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러진 종전처리
국공내전과 한반도의 분단은 동아시아 지역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지역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19세기 이래로 계속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즉 19세기 이래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벌인 패권 다툼은 동일한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중국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이후 중국과 일본의 패권 다툼은 이제 이데올로기와 체제 갈등을 동반하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 간의 패권경쟁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한반도의 위상도 변하였다. 1945년까지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중국과는 국경을 접했고, 일본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안보적 관점에서는 중요하였지만, 경제적인 가치가 높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직접 점령하기보다는 중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수립된다면 한반도 내에서 독립적인 정부가 유지되는 것을 허가한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경우 안보를 명분으로 하여 한반도를 점령하였지만, 한반도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대륙진출의 발판으로서 일본제국의 아시아정책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혁명으로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제 한반도는 아시아 공산권을 대표하는 중국과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일본 사이에서 완충지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게다가 한반도 자체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 다른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한반도 내부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전쟁도 뒤따랐다.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한반도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역이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 중국 국공내전이 더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이로인해 특히 미국 GHQ의 대일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미 1947년부터 중국에서 국민당이 어려워지면서 미국은 전반적인 아시아정책을 수정해야만 했다. 1947년 중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특사 웨더마이어의 보고서는 미국의 정책 수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중국의 국민당을 전략적 파트너로 하여 아시아지역의 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소련을 봉쇄하고, 일본이 더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로 하여금 일본점령에 함께 참여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미국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초기에 발표한 대한정책(3성조정위원회 문서번호 166호)에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했던 것도 이러한 초기 미국의 대일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따.
일본에 있었떤 GHQ는 일본이 더이상 '말썽쟁이'가 되지 못하도록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실시하였다. 1946년 11월 3일에는 국민주권, 전쟁포기와 평화주의,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3대 원칙으로 하는 평화헌법이 공포되었다. 이를 통해 덴노의 권력이 무력화 되었으며, 평화헌법 9조를 통해 일본이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포기"하며,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전쟁의 가장 중요한 동맹자였던 재벌들이 해체되었다.(1945년 11월 6일) 미쯔이, 미쯔비시,스미토모, 야스다 등 주요 재벌이 해체되고 1947년 4월 14일과 12월 18일에 독점금지법과 과도경제력 집중배제법이 각각 공포되었다. 노동조합을 장려하기 위한 법령이 제정되었으며, 두차례의 농지개혁을 통해 1950년까지 농가의 90% 이상이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이 되어 과거의 지주제가 소멸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였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미국은 중국의 주위에 강력한 미국의 지지자를 심어서 '봉쇄'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케난(G.F. Kennan)에 의해 구체화된 '봉쇄정책'은 중국의 공산주의가 아시아에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와 일본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후 사회개혁에 따라 일본을 무력화할 경우 미국은 더이상 아시아에서 근거지를 잃게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히 인도에서 간디가 암살되고, 종교전쟁으로 인한 내분이 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어느쪽도 찬성하지 않는 제3세계 형성의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위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1948년 1월 6일 미국의 육군부 장관 로얄(K.C.Royall)은 연설을 통해 일본의 경제자립을 명분으로하여 대일본 점령정책의 수정을 선언하였고, 이를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이라고 부른다.
역코스 정책은 원래 미국이 붙인 용어가 아니었다. 이는 1951년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에서 25회에 걸쳐 연재된 '역코스'라는 연재물을 통해 등장했다. 이 연재는 훈장, 군함행진곡,야스쿠니 신사, 덴노의 신격화 등 문화적 복고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는데, 이 정책과도 어울리면서 이후 미국의 정책을 역코스정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은 역코스정책을 통해 일본을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변경하여 일본이 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축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1949년 국가안보회의(NSC) 문서 12/2호(국가안보회의에서 나온 13번째 정책문서 초안의 두번째 수정본)로 구체화되었다. 이 문서는 일본의 재군비를 통한 안전보장과 경제부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이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및 인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공산당에 의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은, 식민지에서는 벗어났지만 사회적으로 불안정했떤 인도보다는 미국의 영향하에 있었던 일본의 부흥을 통해 아시아를 재편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사회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보수세력들이 다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일본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은 곧 1945년 이전 '제국'의 질서를 다시 복원하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1945년 이전 동아시아의 제국은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일본의 위에 미국이 있었다. 단,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해 만주가 더이상 일본의 배후지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 내의 상황을 쉽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이전까지 GHQ 군정이 설치되어 일본을 통치하였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사회개혁을 주장했던 일본 내 좌파의 목소리와 힘을 무시할 수 없었따. 따라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내의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력들을 '사회혼란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1949년 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미즈카와 사건 등은 사건의 전모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림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사건들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공직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본격적인 '레드 퍼지'(Red Purge)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일, 맥아더는 일본 공산당의 비합법화를 시사하고, 6월초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24명과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의 간부를 공직에서 추방했으며, '아카하타'에 대해서는 정간처분을 내렸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본격적인 좌익소탕에 나서 모든 대중매체와 관공서,기업 등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했다. 이로인해 오히려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복무했던 관료들이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GHQ는 경찰예비대(후일 자위대로 개편)를 창설하였다. 이는 일본의 재무장을 위한 신호탄이었고, 경찰예비대는 1955년 자위대로 개편하면서 일본의 본격적 재군비가 시작되었다.
