니까? 예수님께서 한번은 유대 사회에서 아주 천대하는 세리와 함께 식사하니까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저 죄덩어리인 세리와 함께 밥을 먹다니 있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식사하다가 말고 이 이야기를 들으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입니까 하나님? 그런데 저 뒤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의롭다 함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느냐?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말할 필요 없이 바리새인이지요. 일주일에 이틀에 한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는 다 내고 방종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까? 그냥 있었으면 의롭다고 청함을 받겠는데 뒤에 세리를 욕을 했다 말합니다. 저 세리와 같이 나쁜 생활하지 않습니다. 세리를 정죄하고 심판했기 때문에 누가 더 의로우냐고 예수님께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기가막힌 노릇인 것입니다. 이 바리새교인은 정말로 율법주의적으로 깨끗하게 잘 살았는데 자기가 잘 사는 것은 좋은데 이웃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정의란 것은 나만 올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리는 자기의 죄를 알고 가슴을 치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는데 예수님께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0~14)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옳게 살아도 자기를 높여서 나는 너보다 낫다. 나는 너보다 훌륭하다. 비교해서 자기가 훌륭하다고 자랑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도 용서받고 사랑을 받아서 은총을 입고 구원을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똑같이 죄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을 볼 때 용서하고 사랑해야 자기의 의로움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면 오래 예수 믿은 사람이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달래서 의로운 길로 이끌지 아니하고 욕을 합니다. 저런 나쁜 놈의 자식이 교회 다 나와? 아주 나쁘다. 정죄받아야 된다. 손가락질하고... 그러면 그 사람을 정죄한 그 죄 때문에 자기가 의롭게 산 것도 효과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남하고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너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말고 자기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깨어졌으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나오고 못된 사람이 있으면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이 좋지 비평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단히 어려운 삶인 것입니다. 죄인, 탕자, 사기꾼 등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맏아들은 자기 동생이 죄인이요, 탕자요, 사기꾼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 아버지 계시는 집에 안 들어가겠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과 같으냐면 죄인과 탕자와 사기꾼을 받아들이는 하늘 아버지 천당에 나는 안 들어가겠다. 아버지가 천당에 죄인이나 탕자나 사기꾼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서 데리고 간다면 나는 그런 천당에 안 들어가겠다. 그러면 안 들어가면 어디 갑니까? 만당은 없으니까 지옥에 내려가야지. 지옥에 내려가야지.
누가복음 15장 28절로 30절에 보면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러니 아버지 잘못해도 여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사랑과 용서를 원합니다. 어떠한 아버지냐, 여러분 보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고, 꺾어진 갈대도 꺾지 않는 것이 아버지인 것입니다. 그냥 우리는 가서 사람이 갈대가 꺾어져서 흐늘흐늘하면 우리는 꺾고 불이 잘 안 켜져서 연기가 나는 촛불 보면 훅 꺼버립니다. 이런 것은 우리 교회에 소용없다. 꺾어버려라. 그래도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잘 돌보아서 불이 잘 붙게 하고 상처 입은 갈대는 처매서 꼿꼿이 서게 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으로 크게 차려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와서 회개하는 사람을 원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 있는 곳에 하나님이 가신 것입니다. 의원이 쓸데 있는 곳은 병자 있는 곳이 아닙니까? 아버지는 죄인 있는데 가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병든 자에게 찾아가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자에게 찾아가서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슬퍼 우는 자에게 함께 가서 함께 울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큰 사랑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이고 저런 요한 삼서 2장 노래를 안 부르고 시작했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렇기 때문에 영혼이 잘못된 죄인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하나님은 찾아가서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용서하시고 구원시키는 역사를 베푸는 것이요 범사에 잘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생활이 막장이 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들어가서 그 사람들을 축복하고 건져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은 병들어 아파 괴로워하는 사람 찾아가서 병자를 위해서 기도를 받으시고 축복해 주셔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아, 오산리 기도원에 계십니다. 천만에요. 하나님 어디 계시냐. 여의도순복음교회당에 계십니다. 잘못 알았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냐. 죄인들 있는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냐, 가난한 사람 있는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냐, 병든 자에게 같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디 계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그와 같은 곳에 모시고 가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번에 블라디보스톡에도 가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병든 자와 같이 계시다는 것을 너무나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은 병이 한두 명 낫는 것이 아닙니다. 