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용의 눈물’은 절대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비정한 쟁탈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토록 소망하던 왕위에 올랐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광적인 폭력과 독선을 일삼는 태종 방원과 이러한 아버지의 정치술을 방탕을 가장하여 한껏 조롱하는 세자 양녕의 갈등을 첨예하게 극화한다.
어떻게 해서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그 왕좌를 세자에게 물려주겠다는 방원과 현실정치와 권력에 회의를 품고 천한 무리들과 어울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드는 양녕.이 부자간의 대립이 1399년에서 1413년까지 영국을 통치한 헨리 4세와 세자 할을 극화한 셰익스피어의 사극 ‘헨리 4세’에 거의 그대로 구현되어 있다.
○포악한 국왕 방탕한 아들
더구나 방원이 1,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뒤 등극하는 때와 헨리 4세가 반란에 성공해 왕위에 오른 때는 1400년을 전후하는 비슷한 시기로서 당시 서로 교류가 없었던 한국과 영국 역사의 유사성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이 유사함은 세자가 아버지에 반발,모두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데까지 이어진다.물론 양녕이 끝내 방탕의 가면을 벗지 않고 왕위를 동생에게 양도한 반면 할은 정략적인 일시적 방탕생활을 끝내고 영국의 가장 훌륭한 왕으로 화려하게 등극한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무력으로 왕좌를 탈취하고 강력한 왕권을 수립한 태종이나 헨리 4세와 같은 ‘용’들이 흘리는 고통의 ‘눈물’은 영광스러운 삶으로 보이는 권력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왕권 유지 위해 폭정자행
리처드 2세의 왕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랭커스터가의 시조 헨리 4세.그는 태종처럼 뛰어난 현실적 처세능력을 발판으로 권력의 고지를 향해 돌진했던 야심적인 정치가였다.즉위후에도 위선과 비정한 정치술로 강력한 군왕의 자리를 훌륭히 지켜낸 왕이었다.그러나 헨리 또한 태종처럼 ‘눈물’을 흘리는 ‘용’일 수밖에 없었다.왕위 계승자인 아들 할의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으며 한때 그를 왕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던 귀족들의 끊임없는 정치적 위협과 반란으로부터 자신의 왕조를 지켜야만 했다.할의 선술집 출입과 여흥 추구는 양녕의 그것과 달리 미래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이었지만 헨리에게 그것은 새 왕권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로만 비쳤다.
세자의 방종함이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킨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했던 헨리는 평생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헨리를 괴롭혔던 다른 한가지는 왕세자 할이 왕권수립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오명과 악업의 짐을 지는 일이 없도록 그 자신이 잔인한 폭군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점이었다.자신에게 충성했던 공신들을 역적으로 몰며 토사구팽했던 태종처럼 헨리 역시 그의 즉위를 도왔던 노덤벌랜드 가문 등을 역적으로 몰아 멸문시켰다.헨리 왕이 아무리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왕위를 찬탈했고,아무리 심한 심적 고통 속에서 반란군을 무찔렀다고 해도 그의 거짓말과 배신,그리고 무자비한 권력행사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선왕 과오 극복한 헨리5세
이러한 아버지의 과오와 약점을 물려받지 않기 위해 할은 잠시 소용돌이의 장으로부터 물러나 선술집을 자기 연마의 터전으로 삼았다.선술집에서 할은 양녕처럼 비천한 팔스타프와 어울리면서 헨리 왕의 정치를 가차없이 꼬집고 풍자했다.그러나 권력의 세계에서 놀이의 세계로 영원히 탈주했던 양녕과 달리 할은 팔스타프와의 놀이공간에서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혜를 습득했다.그가 훗날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상적인 국왕 헨리 5세로 우뚝 설 수 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성군 헨리 5세가 존재할 수 있기까지에는 아버지 헨리 4세의 권모술수와 무자비함이 전제되었다.또한 망나니 할에서 성군 헨리 5세로 변신하기까지에는 할 자신의 치밀한 가면극과 고차원의 정치술이 필수불가결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도덕성 추구와 권력 추구가 병행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도덕성에 의거하면서도 출중한 지도력을 갖춘 이상적인 정치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위선과 권모술수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오늘날 정치인들의 작태를 바라보면서 현실 정치판에서의 승리는 오로지 태종이나 헨리 4세와 같이 도덕성을 상실한 채 처세술에만 능한 자들의 몫일지도 모른다는 회의적 생각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