이제 동아시아는 본격적으로 냉전의 중요한 마딩이 되었다. 본래 냉전의 기원은 유럽이었다. 미국은 1947년 터키와 그리스의 빨치산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봉쇄한다는 명분하에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고 이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군사원조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은 자신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동유럽이 미국의 유럽부흥계획(마셜플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강권했고 1948년에는 '베를린 위기'를 일으켰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안보딜레마의 위기상승작용은 계속되었고, 결국 1949년에는 미국을 중시므로한 북대서양조약기구와 소련을 중심으로한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출범하면서 양대 진영은 군사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냉전은 유럽보다 큰 뉴스거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의 냉전전략가들은 중국의 공산화 역시 미국의 소련에 대한 냉전정책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대체로 중국의 공산화는 아시아 전역으로 공산주의가 확대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당시 아시아 국가들 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보수세력에 비하여 좀더 큰 대중적, 정치적 힘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주요 관심은 그들이 맞닥뜨리고 있었던 베를린을 포함한 유럽에 있었지만, 이제 아시아 역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지역이 되었다. 냉전 속에서 열전이 일어난 곳은 유럽이 아니라 동아시아였기 때문이다.
냉전,분단, 그리고 국공내전
2차대전 이후 '냉전'이라고 하는 또다른 전운이 세계를 뒤덮었다. 2차대전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유럽의 제국들을 대신하여 미국과 소련이 양극이 되는 새로운 세계체제가 정립된 것이다. 세계는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東(공산주의)과 西(자본주의)로 나뉘었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맹체제로 재편되었다.
아시아의 냉전은 유럽에 비하여 늦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점령지역에서 맞닥뜨리고 있었던 유럽의 냉전이 1947년의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플랜, 그리고 1948년이 베를린 위기를 통해 긴장속에서도 군사적 충돌 없이 진행된 데 반해 동아시아의 냉전은 혁명과 전쟁을 동반한 피의 과정을 거쳤다. 이는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지를 경험했고 종전 이후 냉전의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냉전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다.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지만, 해방과 함께 38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GHQ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한국의 38도선 이남과 이북에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남과 북 각각에 미군정과 소련군 민사처가 수립되었다. 미군정과 소련군 민사처는 각기 38도선 이남과 이북 지역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미군정은 공산주의 세력은 물론이고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식민지 말기까지도 일본과 타협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대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따. 따라서 미군정은, 일본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쓰고 있었지만 미군정과 자본주의체제를 지지하는 보수세력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을 지원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세력 재편을 시도하였다. 이에따라 조선공산당(1946년 이후 남로당으로 개편)이 불법화되었던 반면, 한국민주당과 해외망명 지도자였던 이승만과 김구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38도선 이북 지역에서는 김일성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과 국내에서 활동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민사처의 지원하에 권력을 강화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하였고, 소련군의 지원하에 5도 행정국을 조직하여 북한지역에 대해 직접통치를 실시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인사들과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이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지만, 이들은 1946년 반탁운동 이후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1946년 2월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비롯한 소위 '민주개혁'이라는 사회주의 개혁을 실시하여 자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소련의 지원과 '민주개혁'을 통해 마련한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38도선 이남과 중국에서 온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다.