다 나았어요. 치료하는 하나님이 역사하니까 사람들이 모두 병이 낫고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그것을 보기를 원하신다 말입니다. 저 사람 안경 끼고 안수하는 것 도와주는 사람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 제가 20년 전에 블라디보스톡에 왔을 때 초등학교 학생이었는데 아버지는 누구야? 아버지는 자기 지역에 공산주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 서울에서 연락이 오면 그 연락을 받아서 공산주의를 보호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스크바에 연락을 하기 위해서 단파 라디오를 갖다 놓았어요. 단파 라디오는 일반 사람은 못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파 라디오에 이 청년이 들어가서 그것을 틀어서 제주도에서 방송하는 소련의 기독교 방송을 들었어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고 아들은 제주도에서 전파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어가지고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방송을 듣고 믿음이 자라서 목사가 되었어요. 아버지는 가슴을 치고 이 놈아 너 들으라고 단파 방송을 갖다 놓은 것이 아니라 공산당을 위해서 갖다 놓았는데 너는 들으라는 공산당은 안 되고 어떻게 해서 예수 믿고 목사가 되었느냐. 아버지는 잘못 따라갔습니다. 공산당은 마귀의 당입니다. 나는 그 단파를 통해서 한국 기독교에서 전파하는 복음을 듣고 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집회할 때 참석도 하고 이번에는 주최자가 되어서 나의 안내자가 되어서 도와주었습니다. 좌우간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어떠한 일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용해요. 공산주의가 있는 곳에 하나님을 얼마나 반대하고 배반합니까? 공산주의 집안에 하나님이 찾아가서 그 아들을 예수 믿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집 중에 아주 죄를 많이 짓고 방탕한 놈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제일 먼저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죄인과 같이 있기 때문에... 제일 병들고 못난 놈이 하나님을 먼저 믿고 나중에 인생에 성공하고 효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틀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 자랑하면 하나님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못난 것을 깨닫고 회개하면 같이 계셔도 자랑하면 하나님이 냄새가 난다고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3. 영적인 사람, 아버지
여기에 맏아들은 혼의 아들이고 둘째 아들은 육의 아들이고 아버지는 영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탕자를 품에 품는 것은 영적인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영적인 아버지가 육체적인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끌어안아서 그를 품어준 것입니다. 영적인 아버지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아버지이기 때문에 절대로 여러분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나님이 버리지 않습니다. 먼저 가서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범죄하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 용서할까요? 그때 예수님이 형제가 범죄하고 와서 회개하면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줘라. 하나님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허물을 벗겨 정죄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이 죄지은 사람 죄를 전부 벗기고 이것 보라고 죄지은 것 보라고 그 다음 심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을 벗겨 정죄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어서 용서하고 올바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이 완성된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자기가 되었지 율법의 행위로써 자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로 16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이 죄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잘못 살았을수록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셔서 여러분을 잘 살도록 이끌어 주려고 애를 쓰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부르심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진흙에 뒹굴기도 하고 도랑에 빠지기도 하고 티끌에 먼지가 묻기도 하고 그렇다고 진흙에 빠졌다고 그곳에서 안 가고 주저앉아서는 안 되지요. 진흙에 뒹굴면서 먼지투성이가 되면서 도랑에 빠지면서 온 몸 전체가 퇴비로 뒤집어썼어도 비틀거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의롭고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박수를 받으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데 하나님 아버지여,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나는 한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오. 나는 철야기도도 하고 하나님 말씀도 읽고 저 죄인들 하고는 틀립니다. 하나님, 가라가라! 비켜. 저 죄인들 오는데 걸거친다. 비켜라. 아버지 나는 개똥밭에 뒹굴었습니다. 소똥 밭에 드러누웠습니다. 나는 도랑에 빠져서 냄새가 납니다. 오너라. 그런 것 내가 다 씻을 수 있으니까 오너라. 좀 기다려라. 너 걷기 힘드니까 내가 가서 안아주마. 건져 와서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주고 의로운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깨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송아지를 잡아서 대접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4. 사랑의 역사
