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의용위(見義勇爲)
옳은 일을 보면 용감하게 나서야 한다는 뜻으로,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하며, 옳은 일을 보면 나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말이다.
見 : 볼 견(見/0)
義 : 옳을 의(羊/7)
勇 : 날랠 용(力/7)
爲 : 할 위(爫/8)
공자(孔子)의 말이지만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던진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유묵(遺墨)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 대구(對句)를 이루는 견리사의(見利思義)와 함께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온다.
이익(利益)을 보고 의리(義理)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다. 비슷하게 무엇을 보고(見) 어떻게 하라는 또 하나의 성어가 정의를 보고(見義) 용감하게 뛰어들라(勇爲)는 이 성어다. 역시 논어의 위정(爲政)편에서 유래했다.
공자(孔子)는 위정자(爲政者)가 예(禮)와 덕(德)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할 때 백성이 교화(敎化)된다고 봤다. 학이(學而) 바로 다음에 위정(爲政)을 둔 이유라고 한다.
이 위정편의 제일 마지막 문장을 보자.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자기가 모셔야 할 조상이 아닌데도 그를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 의로운 일을 보고서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주자(朱子)의 해석을 보자.
非其鬼는 謂非其所當祭之鬼라.
비기귀는 위비기소당제지귀라.
그 귀신이 아니라는 것은 그 마땅히 제사지내야 할 귀신이 아님을 이름이라.
諂은 求媚也라.
첨은 구미야라.
첨(諂)은 아첨을 구(求)함이라.
天子는 祭天地하고,
천자는 제천지하고,
천자는 천지에 제사지내고,
諸侯는 祭山川하고,
제후는 제산천하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지내고,
大夫는 祭五祀하고,
대부는 제오사하고,
대부는 대문, 방문앞, 부뚜막, 아랫목, 처마 즉 오사에 제사 지내고,
庶人은 祭其先하되,
서인은 제기선하되,
백성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되,
上得以兼乎下하며 下不得以兼乎上也하니,
상득이겸호하하며 하불득이겸호상야하니,
위의 직분에서는 아래의 제사를 겸할 수 있으나, 아래 직분은 위의 제사를 겸하지 못하니,
庶人而祭五祀하고 大夫而祭山川하고,
서인이제오사하고 대부이제산천하고,
백성이면서 오사에 제사지내고, 대부이면서 산천에 제사지내고,
諸侯而祭天地하면 此所謂非其鬼也라.
제후이제천지하면 차소위비기귀야라.
제후이면서 천지에 제사지내면 이는 이른바 그 귀신이 아니니라.
苟非其所當祭之鬼에도 而越分而祭之면,
구비기소당제지귀에도 이월분이제지면,
진실로 마땅히 제사지낼 바의 귀신이 아님에도 직분을 넘어 제사지내면
是는 徼福求媚이며 其心은 失之諂瀆也니 雖祭亦何益哉리오.
시는 요복구미이며 기심은 실지첨독야니 수제역하익재리오.
이는 복을 달라고 아첨하는 것이며, 그 마음은 직분을 잃어버려 아첨하고 모독하는 것이니, 비록 제사를 지낸들 또한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하늘의 귀신(神)과 땅의 귀신(示)에 비해 사람의 귀신이 鬼(귀)이다. 평민들이 제사를 지내야 할 대상이 아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복을 구하기 위한 아첨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옳지 않은 일을 보면 마땅히 하지 않아야 용기 있는 일이라고 했다.
송(宋)나라의 정치가이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어가는 문인 구양수(歐陽脩)를 평한 글에 이 구절이 변용되어 사용됐다. ‘천성이 강직하고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했다.’고 송사(宋史) 열전에 올라 있다.
天資剛勁 見義勇爲.
천자강경 견의용위.
이런 훌륭한 가르침이 사라진지 오래됐는지 요즘의 중국에선 물에 빠지거나 노상강도를 당하는 사람을 구경만 한다. 화재가 난 건물의 창살에 낀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도 태연히 동영상을 찍어 모두들 시대의 치욕이라 개탄한 적도 있다.
