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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회장님의 카톡에서]
(굿)내가 죽고 백 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
엄상익(변호사)
백년이 넘은 조상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덤을 정리했다.
남의 땅 산자락에 남아있는 봉분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폐가 되기 때문이다.
백년 전 죽은 조상 할머니 할아버지는 누구였을까.
가족도 친구도 그 시절 같이 살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손자 손녀도 죽었다.
그 손녀의 아들이 나다.
조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남은 것은 흙 속에 묻혀 있던 작은 뼈조각 몇 개뿐이었다.
죽은 조상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과연 이 세상에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겠지.
그분들은 이제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조상의 화장한 유골을 그분들이 살던 고향의 양지바른 산 위에 뿌려드렸다.
내가 죽고 나서 백 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나의 가족이나 친구, 알던 사람들 모두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살려고 마련한 바닷가의 집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나의 재산도 또 다른 누군가의 소유가 될 것이다.
세월을 함께한 책장과 몇 개의 가구들도 모두 폐기물이 되고 나를 옮겨주던 고마운 차도 고철 덩어리가 될 것이다.
나는 바로 죽은 후에는 얼마 동안 가족과 몇몇의 기억 속에 남았다가 그 후로는 사진으로 있다가 무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삼사년 전쯤인가 나의 초상화가 지하실 문 앞의 구석에 다른 헌 액자들과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 봤다.
의뢰인이었던 화가가 그려준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될 것이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다 죽은 노인들의 물품들이 쓰레기장에 나온다고 한다. 고급 책상과 가구들이 버려지기도 하고 벽에 걸려있던 가족사진들이 액자 속에서 세상을 내다보면서 서글픈 미소를 짓기도 한다.
인간이란 내남없이 세상에 와서 수고하고 번민하다 죽음이라는 무대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잔고가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 본다.
피와 살이 있고 생명이 붙어있는 이 나머지 시간이 내게는 정말 소중한 보물이다.
나는 지난 칠십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 왔을까.
소년 시절 경주마같이 트랙을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는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었다.
세상은 학교로 인간을 상등품과 하등품으로 구별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품질인증을 받기 위한 열망이 마음을 꽉 채웠었다. 그냥 낙오가 무서웠다.
대학 시절 그런 경주 트랙에서 벗어나 초원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차별이 많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런 초원은 관념이고 추상일 위험성도 있었다.
그 초원으로 가는 중간에는 날개 없는 내가 떨어질 바닥 없는 깊은 절벽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가장인 나는 가족의 입에 밥을 넣어 주어야 성스러운 의무가 있었다.
새 둥지 속의 털도 나지 않은 빨간 새끼들은 엄마 새가 힘들게 잡아온 벌레 한 마리를 먼저 달라고 입들을 한껏 벌린다.
나는 엄마새의 벌레 같은 돈을 잡으려고 세상을 돌아다녔다.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 속으로 옮기는 일이 내게는 공부보다 열 배 백 배는 힘들었다.
돈을 주는 사람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고 주눅이 들었다.
내가 정직한 땀을 흘려 받는 대가인데도 눈치를 봤다.
돈은 내 영혼까지 지배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장년의 산맥을 넘고 이제 노년의 산 정상 부근에 오른 것 같다.
눈을 뒤집어쓴 겨울나무같이 머리와 눈썹에 하얗게 눈이 내려와 있다.
삶에서 처음으로 자유롭고 여유있는 시간을 맞이한 것 같다.
이제야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학교도 직업도 돈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평등한 세상으로 건너왔다.
황혼 무렵이면 바닷가 산책을 한다. 푸른바다 저쪽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태양은 붉다 못해 타오른다.
황혼과 밤 사이의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다.
오늘은 내가 죽고 백년 후의 세상을 한번 떠올려 보았다.
진작 그런 긴 안목으로 생각을 했었더라면 부질없는 많은 걱정을 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저녁노을 빛으로 남는다.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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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인연 ♥
저는 예순 중반의 할머니입니다.
저는 한 대학교의 의대 교수인데요.
이제 내년이면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게 되네요.
제가 사람 답게 살고 교수까지
될 수 있었던 사연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깡 시골에서 태어나서
아주 어릴 때부터 장작 땔
나무를 해오고 집안
허드렛일을 도왔습니다.
저희 집은 아주 가난했고
부모님은 여자애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저는 집안 일보다는
공부에 흥미가 많았어요.