사랑은 언제나 여러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먹고 즐기는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나쁜 것 주지 않습니다. 제일 좋은 옷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값 주고 산 옷이 제일 좋은 옷인 것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것은 아들이 된 증거로써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신발은 아버지가 예비한 신발을 신겨준다는 것은 준비하는 모든 물질과 환경을 상속으로 주는 것입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고 먹고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금도 보고 너무 좋아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닮은 사람을 만들어서 그와 함께 영원히 즐기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없이 즐겁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계셔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품에 안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없으면 정죄와 심판이 난무하고 죽이고 죽는 비극이 천지에 충만할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 안의 정의는 용서와 사랑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교회 안의 정의는 용서와 사랑이다. 정죄와 심판이 교회의 정의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을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사랑하면 율법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한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과 10절은 말씀하기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물이 잘났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무조건하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한번 따라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저는 저의 기억에 나를 제일 좋아하시던 분이 우리 할머니 같습니다. 나는 맏아들이 되어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살았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하고 같은 방에 잔 기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 같이 자고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객지에 중학교 공부를 하러 갔다가 방학때 할머니 집에 간다고 연락을 하면 할머니가 동구 밖에 나가서 늘 내가 오는가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오면 뛰어와서 끌어안고 아이고 내 새끼야 아이고 내 새끼야 컸네. 키가 벌써 컸네. 모르게 컸네. 너 장가가도 되겠구나. 아이고 이놈아~ 아이고 내 새끼야~ 나는 참 귀찮습니다. 그때는 그리고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강아지 새끼, 토끼 새끼, 병아리 새끼, 내 새끼.. 그 말이 듣기 싫어요. 야 이놈아 그러는게 차라리 좋지.. 내 새끼야~ 그러나 할머니가 나를 안고 너무나 좋아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요. 지금 천국에 계신데 내가 천당에 가면 뛰어와서 그렇게 해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외롭고 괴롭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스바냐 3장 17절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고 이 자식아, 내 새끼야~ 어찌하다가 이렇게 괴로움 당하다가 왔느냐. 다 잊어버려라. 좋다. 나하고 같이 있자. 내가 너를 돌봐주겠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의지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무엇을 안 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용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임할 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용서가 우리 안에 체험되어 같은 용서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당신과 내 안에 나타나는 가장 위대한 초자연적인 기적이다.” 가장 큰 기적이 용서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남을 용서하는 마음이 기적이라. 그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용서를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일에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용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도 항상 사랑하며 산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 후반기 인생은 전반기 인생과 다르거든요. 전반기 인생은 서로 같이 만나서 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만 몇십년을 같이 살다보면 이제는 예쁜지 안 예쁜지도 모르고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모르고 같이 살고 싶은지 안 살고 싶은지도 모르고 뭐냐, 그저 같이 사는 것입니다. 내 신앙상담에 와서 중년이상이 와서 사랑을 느낄 수가 없다고 그런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때 내가 뭐라고 말하냐면 사랑을 느낄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사는거지... 그냥 밥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이상 바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사람들끼리 죽자고 사랑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저 밥 먹고 사는 것인데 미워하지 말고 용서만하면 됐습니다. 용서를 안 하면 문제이지만 용서만 하면 됐습니다. 돈을 못 벌어와도 용서해주고 애교를 안 줘도 용서해주고 좀 슬픈 일을 당해도 용서해주고 용서가 제일 위대한 기적인 것입니다. 교회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교회 올 때 늘 용서로써 받아주시지 여러분에게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이「용서의 기쁨」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카톨릭 수녀가 지었지만 시는 진리를 말해서 아주 좋은 시입니다.
산다는 것은
날마다 새롭게 용서하는 용기
용서받는 겸손이라고
일기에 썼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것은
용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기쁨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직이 고백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네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마음에 드는 사람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수백 번 입으로 외우는 기도 보다
한 번 크게 용서하는 행동이
더 힘있는 기도일 때도 많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용서하는 기쁨
용서받는 기쁨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