우리라고 손가락질만 할 형편이 아니다. 60대 택시기사가 운행 도중 사고를 내고 심장마비로 쓰러졌는데도 골프여행을 가던 승객들은 신고도 않고 짐만 챙겨 떠났던 일,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않으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이런 삭막한 세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운 일을 한 의인이 나타나 한국인에게 청량감을 줬다. 오래 전 경부고속도로 관광버스 화재사고에서 불길이 번지는 차 안의 부상자 4명을 울산의 병원으로 옮긴 교사 이야기다. 강원도 묵호의 한 고교 윤리 담당 소 모교사가 주인공인데 공익재단이 주는 상금 5000만원도 본연의 임무를 했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견의용위(見義勇爲)
정의(正義)를 보고 용감(勇敢)하게 뛰어 듦을 뜻한다.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가 말하였다. “자기의 귀신이 아닌데 그것을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며, 옳은 일임을 알고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의를 보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용기없는 것(見義不爲 無勇)이라는 말이 있다. 송사(宋史) 구양수전(歐陽修傳)에 견의용위(見義勇爲; 정의를 위해 용감하게 행동한다)라는 성어로 바뀌어 등장하는 이 말은 중국정부에 의해 정의를 위해 나서라는 국민 계도용 캠페인 용어로 종종 사용되기도 한다.
중국이 사서의 성어까지 동원, 강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중국인 대부분이 그런 용어를 들먹일 만한 행동을 실현에 옮기는 경우가 드문 탓이다. 물에 빠지거나 노상 강도를 당하는 사람을 구경만 한다든가 교통사고 현장에서 부상자는 외면한 채 돈될 물건을 다투듯 챙기는 인간 군상이 즐비한 곳이 바로 중국이다.
요즘 중국 교육계와 전국 각 가정은 바로 이 견의용위(見義勇爲)로 떠들썩하다. 베이징(北京)시 교육 당국이 초, 중등학생 수칙및 행동규범에서 견의용위 조항을 삭제해 대대적 환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조치는 곧 전국적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아 수천만명의 초, 중등학생들은 앞으로 유사시 정의의 투사가 돼야 한다는 도덕적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기를 목격하면 생명을 바침)이라는 성어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조항의 삭제는 최근 중국 사회가 갈수록 살벌해지고 있는 만큼 일견 수긍이 가는 측면이 없지 않다.
어린 학생들이 괜히 남의 일에 간섭해 낭패를 보는 것보다는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을 먼저 생각, 자신의 안전에 더 주력하는 게 훨씬 나을 수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삭막하게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수칙이 잘 지켜지지 않아 존재의 필요성에 의문이 가더라도 순전히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구원을 호소하는 손길을 외면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불어넣는 것은 정말 교육 현장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게다가 견의용위에 적극적일 필요가 없다는 교육이 주는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정의의 투사를 눈을 씻은 채 찾아야 보이는 사회에서 정의의 국가를 희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름 아니다.
중국은 지금 미국과 비견할 만한 명실상부한 세계적 슈퍼 파워라 해도 괜찮다. 그럼에도 국제분쟁 등의 현안 해결에 대해서는 별로 대국다운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 국제사회에 꽤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변명은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남의 내정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평화 5원칙 조항과 구동존이(求同存異; 같은 입장은 취하고 다른 입장은 보류함)의 외교 수칙에 입각, 국제 현안에 대응한다는 주장이 그것들일 수 있다.
하지만 침묵 외교로 표현되기도 하는 현재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정의를 생각하는 국가의 모습과는 분명 일정한 거리가 있다. 중국이 이제라도 자신들이 캠페인에서 그토록 주장하는 견의용위의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더불어 견의용위를 교육 현장에서 퇴출시킨 게 과연 올바른 조치였는가 하는 사실도 뼈저리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중국은 정의를 적극 실현하지 않는 국가일 뿐만 아니라 그럴 의지도 없는 국가라는 의혹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중국 사람의 일은 말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부패(腐敗)를 보자. 중국인들이 부패를 좋아하는가?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 부패라는 말을 꺼내면, 중국인들은 누구나 이를 갈면서 미워한다. 뇌물을 주고, 뇌물을 받는 사람들도 정말 부패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뇌물을 받지 않더라도 쓸 돈이 충분하다면, 그는 왜 관직을 잃고 감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면서 뇌물을 받을 것인가? 만일 뇌물을 주지 않더라도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는 왜 자기 돈을 남에게 갖다 바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부패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부패를 떠날 수가 없다. 사실상 많은 중국인들은 일단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생각하는 것이 관계를 동원하거나(拉關係), 뒷구멍으로 일처리 하거나(走後門), 접대를 하거나 선물을 준다(請客送禮).