몰래 학교 창문으로 들여다 보며
한글을 익히고 산수를 공부하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부모님한테
잡혀 와서 혼쭐이 나기도 했어요.
계집애가 공부해서 뭐할 거냐며
살림이나 잘 배우라고 하셨죠.
그런 제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건
젊은 여선생님이
오시고부터 였어요.
시내에 있는 유일한 중학교에
부임하신 선생님은 제가
야트막한 산기슭에서
쑥을 뜯다 말고 누가 놓고 간
책을 읽는 걸 보시고 저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어요.
"순정아 지금 당장은 이게
너한테 쓸모 없는 것 같아도
언젠가 분명히 도움이 될 날이
올거야 니가 노력하는 만큼
니 인생의 기회도 넓어질 거고"
그 선생님도 공부 못하게 하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나와 선생님이 됐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때부터 밤마다 몰래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서
국어 산수 도덕 사회 자연...
이런 것들을 배웠고,
열심히 공부한 덕에 중학교
과정도 배울 수 있게 됐어요.
그러다가 엄마한테 들키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려고
막 집을 나셨을 때 였죠.
엄마는 아버지한테 말하지 말라고
싹싹 비는 저를 보며 한숨을 쉬시고는
"들키지 않고 끝까지 할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고, 자식이 좋아하는 거
부모도 못 시켜 주는데...
그걸 다 해 주신 다는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냐...
기왕 할 거면 내 몫까지 다 하거라"
라며 몰래 다닐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몇 년 간 공부가 계속 되면서
저는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아서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공부할 시간도 많아야 하고
문제집도 살 게 많고...
그저 막막하고 걱정을 하자
선생님은 엄마를 만나셨어요.
"순정이는 정말 똑똑해요...
누구보다 이해력도 빠르고
머리도 좋고 굉장히 성실하죠...
이런 애가 공부를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부디 어머님께서 순정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 말이 엄마는 한동안 고민하셨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저를
밀어주기로 하셨습니다.
아빠 몰래 집안일 하는 시간을
빼 주셨고 문제집 살 돈도 주셨어요.
그 돈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두 분은 그렇게 뒤에서 조용히
제 앞 날을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죠.
저도 그런 엄마와 선생님께
보답하고자 하루 열 시간 씩
공부를 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많아 지더라구요.
한번은 선생님이 갖다 주신
유명 학원 모의고사 문제를 풀었는데
제가 거기서 딱 두 문제만 틀렸어요.
공부 잘하는 고3들도 어려워하는
시헙이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거 봐...너는 이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이게 공부에 재능이 있다는 뜻이야
거기다 넌 아주 열심히 노력하는
힘까지 있잖아..."
"선생님 제가 정말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이 시험 성적을 보고도 모르겠어?
넌 이미 전국 수준이라고"
라며 저를 격려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에 힘을 얻어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서울에 있는 의과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
저는 너무 기뻐서 엄마와 선생님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었구요.
엄마는 너무 좋아서 눈물을 훔치셨고
선생님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죠.
하지만 문제는 아버지 였는데요
아버지는 어디 여자애가 혼자 서울에
올라가냐며 펄펄 뛰셨습니다.
그리고 쓸 데 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 했다며 제 책들을 다 버리셨어요.
저는 너무 속상한 나머지 아버지를
원망하며 가출을 결심했죠.
"오빠들은 아버지가 다 밀어줘도
못 간 대학 나는 갔는데 왜 나보고는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밀어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저는 몰래 짐을 싸서
새벽에 기차역으로 갔어요.
그런데 거기에 선생님이
나와 계신 것이었어요.
"순정아 이렇게 가면 안돼...
니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집을 나가니?
나가더라도 떳떳하게 모두의
박수를 받으면서 떠나야지
지금 니가 이렇게 무작정
서울에 가면 어디서 받아줄 거 같아?
지금 그러지 말고 돌아가자...
안 그러면 니가 지금까지
노력한 게 다 헛수고가 되는 거야"
저는 결국 선생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 오게 되었어요.
집에서는 제가 가출하려고
했던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신 건지 대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해 오셨더라구요.
그리고 아버지께
"이건 제가 순정이한테 주는
대학 합격 선물입니다.
서울에서 1등만 한다고 하는
애들도 떨어지는 의대에
합격했잖아요.
이만한 선물은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정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게 해주세요.