물론 미국과 소련이 처음부터 한반도를 분단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서를 보면 미국과 소련은 각 점령군의 대표로 구성한 공동위원회르르 만들고, 이 위원회에 한국인 대표를 참석시켜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한다고 씌어 있다. 결정서 제3항에 최고 5년 기한으로 하는 신탁통치에 대한 규정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미국과 소련, 그리고 한국인들의 합의하에서 미래의 모든 정치적 가능성을 논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서를 찬성하는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어 소련과 합의를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개입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보수세력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높은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의 정책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라고 반발하면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서에 반대하며 결정서 3항에 있었던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3상회의 결정서를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자신들을 탄압하고 있는 상황(ex:정판사 위폐사건)에 대해 반발하면서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의 대구 10.1사건을 일으켰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하에서 경찰로 일했던 자들을 다시 기용해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미국은 한국의 보수세력들을 미소공위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이들은 반탁운동을 고수하면서 미소공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이 지원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더이상 미소공위를 추진할 수 없었다. 1946년 5월부터 약 1년간 미소공위가 진행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결국 미국은 보수세력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한국문제에 대해 처음 '先임정,後반탁'이라는 전제하에 합의를 보았으나 끝내 반탁운동 세력 참여 여부 문제놓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미국은 일방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 이관하였다. 국제연합에서는 한반도에 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고, 국제연합의 주도하에 한반도 전체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제연합의 결정에 대해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면서 선거는 38도선이남에서만 실시되었고, 결국 38도선 이남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1948년 8월 15일) 한달 후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1948년 9월 9일) 한국에서는 남과 북에서 각기 다른 체제의 정부가 세워졌다. 분단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중국 역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패망하면서 만주국이 몰락하고 반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1945년 이전부터 있었던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시기에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공동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두 세력간의 내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처럼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전쟁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국민당이 공산당을 압도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국민당은 이미 전쟁중 회담(2차 대전 중 미소 주도의 국제회의)을 통해 전체 중국의 대표로 인정을 받았고, 일본이 패망하면서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미국의 중재로 1945년 10월 10일 '충칭교섭'(쌍십협정이라고도 한다.)을 통해 10개항의 협정을 발표하고, 이듬해 1월 국공양당도 포함하는 전국 각계 및 각당파 대표가 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고 공동으로 연합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6년 6월, 국민당이 이 결의를 무시하고 중국 전체의 무력통일을 위해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내전이 발발했으며, 이듬해 9월 공산당은 총반격을 선언하였다.
초기에는 병력과 장비에서 우세한 국민당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국민당은 공산당의 군대를 중부평원과 양자강 하류지역에서 몰아내고 1947년 3월에는 공산당 본부가 있었던 옌안지역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1947년 말 공산당이 기동전과 유격전을 중심으로 전술을 재편하면서 점차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국민당의 부패한 정치와는 달리 공산당은 점령지에서 토지해경르 실시하면서 중국인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랴오션,화이하이, 핑진 전투 등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면서 1948년 12월에는 양자강 연안까지 진출했다. 이제 국민당에서는 1949년 1월 '연두성명'을 통해 공산당과의 교섭을 제안했지만, 공산당은 이를 묵살하고 동년 2월과 4월에는 베이징과 난징을 점령하였다.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공산당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패배한 국민당은 1949년 12월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기면서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로 분단되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옮기는 과정 역시 피의 역사를 동반했다. 타이완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옮기기 2년 전인 1947년에 벌어진 '2.28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일본의 뒤를 이어 타이완을 점령한 국민당 정부의 횡포에 대한 타이완 사람들의 항거에 대해 국민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였고, 이과정에서 3만여명의 타이완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긴 직후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1987년 해제될 때까지 타이완은 38년간 계엄령하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거꾸로 가는 정책, 그리고 제국의 부활
국공내전과 한반도의 분단은 동아시아 지역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지역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19세기 이래로 계속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즉 19세기 이래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벌인 패권 다툼은 동일한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중국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이후 중국과 일본의 패권 다툼은 이제 이데올로기와 체제 갈등을 동반하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 간의 패권경쟁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한반도의 위상도 변하였다. 1945년까지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중국과는 국경을 접했고, 일본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안보적 관점에서는 중요하였지만, 경제적인 가치가 높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직접 점령하기보다는 중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수립된다면 한반도 내에서 독립적인 정부가 유지되는 것을 허가한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경우 안보를 명분으로 하여 한반도를 점령하였지만, 한반도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대륙진출의 발판으로서 일본제국의 아시아정책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혁명으로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제 한반도는 아시아 공산권을 대표하는 중국과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일본 사이에서 완충지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게다가 한반도 자체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 다른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에 한반도 내부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전쟁도 뒤따랐다.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한반도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역이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 중국 국공내전이 더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이로인해 특히 미국 GHQ의 대일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미 1947년부터 중국에서 국민당이 어려워지면서 미국은 전반적인 아시아정책을 수정해야만 했다. 1947년 중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특사 웨더마이어의 보고서는 미국의 정책 수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중국의 국민당을 전략적 파트너로 하여 아시아지역의 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소련을 봉쇄하고, 일본이 더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로 하여금 일본점령에 함께 참여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 미국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초기에 발표한 대한정책(3성조정위원회 문서번호 166호)에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했던 것도 이러한 초기 미국의 대일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따.
