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뉴욕시와 뉴저지주 [1]
9월 둘째 주에 엄마는 뉴저지주에 무시히 도착해 오빠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새집으로 이사했다. 나도 막 박사과정 첫 학기를 시작한 참이라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엄마에게 내 학업은 당신의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를 벌리고 개인사에 진 얼룩을 지워내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회정의에 대한 내 의식은 우리 가족사와 더 밀접하게 얽혀만 갔다.
1995년 하버드대학 1년 과정 교육학 석사 프로그램에 등록했을 때, 나는 하버드 다니는 자식을 둔 엄마의 평생 소원을 이루어드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의 분위기가 엘리트주의적이고 특히나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다소 퇴행적이라고 여겼지만, 급진적 교육관을 가진 두 명의 객원교수에게 지도를 받으며 가족사를 공개적으로 탐구할 수 있었던 것만큼은 운이 좋았다.
나는 벨 훅스의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Teaching to transgress』를 읽은다음, 졸업 후 훅스 밑에서 공부하려고 지성의 공동체를 찾아 뉴욕으로 이사했다. 뉴욕시립대학에서 비학위 과정 학생으로 2년 동안 대학원 수업을 들은 후에는 미군 성노동자로서 엄마의 과거를 연구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가지고 뉴욕시립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입학원서에도 연구 계획을 분명히 밝힌 터였다.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동시에 엄마가 뉴저지주로 다시 이사해 내 학문 인생에 혈육의 그림자가 된 것은 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엄마를 방문할 생각이 없었다. 통학에만 세 시간이 넘게 걸렸기에 박사과정 1년 차를 제대로 해내기에도 벅찼다. 그 무렵 나는 브루클린 사이프러스힐스에 있는 커뮤니티 센터에서 헤드 스타트 프로그램 디렉터로 상근을 했다. 세사르는 그해에 오프브로드웨이 쇼와 함께 순회 공연을 하고 있었고 주말에 집에 올 때나 가끔 함께 시간을 보냈다.
브르클린에 있는 우리 아파트에서 프린스턴에 있는 엄마 집까지 가려면 지하철로 40분, 뉴저지 트랜짓 기차로 갈아타고 한 시간 반, 기차역에서 내려 도보로 40분이 걸렸다. 학교 과제로 꽉 찬 책가방을 메고, 식재료로 가득한 장바구니을 양손에 든 채였다. 엄마는 늘 내가 가져온 책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두껍고 글씨는 또 얼마나 작은지에 감탄하곤 했다. "우와, 읽을 게 이렇게 많네, 나는 평생 읽어도 그렇게 많이는 못 볼 거 같은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내가 새집으로 옮긴 엄마를 처음 방문하고 두 번째 방문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1998년 10월 2일 금요일에 출근해 해드 스타트 프로그램에서 교사를 위한 현장 교육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 프로그램 참여 교사인 두 자매 선생님으로부터 심장마비로 부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