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 수업
권승섭
책을 펼치고 둘러앉은 장면은 낯설다
돌아가며 낭독을 하는 일은 더욱 드물다
어느 희곡에서는 나무 역할을 맡았다 온 힘으로 침묵만을 지키면 되었다
*
나무와 강변을 걷던 초저녁도 있었지 해가 사라지면 서로를 더욱 숨겨주기 쉽고 보기 드문 왜가리를 찾아 오래도록 나무와 걷는다
목이 굽은 새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왜가리인지 황새인지 백로인지 끝끝내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작은 새들이 나무에게 다가와 앉는다
새들이 나무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차례로 돌아가며 새들은 지저귄다 함께 책을 낭독하는 일은 여전히 낯설다
나무에게도 첫 대사가 주어졌고 나무는 잠시 쉬어가자 했다 벤치에 머물며 한참을 연습했지만 너무 사랑스러워 내놓기 아까운 말이었다
*
어느 해에는 우리 모두 나뭇가지 위에 옹기종기 모였다 우리는 큰 눈을 가진 새의 역할을 맡았다 새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읽자 오래도록 지저귀자 누군가 말한다
잎사귀를 겹쳐 만든 책을 펼친다 각자의 목소리로 읽고 넘길 때마다 흩어져 가는 페이지였다 그렇게 이른 가을이 찾아왔다
우리는 아슬아슬한 언어 위에 앉아 있다 연약한 가지 위에서 넓은 세상을 본다 높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지
새들과 우리는 구분 없이 지저귀고 마른 잎사귀에 목소리를 새긴다
*
다음 해에 우리는 강물이 되고 물결이 되고
물안개가 되는 역할을 맡았다
흐르는 강은 수면 위에 무늬들을 새긴다 멈추지 않고 읽기를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ㅡ 반연간 문예지 《포엠피플》 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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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감상
낭독 수업 / 권승섭
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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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3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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