분명히 아버님께 효도하는
딸이 될 겁니다."
선생님의 몇 번이고 되풀이한
간곡한 설득 덕에 결국 아버지는
저를 서울로 보내기로 하셨어요.
저는 선생님께
"이 은혜를 다 어떻게 갚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며 펑펑 울자 선생님은
"니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훌륭한 의사가 돼서 갚으면 돼"
라며 제 어깨를 토닥여 주셨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굳게 약속했고
대학에 가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1학년 때 다들 해본다는 미팅도 하지
않았고 다른 애들과 몰려다니며
놀지도 않고 공부하고 학생 과외만
열심히 했죠.
그렇게 1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사가지고
시내 중학교로 갔더니 선생님이
그만 두셨다는 거예요.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묻자
결핵에 걸려서 수업 시간에 피를 토했고
그 이후로 학교를 그만 두고 요양을
떠났다고 하더라구요.
선생님은 제 앞으로 편지를
남겨 놓으셨 더군요.
편지를 서울로 보내지 않은 건
제 공부를 방해하기 싫어서
였다고 적혀 있었어요.
'순정아 너는 언젠가 꼭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선생님은 그렇게 믿어
그러니 건강 유의하면서
공부해야 한다.
건강 잃으면 아무 소용 없어.'
저는 선생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학교 선생님마다 붙잡고 물어봤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어디로 요양
가셨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 에게도 말 안하고
떠나셨다는 거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으로
어떻게든 찾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저는 선생님을 찾으려고 알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녀 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저는 자취방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결심했어요.
'그래...선생님을 다시 만났을 때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 수 있게
열심히 살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열심히 벌자.
그게 선생님께 보답하는 길이야'
저는 그때 이후로 정말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어요.
잠 한 숨 안 자고 며칠씩
공부하다가 병원에 입원도 해봤고,
너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온통 짓무른 적도 있었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일주일 치
주먹밥을 만들어 놓고 냉동실에
넣어 놨다가 하나씩 꺼내 녹여서
먹었습니다.
반찬은 시골에서 보내준 김치
한 가지 였구요.
어려운 의학 용어들은 다양한
연상법을 이용해 달달 외우고
또 외웠어요.
화장실 거울 옆에도 외워야 할
단어들을 잔뜩 써 놓고 이빨을
닦으면서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 덕택에 저는
인턴 후 봤던 시험도,
레지던트 4년 후 봤던 내과 전문의
시험도 모두 한 번에 합격하게 되었어요.
시험에 합격할 때마다 선생님을
떠 올리고 마음 속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죠.
그리고 좋은 기회가 있어서 미국으로
연수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대학병원에서 계속
일을 하다가 순환기 내과 교수가 되었죠.
그 날은 정말 선생님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속으로 살아 계시면 언젠가 꼭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날도 많았구요.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늘
제 마음 한 쪽에 계셨어요.
저는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었고
선생님을 대한다고 생각하고
환자를 진료했어요.
그리고 또 새로운 의학 논문들을
읽고 연구 자료도 수없이 검토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새 환자들이 제일
신뢰하는 의사로 저를 꼽게 되었고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라고
말씀드렸어요.
그 사이 저는 결혼을 해서
딸을 하나 두었어요.
딸을 낳은 날에는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났지만 선생님이 만약
보셨다면 참 기뻐하셨겠지...
그런 생각을 했죠.
선생님을 떠 올리며 딸 이름을 선생님과
같은 선희라고 지었습니다.
선생님처럼 마음 넓고 예쁜 사람이
되길 바래서 였어요.
그리고 어느새 그 딸이 다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죠.
딸도 저처럼 의사가 되고 싶다며
의대에 가서 인턴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나 만나는 사람 있는데 엄마도
한 번 같이 봤으면 좋겠어"
"그래?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야?"
"응, 내가 지금까지 엄마한테 내 남친
소개한 적 없잖아.
이 오빠는 진짜 내 인연인 거 같아"
딸은 부끄러운 듯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저는 그렇게까지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딸 얘기를 들어보니 마음은 착하고
긍정적인 사람 같은데 크게
욕심도 없고 가진 것에만 만족하며
그 날 벌어서 그 날 쓰고 사는
사람 같았거든요.
저는 제 사위는 좀 더 야망이 크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인물이길 바랐는데
완전 정반대인 타입인 것 같아서
만나기도 전에 씁쓸했죠.