만일 모든 관리가 접대도 받지 않고 선물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음이 허전해져서, 도대체 자기 일이 성사될지 안될지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패에 반대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즉, 식사 한 두끼를 대접하거나 담배 한 두개비를 선물하는 것은 허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두 좋아할 것이다.
이것이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보자. 이것도 모두 반대하는 일이고, 모두 미워하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사람을 불러서 같이 먹고 마시게 되었다고 치자. 그러면 아마도 거개는 기꺼이 부름에 응할 것이고, 얼굴에는 득의의 기색이 나타날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그가 반대하는 것은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끼는데, 자기는 끼지 못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자기는 끼어들지 못하므로, 어쩔 수 없이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것 전체를 모두 반대해 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중국 사람은 말하는 것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은 아니다. 또한 중국 사람은 면전에서 다르고 배후에서 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처세의 원칙과 법칙이 너무 많을 뿐이다. 왕왕 서로간에 모순도 발생한다. 조상이 남겨준 적지 않은 교훈들이 있는데, 이들 교훈은 서로간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조상들이 우리를 가르칠 때는 사람으로써, 견의용위(見義勇爲; 의로운 일을 보면 용감히 행하라), 노견불평 발도상조(路見不平 拔刀相助; 길가다가 불공평한 일을 보면 칼을 뽑아들고 도와주라)"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이렇게도 가르킨다. 소관한사(少管閑事; 관계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 각인자소문전설 휴관타인와상설(各人自掃門前雪 休管他人瓦上雪; 각자 자기 문앞의 눈을 쓸면 되지, 다른 사람 지붕위의 눈은 관여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관여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것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관여할지 말지를 그 일이 상관없는 일인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지는가? 상관없는 일이면 관여하지 말고, 상관없는 일이 아니면 관여해야 하는가?
이러다보니, 견의용위(見義勇爲)도 맞고, 수수방관(袖手傍觀)도 맞게 된다. 중국에는 이런 속담도 있다. 남편 말을 들으면 남편 말이 맞고, 부인 말을 들으면 부인 말이 맞다(公說公有理, 婆說婆有理) 즉,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이치에 맞게 말하는지 아닌지만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남편(男便)인지 부인(婦人)인지도 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중국인의 국민성 혹은 민족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골치가 아프다. 어떤 한 두마디 말로 중국인을 개괄(槪括)할지가 골치 아픈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인은 강직하면서도 원활하고, 솔직하면서도 세상물이 들었고, 의심이 많으면서도 쉽게 믿고, 전형적이면서도 신축성이 있고, 실익을 따지면서도 의리도 중시하며, 예의를 숭상하지만 공중도덕은 결핍되어 있고, 중용을 주장하지만 극단으로 잘 치닫고, 근검절약을 찬양하지만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옛것을 잘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고, 분수를 알면서 자족하면서도 졸부가 되기를 바라고, 향을 피우고 점을 보면서도 종교감은 없고, 잘 뭉치면서도 내부투쟁이 많고, 다른 사람을 잘 비꼬면서도 또 원만하게 마무리할 줄도 알고, 남의 일에 신경쓰지 않으면서도 상관없는 일에 말간섭을 종아하며,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천히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땅이 넓고 물건이 많고, 역사가 유구하고 5천년의 찬란한 문화가 있고, 세계 역사상 최초로 부국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알거지가 되었고, 낙후해서 매일 얻어 터졌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중국인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한다.
사실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말하기 어렵다는 말로써 중국인을 형용한다면 누군가 나타나서 바로 반대할 것이다.
