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구절이 어느 편지에 나오는지
누가 누구에게 썼는지
앞뒤 문맥이 무엇인지
“모든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당시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이 말을 했는지
이 문장이 어떤 논리의 결론인지
를 이해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문장을 기억하는 것과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인지 활동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이 둘이 상당히 쉽게 뒤섞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외운다.”
출처 입력
↓
“말씀을 많이 안다.”
출처 입력
↓
“신앙이 깊다.”
출처 입력
라는 식으로요.
여기에는 커다란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4. 오히려 암송은 '이해의 대체재'가 될 수도 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상당히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맥 → 문법 → 어휘 → 당시 역사적 상황 → 저자의 논증 → 장르 → 앞뒤 구절 → 성경 전체에서의 위치
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암송은 훨씬 쉽습니다.
“이 구절 외웠다.”
출처 입력
끝입니다.
심지어 문장이 어려워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오래된 번역문의 권위 있는 느낌이 암송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하라”, “할지니라”, “있느니라”, “되리라” 같은 문체는 현대인의 일상 언어와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성스러운 문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위험한 현상이 생깁니다.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를 신성한 음성처럼 취급하는 것.
출처 입력
말씀하신 “주문 외우듯이 암송한다”는 표현이 바로 이 현상을 정확하게 찌릅니다.
5.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안다"는데 정작 성경을 읽으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예를 들어 목회자나 신자가 특정 구절을 수십 개 외우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 본문을 가지고 질문하면
“그 구절 앞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출처 입력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출처 입력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출처 입력
“그 시대의 상황은 무엇입니까?”
출처 입력
“그 문장이 왜 여기 들어갔습니까?”
출처 입력
“그 단어가 원래 무슨 의미입니까?”
출처 입력
같은 질문에는 약해져버리면서,
성경 구절의 데이터베이스는 엄청난데 성경의 논리는 모르는 이상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컴퓨터로 치면 텍스트 파일의 문장을 엄청나게 저장해 놓았는데 문서 전체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뇌가 그 환각 심하다는 최신 AI만도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죠.
6. 여기서 한국 교회의 "구한말 문체 숭배"도 문제로 떠오릅니다.
문제는 번역문이 원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잊고, 번역문 자체를 신성한 언어처럼 취급하는 걸로 문제가 확대됩니다.
예를 들어 현대인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출처 입력
라는 문장을 읽으면 의미를 바로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근심하지 말라!”
출처 입력
라는 표현 자체를 신성한 문구처럼 반복해서 외운다고 해서 그 문장이 왜 그런 맥락에서 나왔는지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번역문이 오래되면 현대 독자가 문장을 오해할 가능성도 생깁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원래 이런 말투다.”
출처 입력
라고 생각해버리면, 오히려 현대어로 의미를 풀어 설명하는 사람이 성경을 가볍게 다루는 사람처럼 보이는 역전 현상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7. 결국 찬송 과잉과 암송 과잉은 사실 같은 구조다
둘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라 같은 교육문화의 두 얼굴입니다.
찬송의 경우
노래한다 → 감정이 움직인다 → 은혜를 받았다 → 신앙이 깊다
암송의 경우
외운다 → 말씀을 많이 안다 → 신앙이 깊다
그런데 둘 다 중간 단계가 빠져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니다.
찬송에서는 내용보다 감정이 앞설 수 있고,
암송에서는 의미보다 기억이 앞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교회에서 이런 사람이 만들어지고 맙니다.
찬송 잘하고 기도 오래 하고 성경 구절 많이 외우고
교회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는데
정작 성경이 무슨 말하고 있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
출처 입력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8. 여기서 "긍정적 사고방식" 논리 오류가 등장한다.
누가 찬송에 감동하지 않는다고 하면
“마음을 열어라.”
출처 입력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분석하면
“그렇게 따지지 말고 믿어라.”
출처 입력
교회 프로그램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출처 입력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신앙의 방해물로 취급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핵심 텍스트인 성경 자체가 엄청나게 복잡한 문헌이기 때문입니다.
서사도 있고, 법률도 있고, 시도 있고, 지혜문학도 있고, 예언도 있고, 복음서도 있고, 편지도 있습니다.
그런 문헌을 읽으면서
“그냥 말씀을 믿어.”
