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白翎 / 이창옥
퍽이나 오랜만의 바닷길이다. 송골송골한 마음은 지난날의 자국의 맵시를 하나둘 들추어 잠시나마 회개의 마음이 가득 스민다. 부푼 가슴과 뜨거운 설렘을 퍼 담은 거기에는 착한 마음이었고 고운 솜씨를 일궈낸 젊음의 사랑이었다. 거울인 양 맑은 물에 나의 맘을 주어 내가 다시 태어나는 듯 청순한 고운 햇살로 나를 비춘다. 물은 정숙하고 겸공한 지혜를 가진다. 때로는 험한 노도怒濤는 채찍을 하고, 다시 순탄한 자기 본향으로 오는 태깔은 우리 인생을 갈무리하는 교훈을 만들어 담뿍 안긴다.
바다는 말이 없다. 과묵한 천성을 지닌 것 같다. 이는 평화의 생명을 고스란히 가져 자연의 신성성을 숙명으로 알고 인간의 언저리를 두들긴다. 그럼에도 그 매운 매를 동댕이치는 빙충맞은 일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바다는 아무런 말도 탓도 하지 않는다. 바다는 고마운 벗이며 스승이며 지극히 사랑한 이웃이다.
바닷길은 언제나 청랑한 마음의 길이다. 온통 하얀 마음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산책길이다. 오욕五慾을 청아한 바닷물에 던진다. 맑은 바람을 흠씬 마신다. 잔잔한 파고를 열며 산과도 같이 크나큰 여객선은 학의 포말을 이루는 무늬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힘은 나를 오싹한 느낌으로 끌어낸다. 저만큼 희고 작은 어선들이 곰실곰실 떠간다. 눈앞에 펼쳐진 망망한
바다는 쪽빛이며 수정같이 맑은 물의 거대한 위용이 나를 감싼다. 여기 내 몸을 실은 우람한 여객선은 물 위에 떠 있는 한낱 통나무이던가.
저만큼 일자로 뻗은 하얀 깃의 섬이 우릴 반긴다. 아마도 4시간을 수상 손님이 되어 목적지인 백령도白翎島를 맞이한 것이다.
다북쑥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이곳은 섬이 아닌 육지다. 드넓은 논과 밭, 아담한 산세가 바람의 울 되어 풍작의 노래를 만드는 옥토를 지나 한 뙈기 널따란 모래밭에 닿았다. 일명 ‘사곶 해변’을 걷는다. 잔잔히 일렁이는 바다를 벗하며 푸른 하늘보다 투명한 바다를 감싸는 길고 긴 모래사장을 본다.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4km의 단단한 백사의 바닥은 규조토 모래 해변으로 세계적인 한 곳이며 또 한 곳은 이탈리아에 있다는 기록이다.
해변을 따라 바다의 벗이 되어 ‘콩돌해변’을 맞는다. 백, 갈, 흑, 적, 청회색을 한 콩알만큼 한 크기로 곱고 잘생긴 몽돌이 2km의 해안을 만들고 있다. 마치 잘 영근 콩밭이 행여 상처를 낼까 발밑물소리가 간질댄다. 몽돌이 밀리는 작은 파도는 합송되어 잔잔한 멜로디가 또 하나의 명곡을 창작한다. 맑고도 맑은 물속에 비친 살가운 오색 콩돌은 한 점의 수채화를 그린다. 오색자갈을 삶으로 섬긴 파도를 안으로 또 안으로 감추고 우뚝 선 빨간 등대가 오가는 손님을 마중하는 길잡이 되어 시리도록 아픈 듯 오뚝 섰다. 눈앞에 펼쳐진 천연의 바다를 낀 조화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 된다 해도 누가 토를 달까? 잘게 부서지는 금빛 햇살의 사랑이 질펀히 쏟아진다.
또 하나의 물길을 연다. 통통배는 두무진頭武津을 본다. 기암들은 마치 장수들이 시립한 형상을 본 듯하다. 이곳은 서해의 해금강이요 백령도의 백미가 아닌가. 높이 솟은 웅장미, 다양하고 기묘하다. 깎아지른 50여 미터로 시립한 ‘선대암’이 눈길을 끈다. 다소곳한 이 자리는 우리의 최북단의 해안을 돌고 있는 모멘트이다. 앞바다 긴 섬이 북한의 땅이 손안에 잡힐 듯 지척에 떠 있다. 한 걸음의 거리인데 가슴이 뛰고 머리가 쭈뼛 선다. 왜일까?
5월의 소생의 기쁨을 비취빛 바다에서 들여오는 갯바람소리가 가슴과 귀를 두들긴다. 바다를 한 눈에 가득 안고 한걸음에 깎아지른 낭에 오뚝 선 ‘심청각’에 올랐다. 기념관 안에 효녀 심청이 자라고 생활한 초가집과 유물을 장식한 꾸밈이 정겹다. 돌담으로 둘러친 높은 울은 북한의 땅을 망원경으로 건너보는 기회를 얻었다. 물 건너 낮은 긴 섬의 끝자락에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는 ‘당산곶’이 눈에 잡힌다. 검고 작은 섬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송곳송곳 서성인다. 마음이 설 설 인다. 언제인가 하뭇하지 못한 이 물길이 남북이 열릴 것을 간절한 소망과 숙숙肅肅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더듬거리며 마음을 조아린다.
또 한 켠에 길게 뻗은 몽돌 밭 해안을 지나 허위허위 숨을 고루며 쉬엄쉬엄 양편 꼬불꼬불한 꽃길을 오른다. 바다를 바라본 오뚝 선 하얀 삼각 천안함의 46용사 위령탑을 만난다. 탑 앞 돌 벽에 용사들의 흉상에는 마치 생동하는 눈빛이 번득이는 듯하다. 탑 중앙에 용사의 애국 혼을 기리는 듯 불꽃이 힘 있게 타고 있다. 우리 젊음의 혼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명복을
곱기도 곱도록 마음 다하여 기도를 올린다.
백령도.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형상을 닮았다는 백령도, 마치 흰 나래 깃(백령)의 길을 더듬어 최북단의 이곳에서 그 자체의 거대한 움직임 앞에 한 점 초라한 나를 본다. 역사와 문화를 갖고 색다른 세월의 흔적과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나만의 랜드 마크가 가슴에 새겨진다. 온전한 섬의 둘레에는 바다가 감고 있는 생명바다의 종착역이다. 마음 부자의 섬이며 도담한 넓은 평야가 육지와 같은 생활을 날로 달로 역사를 엮어 된 오늘의 물문화의 터전을 이룬 이곳은 바다가 있어 빛이 일고 맑은 물과의 천연의 조화가 이루어낸 아름답고, 평화롭고, 텁텁하게 살진 섬 같은 육지라 하여도 되지 않을까. 사랑은 베풀수록 더 애틋해지는 찰진 멋을 배운다는 백령도에 잔잔하고, 청순하고, 청아한 파도는 오늘도 고운 음악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