말하기 어렵다고? 왜 말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나는 말할 수 있다. 그 후에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말해줄 것이고, 말하는 것마다 이치에 맞을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그러나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그는 장삼(張三)이 말할 때도 고개를 끄덕이고, 이사(李四)가 말할 때도 고개를 끄덕이다. 왜냐하면, 장삼이나 이사나 모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삼과 이사의 관점이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그들의 말을 아마도 완전히 상반되어, 장삼이 한 말을 남편 말이고 이사가 한 말은 부인 말이 될 수도 있다. 하물며 중국에서는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 반드시 동의를 표시하는 것도 아니다(물론 반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경청한다는 것을 표시하거나, 예의를 표시하거나, 심지어 습관적인 동작일 수도 있다.
중국인의 일은 정말 골치 아프다. 먹는 것을 얘기해보자. 중국인은 손님을 불러 식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방과 북방이 모두 같다. 그러나 어떻게 먹고 무엇을 먹는지는 많이 다르다.
북방인이 손님을 청해서 식사할 때는 식탁에 요리를 가득 놓고 접시를 겹쳐놓고 그릇도 그릇위에 쌓는다. 그 요리들은 왕왕 닭 한마리, 오리 한마리, 돼지다리 한 짝 혹은 양다리 한 짝이다. 어쨌든 많이 먹고 많이 마신다.
남방의 요리접시는 작다. 요리의 양도 많이 적다. 거의 한 젓가락이면 없어질 양이다. 그러나 모양이나 종류는 아주 다양하다. 한 마리의 닭으로도 여러가지 요리를 만들어 낸다. 한 마리의 물고기로도 두번 세번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북방인들은 남방인들을 깔본다. 그들은 자잘하다는 것이다. 남방인들도 북방인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멍청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서로를 허위적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북방인들은 그렇게 음식을 조금씩 내놓아서 손님이 젓가락질도 못하게 만들면 어떻게 손님을 접대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그것은 손님을 제대로 접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방인들은 그러나 분명히 다 먹지 못할 줄 알면서 계속 요리를 내놓는 것은 사람에게 먹으라는 것인지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허장성세(虛張聲勢)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허위적인가? 북방인들이 보기에 성심성의껏 손님에게 식사를 내놓아서, 손님으로 하여금 허리띠를 풀고 마음껏 먹게 하는 것이 잘 접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남방인들은 실질적으로 대하며,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요리는 먹을 만큼만 내놓으면 되고, 많이 내놔서 뭐할 것이냐고 생각한다. 만일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한다면 그렇게 많이 차릴 것이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요리를 내놓는 것은 손님을 밥통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먹을 만큼만 내놓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남원북철(南轅北轍)이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자기가 실질적이라고 생각하고, 남은 허위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보라. 같은 중국인이지만, 남방과 북방은 많이 다르다. 중국인들이 어떻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見(견)은 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見(견)은 보다, 보이다, 당하다, 견해 등의 뜻과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義(의)는 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我)의 마음 씀을 양(羊)처럼 착하고 의리있게 가진다는 뜻을 합(合)하여‘옳다’를 뜻한다. 羊(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양으로 양을 바쳐 신에게 비는 의식(儀式)이 나중에 바르다, 의로운 일의 뜻이 되었다. 義(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하고 정당한 도리를 말한다. 옳다 또는 의롭다, 바르다, 선량하다, 순응하다, 맺다, 혼합하다, 간사하다, 올바른 도리, 의리, 의미나 의의, 예절, 의로운 일, 명분, 법도, 용모, 의로 맺은 친족 관계, 공적인 것, 인공적인 것, 가짜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의로운 사람을 의인(義人), 의로 맺은 형을(義兄),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을 의무(義務), 정의를 위하여 거사함을 의거(義擧), 수양 아버지를 의부(義父), 의를 위하여 일어난 군사를 의병(義兵), 정의감에서 우러나는 용기를 의용(義勇),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우려는 마음을 의협(義俠), 의를 위하여 분발함을 의분(義奮),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사(義士), 정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개를 의기(義氣), 의기에 불타 일어나는 용맹을 의기지용(義氣之勇),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당연함 의리당연(義理當然), 의가 있는 사람은 어버이를 거역하지 않음을 의불배친(義不背親), 의로써 利의 근본을 삼음을 의이건리(義以建利), 의는 바다와 같고 은혜는 산과 같다는 의해은산(義海恩山) 등에 쓰인다.