출처 입력
만 반복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문장을 맥락 없이 그냥 소모하는 게 됩니다.
9. 이러면 찬송에 과도한 신앙적 지위가 부여되고 만다.
찬송을 좋아하는 사람이 찬송을 부르는 것:
아무 문제 없음.
출처 입력
찬송을 좋아해서 예배 전에 10분 먼저 오는 것:
아무 문제 없음.
출처 입력
찬송을 통해 실제로 신앙적 감동을 받는 것:
역시 아무 문제 없음.
출처 입력
그런데
“나는 찬송을 좋아한다.”
출처 입력
가
“그러므로 좋은 신앙인은 찬송을 좋아해야 한다.”
출처 입력
가 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닫혔다.”
출처 입력
가 되고,
“마음이 닫혔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출처 입력
까지 가면 문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구절을 암송한다.”
출처 입력
는 훌륭한 습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암송량 = 성경 이해도 = 신앙의 깊이
출처 입력
로 만들어버리면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한국 개신교의 큰 문제 하나는 다음처럼 정리됩니다.
한국 개신교는 초기 선교 과정에서 찬송을 전도·교육·예배의 매우 효과적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부흥회와 집단적 종교체험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찬송과 감정적 고양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수단이 목적처럼 되어, '얼마나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하는가'가 '얼마나 성경을 이해하는가'보다 신앙의 척도로 취급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
출처 입력
그리고 성경 암송 문제까지 합치면 더 날카롭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성경을 많이 말하는 문화는 강한데, 성경을 많이 생각하는 문화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구절을 외우는 것과 그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고, 찬송을 뜨겁게 부르는 것과 그 찬송이 말하는 신앙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전혀 다른 일이다.”
출처 입력
결국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 성경을 잘 아는 것은 별개 능력이고, 성경 구절을 많이 외우는 것과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도 별개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라고 하는 순간, 그 말은 사실상 “분석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방식에 감정적으로 동참하세요”라는 요구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러니 생각이 깊은 성도는 교회를 떠나고, 교회에 기존 다니는 성도는 성경말씀을 생활에 적용하지 못해 비신자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며 자기네들끼리만 주말이나 수요일에 만날 때 즐거운 상태로 끝나게 됩니다.
아울러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와는 달리 더 이상 춤추고 노래 부르며 사람 만나는 재미를 교회 안에서 구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런 구조는 결국 한국 개신교 성도 감소로 이어지게 됩니다.
첫댓글 근데 복잡한 교리나 사고가 거세당하고 직관적인 체화가 강조되며 나타나는 사상적 빈약이라면.
이건 어느정도 모든 종교가 다 가지는 고민인거 같은디요...? '낮은곳으로 임하는' 대중종교 면모가 강할수록 더 더욱 심해지고요.
물론 한국 개신교가 유독 심한편이다 라는 지적이라면 ㅇㅋ하겟습니다.
한국 개신교에서 유독 더 심하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마법의활 아 그 문제라면 전 한국 개신교단이 쇠퇴하는건 기정사실이고 질적 성장을 위해 한번은 거쳐가야 될 필연적 단계라고 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지요.
@▦무장공비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와 기독교계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고, 이 부분 통찰도 거의 되어있지 않은 것도 심각합니다.
@마법의활 그건 그래요
저 조차도 쇠락은 기정사실이라 보나
그 다음 그림은 없으니까요.
여러모로 나이 먹으니 가뜩이나 시니컬 한 성격이 더더욱 씨니컬해져서 말이죠
리셋 버튼을 누르기에는 그동안 속세에 쌓아놓은게 너무 아까운 교회
@▦무장공비 그 다음 그림은 간단합니다. 한국 교회가 찬송이나 감정 고양, 암송에 대한 집착을 지금보다 많이 내려놓고, 성경 말씀의 진의를 바로 더 해석하며 진화론도 인정하는 성숙한 이성의 길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들 할 의지가 없는 게 문제며, 교회 바깥의 저질 무신론자들은 교회 내부의 무식쟁이들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모습을 보이는 반지성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 뛰어난 지식을 자랑하던 인문학 전공자 아무개도 근거 없는 종교 혐오, 기독교 혐오를 기반으로 둔 어이 없는 이론을 주장하다 이공계 학도 무장공비님한테도 처참하게 논파당했던 과거를 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X86 세대 특유의 근거 없는 기독교 혐오, 미국 혐오(앞서 현상과 직접 관련이 있죠. 논쟁에서 이긴 당사자인 무장공비님도 실은 꽤 당황하셨었습니다.)가 이 문제 해결을 더 사회병리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통탄할 현실입니다.
