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개월째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州) 바흐무트(러시아식 표현은 아르테모프스크 Артемовск)의 운명이 개전 초기에 우크라이나군의 최후 저항 거점으로 지목됐던 마리우폴을 닮아가고 있다.
잘 알다시피, 도네츠크주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은 러시아 연합군(러시아군과 친러 도네츠크인민공화국 민병대)에 밀린 우크라이나군(민족주의 무장단체 출신의 '아조프 연대' 포함)이 아조프스탈 등 마리우폴의 산업지대에 숨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곳이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공세에 끝내 버텨내지 못하고 지난해 5월 중순 수천명의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손을 들고 나왔다. 러시아 정부는 이후 파괴된 도로 등 기반시설을 복구하고 주택 재건에 나선 상태다.
러시아군이 지난해 5월 아조프스탈에서 저항하다 항복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몸을 수객하는 장면/현지 매체 영상 캡처
마리우폴의 함락 직전까지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저항군에게 결사항전을 독려하고, 증원군 파견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러시아 측이 제공한 안전대피로를 통해 민간인들을 먼저 내보낸 뒤 우크라이나군의 탈출 시도와 철수 명령, 항복 신호 등이 잇따라 포착된 바 있다.
러-우크라-서방 외신들의 최근 보도를 보면, 바흐무트 상황도 마리우폴과 비슷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바흐무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민간인 철수 소식이 전해지고, 이제는 현장의 일부 지휘관들이 철수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또 증원군 파견 이야기도 나온다. 바흐무트 방어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여겨지는 신호들이락호 할 수 있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바흐무트/영상 캡처
바흐무트 강의 댐을 폭파시켜 주변 지역이 물바다로 변한 모습/현지 매체 영상 캡처
외신에 따르면 영국 국방부 산하 국방 정보국(DI)은 4일 트위터를 통해 "우크라이나군은 바흐무트를 사수하는 데 점점 더 혹독한 압박을 받고 있다"며 함락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했다. "바흐무트 서쪽 방향을 제외한 3면에서 러시아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라는 분석을 내놨다.
솔직히 말하면, DI도 이같은 흐름을 끝까지 인정하기를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바꿨다는 느낌이 강하다.
우크라이나와 서방 측은 그동안 바흐무트 공략에 나선 러시아군 탱크·장갑차들이 파괴되는 영상을 주로 공개하면서 '승리'한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전쟁에서 방어와 공격 간의 사상자 비율이 1대3이라는 공식에 따르더라도, 공격에 나선 러시아군의 손실이 많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큰 손실을 감수하고서도 목표물(바흐무트) 공략에 성공할 경우, 수많은 적들(우크라이나군)을 포로로 잡을 게 뻔하다. 마리우폴 전투에서도 이미 보지 않았던가?
우크라이나군의 마지막 몸부림은 최근 바흐무트로 연결되는 동쪽과 서쪽의 주요 다리 2개를 파괴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4일 "상황이 어렵다는 징후 중 하나는 어제(3일) 알려진 교량 파괴"라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이 다리를 파괴했다고 주장하지만, CNN 등 서방 언론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리 파괴 이유는 러시아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라는 게 서방 언론의 분석이다. 파괴된 바흐무트강 동쪽의 다리는 동쪽에서 진격해오는 러시아군을 겨냥한 게 분명하고, 바흐무트에서 서쪽으로 열린 '흐로모보 마을'의 다리는 러시아군의 추격을 막기 위한 위해서라고 한다.
텔레그램 채널에서는 바흐무트 강을 막은 댐을 폭파시켜 주변 지역을 물바다로 만들었다는 정보도 올라왔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 지상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시르스키와 특수군 사령관 빅토르 호렌코가 잇따라 바흐무트를 방문했다. 4일 바흐무트에 도착한 호렌코 사령관은 "우크라이나군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지만,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고 치하했다.