일본에 있었떤 GHQ는 일본이 더이상 '말썽쟁이'가 되지 못하도록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실시하였다. 1946년 11월 3일에는 국민주권, 전쟁포기와 평화주의,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3대 원칙으로 하는 평화헌법이 공포되었다. 이를 통해 덴노의 권력이 무력화 되었으며, 평화헌법 9조를 통해 일본이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포기"하며,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전쟁의 가장 중요한 동맹자였던 재벌들이 해체되었다.(1945년 11월 6일) 미쯔이, 미쯔비시,스미토모, 야스다 등 주요 재벌이 해체되고 1947년 4월 14일과 12월 18일에 독점금지법과 과도경제력 집중배제법이 각각 공포되었다. 노동조합을 장려하기 위한 법령이 제정되었으며, 두차례의 농지개혁을 통해 1950년까지 농가의 90% 이상이 자작농이나 자소작농이 되어 과거의 지주제가 소멸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였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미국은 중국의 주위에 강력한 미국의 지지자를 심어서 '봉쇄'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케난(G.F. Kennan)에 의해 구체화된 '봉쇄정책'은 중국의 공산주의가 아시아에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와 일본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후 사회개혁에 따라 일본을 무력화할 경우 미국은 더이상 아시아에서 근거지를 잃게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특히 인도에서 간디가 암살되고, 종교전쟁으로 인한 내분이 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어느쪽도 찬성하지 않는 제3세계 형성의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위주의 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1948년 1월 6일 미국의 육군부 장관 로얄(K.C.Royall)은 연설을 통해 일본의 경제자립을 명분으로하여 대일본 점령정책의 수정을 선언하였고, 이를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이라고 부른다.
역코스 정책은 원래 미국이 붙인 용어가 아니었다. 이는 1951년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에서 25회에 걸쳐 연재된 '역코스'라는 연재물을 통해 등장했다. 이 연재는 훈장, 군함행진곡,야스쿠니 신사, 덴노의 신격화 등 문화적 복고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는데, 이 정책과도 어울리면서 이후 미국의 정책을 역코스정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은 역코스정책을 통해 일본을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변경하여 일본이 아시아에서 자본주의의 축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1949년 국가안보회의(NSC) 문서 12/2호(국가안보회의에서 나온 13번째 정책문서 초안의 두번째 수정본)로 구체화되었다. 이 문서는 일본의 재군비를 통한 안전보장과 경제부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이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및 인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공산당에 의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은, 식민지에서는 벗어났지만 사회적으로 불안정했떤 인도보다는 미국의 영향하에 있었던 일본의 부흥을 통해 아시아를 재편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사회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보수세력들이 다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일본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은 곧 1945년 이전 '제국'의 질서를 다시 복원하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1945년 이전 동아시아의 제국은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일본의 위에 미국이 있었다. 단,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해 만주가 더이상 일본의 배후지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 내의 상황을 쉽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이전까지 GHQ 군정이 설치되어 일본을 통치하였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사회개혁을 주장했던 일본 내 좌파의 목소리와 힘을 무시할 수 없었따. 따라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내의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력들을 '사회혼란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1949년 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미즈카와 사건 등은 사건의 전모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림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사건들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든 공직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본격적인 '레드 퍼지'(Red Purge)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일, 맥아더는 일본 공산당의 비합법화를 시사하고, 6월초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 24명과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의 간부를 공직에서 추방했으며, '아카하타'에 대해서는 정간처분을 내렸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본격적인 좌익소탕에 나서 모든 대중매체와 관공서,기업 등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했다. 이로인해 오히려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복무했던 관료들이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GHQ는 경찰예비대(후일 자위대로 개편)를 창설하였다. 이는 일본의 재무장을 위한 신호탄이었고, 경찰예비대는 1955년 자위대로 개편하면서 일본의 본격적 재군비가 시작되었다.