하지만 딸은 그걸 참 좋게 본 것 같았어요.
딸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제가
보지도 않고 싫다고 할 수 없어서
저는 일단 그 청년을 만나 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위는 고등학교 교사였고 아주
선한 인상을 하고 있었어요.
교사 사위라니 부족함 없다고들
하시겠지만 전 욕심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 평생 고등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생각인가?
대학원에 가서 박사를 하고 유학을
갈 계획은 없고?" 라고 하자 사위는
"네, 저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뭐든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제가 이런 데에는 저희 큰어머니
영향이 큽니다.
아프셔서 두 번 교직을 쉬셨지만
큰어머니가 용기를 줘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해서 자기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이 큰어머니한테 인사하러
올 때면 큰어머니가 자랑스럽고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생각이 굉장히 바른 청년 같았습니다.
"정말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인 거 같네,
하지만 그러기에는 현실이 만만치만은
않을 텐데, 자네가 그러는 걸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라고 물었고 사위는
"부모님도 처음에는 제가 외국 유학도
다녀오고 더 좋은 직장 갖기를 바라셨지만
요즘처럼 교사되기 힘든 때에 당당히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것도
감사하다고 하셨어요.
제 생각도 많이 지지해 주셨구요."
라며 쑥스럽다는 듯 웃더군요.
"엄마, 왜 자꾸 그런 질문만 해?
꼭 오빠가 교사인 게 마음에 안드는 것처럼,
나는 오빠같은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
오빠가 하는 거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구
그리고 학생들 한테도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 교사가 천직이야...
타고 났다니까" 라며 딸이
옆에서 지원 공세를 펼쳤습니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졌다니 할말은 없었죠.
제가 너무 속물처럼 느껴지기도 했구요.
남편은 큰 불만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저 였죠. 제 딸은 더 근사한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보내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저런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면
내 딸을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그 청년의 마음가짐
하나만 보고 딸의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결혼식 준비는 원만하게 진행되어
양가 부모의 상견례날이 되었어요.
저는 약속 장소인 한정식 식당에
조금 일찍 도착했죠.
환자 진료가 생각보다 일찍 끝난 것도
있었지만 중요한 자리 인 만큼
먼저 가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은 것도 있었거든요.
제가 식당에 들어서자 젊은 직원이
나와서 예약을 했냐고 묻더군요.
저는 상견례 예약을 했다고 말했고
직원은 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렇게 직원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카운터에서
"감사합니다.
다시 뵐 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는 고상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한 목소리여서
카운터 쪽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랬더니 저보다 한 열 살은 많으신 것
같은 여자분께서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시고 앉아서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꾸 어디서 본 것만 같아
가까이 다가갔어요.
"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저를 본 여자분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으시더니 한참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저도 한참을 바라봤구요.
아무래도 낯이 익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목소리의 억양,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 예전에
제가 알던 유선희 선생님과
너무도 닮아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눈매라던가 얼굴형
콧날이 선생님과 흡사했죠.
저는 떨리는 목소리로
"혹시 유선희 선생님 아닌가요?"
라고 하자 그 분도
"너, 순정이니?"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상견례라고 특별히 신경 써서 했던
화장이 다 무너지는데도 아랑곳없이요.
"선생님, 제가 얼마나 선생님을
찾았는데, 어떻게 이런데 에서 만나요.
선생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너무 그리웠어요.
한 시도 잊지 않았어요."
저는 통곡을 하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어요.
선생님도 눈물을 훔치시며
제 손을 잡으셨죠.
"순정아, 너 정말 순정이 맞구나.
살아 있으니 이렇게 만나는구나.
나도 널 잊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내가 아파서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야 했을 땐 정말 마음이 아팠단다.
그래도 니가 정말 잘 산 거 같아서
기쁘구나."
"저는 언제고 살아 있을 때 선생님을
다시 뵙게 해 달라고 매일 속으로
빌고 또 빌었어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만났나 봐요"
선생님도 눈시울이 붉어져서
저를 끌어 안으셨어요.
그리고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물으시더라구요.
저는 상견례 얘기를 했죠.
선생님은 예약자 이름을 보더니
놀라시며 "니가 선희 엄마였니?"
라고 하시는 거 였어요.
저는 너무 놀라서 제 딸을 아시냐고
했고 선생님은 바로 제 사위의
큰어머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나는 벌써 니 딸 봤지...
