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창을 부시고 들어오는 어느 날, 첫째 딸이 무슨 연유인지 홍소를 터뜨리고 있다. 난 영혼의 안식처인 소파에 누워 그 모습을 보며 덩달아 웃는다. 딸의 웃음은 내 영혼을 행복으로 물들게 만든다. 그러다 딸의 얼굴에서 재미 하나를 발견한다. 나랑 너무 똑같이 생겼다. 옆에서 웃는 모습에서 내 얼굴의 잔상이 보여 새삼 기가 막혔다.
첫째는 날 닮아 동그란 두상에 오동통한 볼살을 가졌다. 도톰한 체형까지 닮아버렸다. 입체 초음파로 뱃속을 봤을 때부터 이미 예감했지만, 태어나서 실물로 보니 유전의 신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다행히 이목구비만 나를 닮았고, 전체적으로 엄마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그래도 둘다 어쩔 수 없는 내 딸이라, 내가 긴 머리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막내는.... 아들이라 그런지 그냥 내가 환생한 수준이다. 막내를 보고 있으면 웃기다 못해 헛웃음이 나온다.
세 아이의 타고난 성격도 벌써 내 모습이 느껴진다. 첫째는 눅진한 면이 있고, 둘째는 뭐든 해내고야 마는 집념이 있다. 셋째는 뭐니 뭐니 해도 나의 귀여움을 닮았다. 이렇게 쓰다 보니 좋은 건 다 내 탓이라는 교만이 솟는다. 내 새끼들이니 날 닮은 건 당연하다.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얘들아, 미안하다...’
이런 사과로 못나고 모난 날 닮은 아이들을 향한 죄책감을 한 꼬집 덜어 본다. 그래도 다들 예쁘게 닮았다고 하니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어 본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라고 한다. 자녀를 낳아보니 공감 백배다. ‘함함하다’는 사전을 보면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 ‘소담하고 탐스럽다’는 뜻이다. 고슴도치가 평생 듣지 못할 평가다. 고슴도치는 가시가 돋친 불편한 동물이다! 허나, 제 어미의 눈에는 콩깍지가 씌어 보드랍고 탐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내 자식도 그렇다. 누가 뭐래도 ‘세젤예’(세상에서 제일 예쁜)다. 어디 있어도 눈에 띄고 광채가 난다. 날 너무도 똑 닮아 마치 내 분신같다. 나 자신처럼 여겨질 때도 있어 아이의 감정에 동화되기도 한다. 웃으면 같이 웃고, 울면 나도 울고 싶어진다. 이렇다 보니 자녀는, 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유일무이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존재 자체로 예쁨 받던 아이들도 세상에 나가면 평가를 받는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줄이 세워지기도 한다. 그 중 ‘얼평’(얼굴 평가)이 가장 심하다. 예쁜 사람, 사물을 좋아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사람을 얼굴로 평가하는 물결이 거세진다. 아이들이 보는 영상만 봐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자주 노출이 된다. 동화책은 예외가 아니다. 언제나 주인공은 늘씬하고 멋지다. 딸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주는 새하얀 피부, 푸른빛의 큰 눈, 금색 빛이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필수다.
얼마 전 디즈니의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2023)가 개봉되었다. 인어공주를 보지 않고 자란 사람이 없다. 꿈과 환상, 감동을 주었던 동화였다. 자연스럽게 온갖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논란으로 변질하였다. 이유는 주인공으로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Halle Bailey)가 캐스팅 되었다는 것. 개봉하기도 전에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치며 벌써들 실망을 표출했다. 동심을 파괴당한 피해자가 되어 원망 섞인 비판을 내뱉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흥행에 참패했다. 참 답답하면서도 이제 이해가 된다. 연기력보다 비쥬얼로 배우를 선택하는 이유를 말이다. 연기는 배우고 익히면 되지만, 얼굴은 바꿀 수 없으니 그러지 않겠는가.
딸 아이들이라 그런지 외모에 벌써 민감하다. TV, 동화 속 주인공을 보며 팔짝 뛰며 열광하다가, 불쑥 자신과 비교하며 시무룩해진다.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는, 지금 모습을 눈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볼 때마다 반하고 또 반한다. 보고있어도 보고 싶고, 보지 않으면 사무치게 그리운, 이런 팔불출 같은 말이 줄줄 나온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니, 마음이 아린다.