▶ 勇(용)은 형성문자로 勈(용)은 본자(本字), 恿(용)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힘력(力; 팔의 모양,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甬(용; 管 속을 뚫고 나가는 일)으로 이루어젺다. 힘(力)을 돋우어 날래다는 뜻을 합(合)하여 용감하다를 뜻한다. 勇(용)은 용기나 일시에 몰아서 내는 강한 힘의 뜻으로 날래다, 용감하다, 과감하다, 결단력이 있다, 강하다, 용기가 있다, 다툼, 용사나 병사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겁박할 표(剽), 감히 감(敢), 날랠 효(驍)이다. 용례로는 씩씩하고 겁이 없으며 기운참을 용감(勇敢), 날쌔고 굳셈을 용강(勇剛), 용감하고 건실함을 용건(勇健), 용기 있게 결단함을 용단(勇斷), 어떠한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선행을 감행하는 덕을 용덕(勇德), 씩씩한 힘 또는 뛰어난 역량을 용력(勇力), 용자로서의 명성을 용명(勇名), 용감한 군사를 용병(勇兵), 용감한 사나이를 용부(勇夫), 용맹스러운 사람을 용사(勇士), 용감한 자태를 용자(勇姿), 날래고 씩씩함을 용장(勇壯), 용맹스러운 장수를 용장(勇將), 용감하게 싸움을 용전(勇戰), 날래고 사나움을 용한(勇悍), 의협심이 있어 남자다움을 용협(勇俠), 용기 있게 결단함을 용결(勇決), 씩씩하고 용감한 기운을 용기(勇氣), 날래고 사나움을 용맹(勇猛), 조금도 꺼리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물러나감을 용퇴(勇退), 용감하기 짝이 없음을 용감무쌍(勇敢無雙), 용맹스럽게 힘써 나아감을 용맹정진(勇猛精進), 거리낌없이 힘차고 용감하게 나아감을 용왕매진(勇往邁進), 용감하고 강한 장수에게는 약하고 비겁한 병사는 없음을 용장약졸(勇將弱卒), 관직을 그만두고 속세를 떠나서 생활함을 이르는 용퇴고답(勇退高踏) 등에 쓰인다.
▶ 爲(위)는 상형문자로 为(위), 為(위)는 통자(通字), 为(위)는 간자(簡字)이다.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양을 본떴다. 전(轉)하여 '하다,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의 뜻으로 삼고 다시 전(轉)하여 '남을 위하다, 나라를 위하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하다, 위하다, 다스리다, 되다 또는 이루어지다, 생각하다, 삼다, 배우다, 가장(假裝)하다, 속하다, 있다, 행위(行爲)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사(徙),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옮길 이(移), 다닐 행(行), 구를 전(轉)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를 위함을 위국(爲國),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위선(爲先), 힘을 다함을 위력(爲力), 첫번을 삼아 시작함을 위시(爲始),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생업을 삼음 또는 사업을 경영함을 위업(爲業), 사람의 됨됨이를 위인(爲人), 정치를 행함을 위정(爲政), 주되는 것으로 삼는 것을 위주(爲主), 예정임 또는 작정임을 위계(爲計), 진실한 즐거움을 위락(爲樂), 어떤 것을 첫 자리나 으뜸으로 함을 위수(爲首), 기준으로 삼음을 위준(爲準), 나라를 위한 기도를 위축(爲祝), 부모를 위함을 위친(爲親), 부모를 섬기는 도리라는 위친지도(爲親之道), 자식된 도리라는 위자지도(爲子之道), 자기를 이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이르는 위총구작(爲叢驅雀), 어떤 사람을 위해 벼슬자리를 새로이 마련한다는 위인설관(爲人設官), 임금 노릇하기도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는 위군난위신불이(爲君難爲臣不易),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된다는 위어육(爲魚肉),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절개라는 위국충절(爲國忠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