정우가 꼭 소개 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몇 번이나 봤는걸.
너무 예쁘고 총명하고 이상하게
정이 가더라니... 니 딸이어서
그랬나보다" 라며 놀라셨어요.
저는 온 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사위가 닮고 싶었던 사람이
선생님이라니...
저는 사돈 분들과 사위와 딸을 만나
선생님과의 인연을 이야기 했고
그 분들과 사위도 다 놀라더라구요.
당연히 제 딸도 놀랐구요.
무엇보다 제가 딸 이름을 선생님
이름을 따서 붙였다니까
사위는 흠칫 하더군요.
처음에 제 딸한테 눈이 간 게
큰 어머니 이름하고 같아서
였답니다.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을 수 있는지,
하늘은 계속 우리를 잊지 않고
지켜보시고 있다가 이렇게 엮어서
저와 선생님을 만나게 해준 것
같았어요.
그날 상견례가 끝나고 저와 선생님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처음 요양을 마치시고
다시 교사를 하시며 결혼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너무 쇠 약해져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더군요.
학교 일도 너무 무리를 해서
몸이 다시 나빠졌는데 그때도
폐가 문제가 됐다고 하셨어요.
결국 교사를 그만 두셨고 집에서
지내시다가 가끔씩 남편이 경영하는
한정식 식당에 나와서 카운터를
봐주고 있다고 하셨어요.
마침 제가 간 날이 시 조카 상견례여서
제 딸도 보고 저희 부부도 볼 겸
나오셨다는 거였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순환기 내과 교수라고
하자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며,
저는 꼭 해낼 줄 알았다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죠.
저는 선생님 손을 꼭 잡고
"그래서 이제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
많이 마르신 것 같은데,
불편하신 덴 없으시고요?"
라고 물었더니 다시 몸이 안 좋아진 것
같아서 병원에 예약을 했는데 그 의사가
워낙 그 계통에 유명한 교수라 그런지
두 달도 넘게 기다려야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돌아와서 호흡기 쪽의
내로라 하는 교수들에게 전화를 싹
돌렸어요.
그리고 대학병원 내에 인맥을
총동원해서 선생님이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게 했죠.
"난 일반 병실도 괜찮은데,
이런 데는 어색해..."
"선생님, 이거 제가 은혜 갚는
거라고 했잖아요. 제가 선생님께
보답할 수 있게 해주세요."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알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검사 결과 선생님의 폐에서
종양이 발견되었고 암의
소견이 나왔어요.
선생님은 몸이 많이 약하셔서
수술에 대한 부담이 있었는데
워낙 초기였고 표적 항암약물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보며 바로
제가 주치의가 돼서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은 우시면서
"내가 순정이 덕분에 살게 됐구나...고맙다"
라며 계속 제게 고개를 숙이셨어요.
저는 그러지 마시라면서 꼭 건강하게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했죠.
선생님의 항암 치료가 시작됐고
아이들의 결혼식 날짜도 잡았습니다.
저는 해외 최신 논문들을 전부
찾아보고 미국 유명한 대학 병원에서
임상 진행 중인 효과 좋은 신약이 있는지
계속 알아보며 바쁜 날들을 보냈어요.
제가 있는 대학에서 연구 중인
치료제도 알아 보았죠.
어떻게 서든지 암의 전이도
막아내고 완전히 뿌리 뽑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그런 절 보며 이런
좋은 의사를 만날 줄 몰랐다고
좋아 하셨구요.
저도 너무 기뻤습니다.
제가 공부한 것으로 선생님을
도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힘들게 공부했던 날들에 대한
후회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부모님 만큼이나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선생님을 치료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이들
결혼식 날이 되었어요.
선생님도 그 동안의 치료로 많이
좋아 지셔서 곱게 한복을 입고
결혼식장에 오셨어요.
사위는 저를 보더니 함박 웃음을
지으며 90도로 인사를 하더군요.
저는 가까이 가서 사위 손을
잡았습니다.
""내가 자네를 잘못 알아보고
이런 저런 실례를 많이 했지? 미안하네...
내가 어느새 올챙이적을 잊어버리고
나 혼자 잘 된 것처럼 살고 있었나 보네.
자네가 그토록 닮고 싶어하는 큰 어머니,
유선희 선생님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셨는데,
자네는 더 훌륭한 제자를 많이 만들게."
"아닙니다, 장모님...
