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외 2편)
박소란
한 사람을 입원실에 옮겨두고
저는 서울로 올라갑니다
별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픈 사람의 입에서 짜부라져 나온 그 말
별수 없다, 별수 없어,
따라 중얼거리다 보니 제법 안심하게 됩니다
별수 없이, 또 살겠구나 그러겠구나
저는 서울로 갑니다
아야야 아파라, 하는 말 또한
저를 걷게 합니다
늦도록 문을 닫지 않았을 뚜레쥬르로 달려가
단팥빵을 두어개쯤 사야겠다는 결심
지금 이 시각이면 병도 잠이 들었을지
한움큼 약을 털어 넣고 알록달록한 꿈속을 거닐고 있을지
해마다 열리는 국화축제나 미더덕축제를 한번쯤 구경해 보자 한 적도 있었는데 퇴원을 하면
퇴원을 하면
또다시 입원을 하겠고
애를 써 보아도 눈은 감기지 않습니다
옆 사람이 켜둔 휴대폰 화면을 흘끔거리며 공연히 어떤 드라마를 상상하며
울고
이별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 같은 것
결국, 사랑하는 이야기일 테지요
네, 저도, 괜찮습니다
겹겹의 흉터로 덜컹이는 창을 도리 없이 바라보면
그 독하다는 어둠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피
사람의 침, 가래, 오줌, 그리고
얼굴
저는 서울로 갑니다
제가 아는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듯
기차가 달려갑니다
깊은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나, 꼭 그런 척
공들여 기지개를 켭니다
뻣뻣한 몸이 응급실처럼 환히 불 밝힌 역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갈 때쯤
배가 고파질 것입니다
저는 곧 도착합니다
생략
공중에서 가벼운 뭔가 툭 떨어지는 걸 보고
빛…… 하고 중얼거린다
가까이 가 보니 물이다 에어컨 실외기에서 떨어지는 물
구정물 아래 잠시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불순물로 남을 것이다
빛 같은 게 아니라
누군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그 앞에 엉거주춤 선
우리는
별을 가리키는 사람을 앞질러
아니다 인공위성이다, 말한다 해도
더는 중요하지 않겠지 농담이든 진담이든
차마 말할 수 없다
청소 트럭을 따라 빗속을 뛰듯이 걷는 한 사람을 두고
그를 친친 휘감은 형광색 폴리에스테르를 두고
어떤 비유 따위
취한 눈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의 속살을 그악스레 노려보는 거리에서,
이런 비유 따위
우리는 에반스가 흐르는 합정동 카페에 앉아 있고
정작 아무 푸념이나 늘어놓으면서
레이스 커튼 자락에 포박된 모기가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또 본다
못 본 척
빛, 하고 쓰게 될까 두려워
다이소에서 한 다발 꽃을 사들고 나오는 사람을 보고
쓰지 않기
믿지 않기 어떤 사랑도
모른 척 내내 딴청을 피우며
시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 또한 말할 수 없다
요즘 뭐 읽어?
물어도 답할 수 없다
좋았다고 책의 한 페이지를 가져다 찍자
밑줄을 그은 문장 위 적절한 포즈로 휘어진 손가락만 보이고
가장자리의 숱한 이야기들은 생략되어도 좋다, 좋다
강의 내용을 되뇌다 보면
맞은편에서 나타난 사람이 어깨를 툭 치고 간다 씨발, 하면서
간다 씨발씨발씨발
꼭 무슨 노래 같다 시 같다
수
컵을 들고 헤매다
쏟아버린 물
실내는 따뜻하고
둘러앉은 이들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사이 몰래 빠져나가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의 뒷모습
나는 계속 신경이 쓰여서
내가 다 잘못했어요
말하고 싶어서
말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본다 깊고 탁한 그늘 속
찢어진 그림자처럼 잠긴 그를
침묵으로 허우적대는 그를
사람들은 모른다
맑게 흐르고 우아하게 스민다
실내는 따뜻하고,
그는 잠시 돌아본다
아무런 뜻도 담겨 있지 않은 빛으로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는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챙긴다
어디 먼 곳으로 떠나려는 듯
가지 마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말하지 못하고
깨진 컵을
테이블 위에 그냥 가만히 놓아둔다
―시집 『수옥』 2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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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 『수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