@PANDA 이것이 한국 개신교회만 망하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개신교회가 망해가는 과정에서 부정적 영향력을 한국 사회에 계속 투사하고 있는 형태로 되어간다는 건 아주 심각합니다. 이들이 그 문제점을 고치는 건 한국 개신교계 전체에 이득이 되지만 한국 사회 전체로 봐도 이득이 됩니다.
@마법의활 그게 쉽게 될리가 없으니 다음 그림은 없다고 평가하는거 아니겠습니까. 껄껄.
그게 언젯적 키배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근데 그 양반이 혐미도 했던가요? 그 부분(노뜬금 혐미 드라이브에 제가 당혹스러워 했다는거)은 기억이 가물하군요
@▦무장공비 아뇨 주로 기독교 혐오요.혐미는 이슬람쟁이들 옹호에서 약간 나왔고요. 그 세대 pc충들이 다들 그렇지만요.
@마법의활 뭐 사실 좀 다 지나간 얘기긴하고 단편적 얘기긴 하지만 궂이 말하자면 전투적 무신론이네 뭐네 하는것도 586 특유의 사대적 갬성(?)이 좀 보인다고 생각하던게
크리스트교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와 문화의 근간으로 모든 행동양식을 제한하며 진보지식인과 충돌하던 서구라면 그럴법도 하지만 사실 그런 토양에서 자란 전투적 무신론이 대한민국의 상황에 맞느냐면 그건또 아니그등여.
대한민국은 유교의 강력한 영향으로 전근대에 이미 상당히 세속적 현세적 문화를 구축한 상태고 나 무신론자요 하고 표방해도 어 그러냐 이상의 대답은 별로 없는 사회죠. 애당초 국민 대다수가 전통적인 유불선 세계관에 느슨히 묶여있는 상태고(딱히 믿는 종교는 없지만 절에는 한두번씩 가본다. 교회는 좀 나가봤다 하는 수준)
근데 무슨 한국에서 무신론을 표방하면 대단히 사회적으로 탄압받는다는 식으로 자신의 공격성을 정당화 하니 좀 뻥찌긴했죠. 당시는.
근데 그거 그냥 일종의 정신적 사대주의나 조교주의 였구나 싶어요ㅋ
@▦무장공비 일베DC들도 공격적인 무신론을 표방하는데 실은 무신론이 아니라 반기독 빠돌즘입니다. 그때 그 사람도 그 수준은 그런 꼴이었고요. 비극이었죠. 맞게 파악하신 겁니다. 그 자의 인문학적 역량이 그때도 지금도 대단하지만 여적까지도 나무위키에 반기독적 편견이나 싸지르고 있던데 죽을 때까지 그 병은 못고치지 싶습니다. 그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세대 지식인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게 비극이지만요. 유사역사학 논파에 열심이신 지식인도 제가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가끔 사적 블로그에서 기독교 관련 얘기하는 것보면 참......한숨만 나오더군요. 그 분은 자기 전공 아닌 것에 대해선 말을 아끼셔서 그 부분 스캔들은 거의 없지만 간혹 무의식 중 흘리는 소리 보면 '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게 교회들 별로 성경 독서에 대한 자정작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나름 반성적으로 무맥락 독서를 개선하고 있는 곳들도 있는데 메인 스트림이 어떤 양태인지는 확신은 못하겠네요
있으나 찻잔의 태풍 수준이죠.
@마법의활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그 끝은 심히 창대 하리라."
뭐 그래도 진실한 기독교인(최소한 그리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이라면)이라면 참고 인내하고 노력하며 희망은 가져야죠?
(사실 방금 인용한 욥기의 인용구도 성경에서 전후 맥락 없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긴 합니다만. ㄲㄲㄲㄲㄲㄲㄲ)
한국 프로테스탄트는 신학적 기반이 약한걸 어떻게든 다져볼 생각은 안하고 교세확장 및 유지에 집중했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백을 무슨 정토진종의 아미타불 같은 거로 땜질한 듯.
그런데 인제 와서 신학기반을 다져보자니 교세유지가 안되고...