저는 섭섭하게 느낀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선희가 좀 훌륭한 가요...
아까우신 게 당연하지요.
저한 테 정말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거 잊지 않고 늘 존중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저와 선희의 결혼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데
제 눈시울이 뜨거워 지더라구요.
결혼식이 진행되고, 딸과 사위가
우리 부부와 사돈 부부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선생님 앞에 갔죠.
그리고 선생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선생님,
시골에서 나물이나 캐고 땔감이나
주워 오던 저를 오직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공부 시켜 주시고 문제집도
사 주시고 대학교 첫 등록금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제 사돈 큰 어른이
되어 주셔서 정말 너무 영광입니다.
제 딸도 사위도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사돈 내외도 저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셨어요. 눈시울을 붉히시더라구요.
다들 박수가 터졌고, 그 가운데
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 딸과 사위도 눈물을 흘렸죠.
안사돈은 제게 다가와 저를
안아 주더군요.
행복한 딸의 결혼식을 울음바다로
만들어 너무 미안했지만 저는
그렇게라도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께 인사 드리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건강을 회복하셨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러 오십니다.
이제 제가 은퇴하고 나면 같이
여행이나 다니자고 하시네요.
저도 그럴 날 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선생님의 은혜
보답하며 살고 싶어요.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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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것이 세상을 바꾼다 ]
#1. 이사 가는 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실직을 하고 이력서를 들고 꽤 오랫동안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결국
집을 팔아 빚을 갚고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아내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시작해야 되는 새로운 삶이
두렵고 외로워 울고 싶었지만
남편의 절망을 아는지라 내색할 수 없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던 아내는
싱크대 서랍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이사 오느라 애쓰셨어요.
저는 이곳에서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특히 부엌에 있는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바깥풍경은
늘 한 폭의 수채화같이 멋지답니다.
당장 이용해야 되는 가게 전화번호입니다. 주인 모두 친절하고 다정한 분입니다. 행복하십시오.”
글 밑에 빼곡하게
쌀집, 채소가게, 정육점, 약국, 미용실, 목욕탕 등
가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춥고 앙상한 겨울산이지만 머지않아
연둣빛 새싹이 돋고
진홍빛 진달래가 수놓여진 아름다운 봄산이 되리라.
아내는
전에 살던 사람이 남긴
편지 한 통으로
이곳에서 행복을 꿈꾸게 됐다.
#2. 딸은
친정아버지를 요양원에 두고 온 날 밤새 울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아버지가
먼저 요양원 이야기를 꺼냈고,
하루 종일 아버지만 돌볼 수 없는 딸은 만류하지 못했다.
대신 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1주일에 한 번은 꼭 찾아뵙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요양원 방문을 한 첫날,
뜻밖으로
아버지의 표정이 밝은 것에 놀라고 안도했다.
그 이유는
요양원에 있는 노인을 부르는 호칭에 있었다.
보통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다른 요양원과 달리
그곳에서는
한창 일하던 때의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선생님, 지배인님, 원장님 등
그건 단지 호칭이 아니라
눈부신 젊은 날을 한 조각 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정년퇴직한 지 15년이 된 아버지는
다시 교감선생님으로 불리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하다고 딸에게 고백했다. 딸은
아버지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호칭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요양원이라면 아버지를 잘 돌봐줄 것 같은 믿음에서다.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닌
작고 사소한 일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비를 맞고 걷는 누군가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일,
길거리에 버려진 유리조각을 줍는 일,
길을 묻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는 일,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일,
양 손에 짐을 가득 든 뒷사람을 위해서
잠시 문을 잡고 서 있기 등
내가 하고도 곧 잊어버리고 마는
사소한 것이
누군가에게
인생은 아직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은
희망이 되고 행복이 된다.
내 미소,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
나의 친절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 조 연 경 / 드라마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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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
시/윤보영
음력 5월 5일
오늘은 단오!
내 그리움에
그네를 메고
그대에게 가면
어떻게 할 건데?
걱정 마
왜 왔냐고 물으면
돌아오면 되니까
앞으로 간 만큼
뒤로 돌아오는 게
그네니까…
***
오늘 단오(端午),
우리말로는 수릿날이고
예전에는 모심고 한숨 돌리는 잔칫날,
창포, 그네 등이 떠오르는데, 대부분 없어진 풍속이네요.
오늘은 또 일 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센 날이라는데, 점심은 보양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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