더 심각한 것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외모까지 평가한다. 순수해 보이는 이 어린이들이 남을 향한 ‘얼평’에 벌써, 기탄없이 동참한다. 때때로 아이들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런 질문을 한다. ‘저 사람은 왜 키가 작어?’ ‘저 오빠는 왜 뚱뚱해?’ ‘이 친구는 예뻐서 좋아’ ‘이 아이는 귀엽다’ 이런 말들을 서슴지 않고 한다. 스스로를 주인공과 비교하며 속상했을 텐데, 그 아픔을 또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 같아 놀랬고, 겁이 났다. 그래서 이때만큼은 단호하게 아이들에게 훈육했다.
“얘들아, 누구도 너희를 외모로 평가하거나 비하할 수 없어.
그리고 너희도 누구를 외모로 평가하거나 비하하면 안 돼.
모든 사람은 예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단다!”
자녀는, 누구와도 비교되어서도, 우열로 나뉘어서도, 폄하되어서도 안 된다. 그럴 일 없겠지만, 그래서도 안되지만, 혹여나 왜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 하나의 이유를 말해주고 싶다. 우리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투영된, 하나님을 가장 닮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존재다. 이 이유 하나로 우리 아이들은 존귀하게 여겨져야 한다.
가정에서, 학교나 학원, 심지어 교회에서도 아이들이 차별을 받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니 예쁘고 똑똑하고 심성이 좋은 아이에게 마음이 간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나도 그런 적이 순간순간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가르쳐 보면서, 이제는 내 자녀를 키워 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모든 아이는 사랑과 관심이 코프다. 아무리 모난 말과 행동을 하고 심통을 부려도, 모든 아이는 예쁨 받고 싶다.그런데 말이다. 모든 아이는 예쁨을 받고 싶어하기전에 이미 충분한 예쁨을 받아야 한다. 그 존재 자체로.
한 영화에서, 꽤나 높은 벼슬에 있는 ‘선비’와 당시 가장 천했던 ‘노비’의 딸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았다. 큰 울림이 있어 수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선비는 노비의 딸이었던 한 소녀에게 ‘꿈’이 있는지 물었다. 질문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소녀는 노비의 딸이었기에 노비 신분을 지녔고, 노비에게 꿈은 가당치도 않은 환영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질문에 소녀는 가슴 저미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는 선비가 감동스런 맺음말을 건넨다.
소녀: 그 꿈이라는 거 생각해 봤습니다.
선비: 그래 무엇이 되고 싶으냐?
소녀: 꽃이 되고 싶습니다.
선비: 꽃? 왜 꽃이냐?
소녀: 꽃은 어디서든 귀한 대접을 받지 않습니까?
잡초처럼 뽑아 버리지도 않고 잔디처럼 밟지도 않고 그리고 누구에게나 예쁨을 받고.
선비: 꽃이 아니어도 사람은 그냥 그대로 귀한 것이다
많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 장면이었다. 꽃이 되고 싶은 아이는, 이미 꽃이었다. 아니 꽃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 선비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서 누구도 그 소녀를 뽑지도, 밟지도 못하도록 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 대사를 기억하면서 아이들을, 지금은 내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다.
항상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바른말이어도 윽박지르면 안 되고,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되고, 내 성에 차지 않는다고 조롱하고 비교해서는 안 된다. 머리로는 아는데 정말 잘 안된다. 아빠이고, 목사이기 이전에 나도 고약한 사람이었다. 넓은 바다처럼 품어주고 싶지만, 현실은 간장 종지만도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곤 했다.
후회하고 자책했고, 아이들에게 사과도 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마구 대하는 모습은 지극히, 내 분풀이였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벌어진 거다. 그 덕에 이 예쁜 아이들은 내 더러운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아이들이 나에게 사랑받으려고 애쓴다. 아빠가 좋아하는 행동과 말을 하려고 한다. 아이들이 사랑받으려 하는 노력은 내가 온전히 사랑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음속에 있던 진심을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얘야, 넌 하나님의 형상이란다.”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계획을 갖고 있단다.”
“꽃처럼 너무 예쁘고 경이로워서, 아빠도,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할 수 없단다.”
이 말을 듣고 자라면 하나님의 형상 답과 꽃처럼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자라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날 닮은 아이를 바라보는 모습보다 훨씬 더 멋지고 인자한 아빠 미소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알았으면 좋겠다. 부모도 자기를 닮아 자식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데, 하나님은 오죽하실까. 당신의 형상을 지닌 우리 자녀를 얼마나 예뻐하실까. 우주도 품지 못한 사랑으로 우리 자녀를 바라보실 거다. 그래서 나는 매순간 이렇게 말해주지 못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들려주시는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