바흐무트(오른쪽 푸른색 사각형 표시)에서 서쪽의 콘스탄티노프카(맨 왼쪽)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도 스투포츠키(왼쪽 붉은색 둥근 표시)가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러시아군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고 한다/사진출처:스트라나.ua
러시아 민간 용병 기업 '와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은 "바흐무트 포위 작전은 곧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서쪽의 흐로모보와 콘스탄티노프카로부터 바흐무트로 연결되는 루트는 아직 열려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주요 도로가 이미 러시아군의 사정거리속에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군의 이동이나 병참 수송은 '좁은 시골 길'을 따라 이뤄진다고 한다. 그 길은 그러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진창으로 변해 부대및 장비 이동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뉴욕타임스는 시르스키 지상군 사령관이 두번이나 바흐무트를 방문한 것은 우크라이나군이 그만큼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또 "우크라이나 증원군이 최근 바흐무트로 파견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지 주둔군의 후퇴를 위한 것인지, 도시 방어를 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NYT는 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군이 곧 바흐무트를 떠날 것으로 예상한다. 시르스키, 호렌코 사령관의 바흐무트 방문도 우크라이나군 사령부의 철수 명령을 앞둔 현장 점검 차원으로 본다. 철수 명령이 내려지면, 우크라이나군이 가장 고전하고 있는 바흐무트 동쪽 지역에서부터 제한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바흐무트에 있던 주요 자료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기 위해 창밖으로 옮기는 모습
바흐무트의 긴박한 상황을 전하는 현지 주둔군 지휘관
스트라나.ua는 "바흐무트에서 개별 주둔 부대의 철군 소식은 계속 전해지고 있다"며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마디야르' 암호명 지휘관이 이끄는 부대와 전직 검찰총장이 이끄는 부대가 철수 명령을 받았다"고 전했다. 바흐무트는 조만간 '마리우폴'의 전철을 따를 가능성이 확연히 높아졌다. 서방의 분석기관들과 언론들이 지금까지 우크라이나군의 수세를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듯한 태도를 바꾼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 오늘(4일)의 주요 뉴스 요약
-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4일 도네츠크 남부 지역을 찾아 군 지휘소를 둘러봤다고 러시아 국방부가 발표했다. 쇼이구 장관은 전방 지휘소에서 현지 사령관의 현황 보고를 받고 장병들에게 격려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쇼이구 장관이 방문한 곳이 바흐무트와 함께 관심이 집중된 또 한 곳의 격전지 우글레다르(부흘레다르)라고 밝혔다. 그는 그 곳에서 이 지역의 작전을 총괄하는 러시아 동부군관구 사령관 루스탐 무라도프 장군과 작전 협의를 가졌다고 했다.
- 미하일 포돌랴크 우크리아나 대통령 보좌관은 4일 친우크라 군사 블로거(텔레그램 인플루언스)들과 만나 "전쟁은 올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블로거가 전쟁이 끝나는 시기에 대해 묻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며 "2023년에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답변에 한 블로거가 "우리(군사 블로거들)를 애들로 보나(혹은, 장난하나)"라고 반응하자, 포돌랴크는 웃기만 했다고 스트라나.ua는 전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장면을 본 네티즌들은 찬반으로 갈렸다고 한다. 한 네티즌은 "미국과 나토도 전쟁이 앞으로 2~3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발하기도 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옌스 스톨텐베르그 NATO 사무총장도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곧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했고, 콜린 칼 미 국방부 차관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향후 3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 유럽연합(EU)은 4일 우크라이나 서부 르보프(르비우)에서 열리는 '정의를 위한 연합'(United for Justice) 콘퍼런스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국제 침략범죄 기소센터'(ICPA)를 신설하기 위해 참여 당사자 간의 서명식이 열렸다. ICPA는 산하에 공동조사팀을 두고, 푸틴 대통령을 포함한 러시아 지도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관여한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를 직접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준비할 계획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범죄의 단죄는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관할이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ICC의 관할권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ICC가 현실적으로 러시아를 재판에 회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