정토진종 아미타불도 이제는 약발이 다했습니다.
@마법의활 리셋을 눌러서 새로 시작하자니 난이도가 헬이요
리셋 안하고 그냥 가자니 서서히 말라죽을 판.
결국에는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정교유착과 공포를 통한 대중선동으로 생존하는 방식을 택했으니, 말라죽어가는거 딱히 동정심도 들지 않디요.
일부 소수파들이 칼뱅과 루터로 다시 돌아가자는데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리
@PANDA 지금 한국 개신교회는 칼뱅과 루터가 아니라 오히려 중세 가톨릭 교회의 바로 그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비극이죠.
@마법의활 중세 가톨릭은 적어도 신학적인 기반은 튼튼했죠. 한국 프로테스탄트는 그런거 너무 약해요. 유럽 프로테스탄트도 저렇진 않은데(이원복 극혐이긴 한데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그 시기에, 이걸 정확히 짚음)
@PANDA 안타깝게도 종교 개혁 당시 가톨릭계의 신학적 기반은 별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_-;;; 이미 12~13세기에 본인들이 이뤄놨던 학문적 업적마저 다 잊혀 제대로 활용못해 칼뱅, 루터 같은 인간들한테 줄줄이 논파나 당했죠. 하긴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은 근세다, 라고 말씀하시면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만.
@마법의활 루터가 대자보까지 만들어가면서 96개 씩이나 교회 내부의 문젤.ㄹ 분자 단위로 까는거 보면 당시 신학자들이 신학적(아직 개혁 전이니 크리스트교) 교리 지식은 튼튼하긴 했다고 볼 수 있죠.
@PANDA 루터 같은 가톨릭계 일부 지식인들이 뛰어났던 거지, 주류를 차지하는 이들은 그걸 몰랐던 걸 보면 그렇게만 보긴 쉽지가 않습니다.
@마법의활 너무 엄격하신거 같아요 ㄷㄷㄷ
그래도 원시 크리스트교에는 없던 연옥이라는 개념을 따로 만든거 보면 꼭 그런거 같지도 않아서요. (물론 고프의 생각이 맞다는 가정 아래지만)
교리와 신학적 깊이는 보편공의회을 통해서 서로 의견교류가 나오고 해야하는데, 동서교회의 결별 이후로는 그런게 없다 보니 "딱히? 이미 교리는 다 완성된거 아녀?" 이러다 보니 안에서 고여버리기 시작한 듯.
그 고인걸 정화하자는게 후스 루터 칼뱅 등이고요
@PANDA 보편 공의회가 이론적으로나 명분적으로는 좋은데 그것도 완벽한 장치는 아니었죠. 까딱하면 현실 정치와 머릿수 대결로 갈 수가 있었거든요. 신학자들 사이의 교리 다툼 이런 것보다는 그냥 대중에 영합해서 쉬운 길만 가다보니 이론과 실천을 잃어버린 한계가 그때그때 도드라지는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한국 개신교계의 어려움은 한국인들 일반의 뜨거운 감성이 가져오는 장단점 중 단점만 더 갖고오게 된 부작용도 크다고 보여지고요. <서구에서 그랬으니 한국에서도 그렇다>는 이유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마법의활 뭐 세상에 완벽한 장치와 제도가 존재할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그런 성향은 에페소 공의회 때, 키릴로스가 네스토리우스를 제껴버릴 때 부터 보였잖아요.
그러나 보편공의회를 통해서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신학이론을 계속 발전시켜 온 거 보면 순기능도 만만찮죠. 물론 여기에는 대부분의 보편교리를 따르는 교회들이 모두 모인다는 전제가 중요하지만...
그냥 한국 프로테스탄트는 답이 없어요.
@마법의활 뭐 근데 그런건 있어요. 교리와 사상을 단순화 시키고 아예 습관처럼 생활화 체화 시켜버리는것
(천주교의 성호긋기, 정토종의 나무아미타불, 개신교의 성경구절 암송 등등)은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다 100점 만점 10점~20점 수준일때 빠르게 그 수준을 40~50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좋은 방법이긴 할겁니다.
좀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안에서 60~70점 정도 찍을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젠 그 방식 자체가 역으로 족쇄가 되버린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시선으로 바라 보자니 참 어려운 문제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