이제 동아시아는 본격적으로 냉전의 중요한 마딩이 되었다. 본래 냉전의 기원은 유럽이었다. 미국은 1947년 터키와 그리스의 빨치산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봉쇄한다는 명분하에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고 이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군사원조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은 자신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동유럽이 미국의 유럽부흥계획(마셜플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강권했고 1948년에는 '베를린 위기'를 일으켰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안보딜레마의 위기상승작용은 계속되었고, 결국 1949년에는 미국을 중시므로한 북대서양조약기구와 소련을 중심으로한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출범하면서 양대 진영은 군사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냉전은 유럽보다 큰 뉴스거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의 냉전전략가들은 중국의 공산화 역시 미국의 소련에 대한 냉전정책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대체로 중국의 공산화는 아시아 전역으로 공산주의가 확대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당시 아시아 국가들 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보수세력에 비하여 좀더 큰 대중적, 정치적 힘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주요 관심은 그들이 맞닥뜨리고 있었던 베를린을 포함한 유럽에 있었지만, 이제 아시아 역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지역이 되었다. 냉전 속에서 열전이 일어난 곳은 유럽이 아니라 동아시아였기 때문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옥의 티지만 이 글 전반부가 뒤에도 한번 반복되는군요 ㄷㄷ
국공내전에서 만약에 국민당이 승리했다면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돼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흠 저건 우리나라 미군정에 대한 기존의 시각과도 일맥상통하는 견해인데요. 조금은 편향된 기술을 하고 있는 측면도 있긴 있습니다. 뭐 이건 도올역시 실수하는 부분인데, 미군정이 들어왔을때 이들은 무식한 반공장성으로써가 걍 막 통치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전쟁을 하면서 겪은 기존 일본사회의 봉건적, 전체주의적 형태를 첨부터 개혁할 의도로 일본의 내정에 관여했으며 그러한 내정의 결과로 일본의 교육계라던가 관계, 재계, 그리고 왕족들에 대한 처우문제등에 있어서 첨부터 미국식 정의를 내세웠었고 그 정의또한 다만 수박겉할기 식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그 것을 납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계를 예로 들자면 교육헌장에
서부터 평교사의 복식이나 언어예절까지 상당히 사소한 것까지 미국식 정의를 내세워서 일본적인 것들을 교정하려 했었죠. 문제는 이러한 교정시도에 대해서 패전범인 우파는 대게 순종적이었지만 좌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허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를테면 얼마전 미수다에서 우리나라 민노당이 마치 극우파같다고한 어떤 북구유럽여햏의 지적질처럼 일본의 좌파역시 선후배관계라든가 정작 이너써클은 일본구귀족가문출신이라든가 하는 일본식 문제를 고대로 답습한 기관이었는데 이들은 입장이 대게 노선문제라는 큰 틀에서만 합치되면 당의 조직형태라든가 하는 작은 것은 관여하면 안되는 것 아니라는 식으로 더욱이
이들 좌파들의 현실이 우익프락치들에게 꽤나 오랬동안 린치당하던 입장으로 이들 특유의 결사주의나 비밀주의 노선을 민주적인 형태로 바꾸기엔 사회적 신뢰나 공감이 너무 부족했다는 문제까지 겹쳐서 대게 미국의 관여를 탐탁치 않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 미국과의 관계가 파탄나게 된 것이었죠. 또한 일본좌파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조르게사건으로 드러나 일본좌파들이 입수, 리하르트 조르게에 의해서 스탈린에게 건네졌다는 일본군작계등등 제법 소련이랑 일본좌파는 실제로도 연결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은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이 조르게 사건이 문제인데요. 이사건은 의외로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당시의 정황이라면 이정도의 사건이면 선전포고감인데 실제 일본은 어땠냐하면 조르게 사건으로 넘겨졌다는 그 문건 그대로 소련을 침략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몇년뒤 일-소 불가침조약을 맺기까지 했었습니다. 이 사건이 말입니다 겉으로는 소련간첩의 일본침투사건이지만 실상은 일본이 소련에게 침략의사가 없음을 암중에 암시하는 댓가로 소련은 일본에게 일본내 골수좌파조직원명단을 넘겨주고 일부러 스파이를 노출시켜서 일본의 파시즘프로파간다에 이용되게끔 해준다라는 의혹이 너무 심하게 묻어난 사건이었단 말입니다. 그러한 정황에 근거하면
이미 전후의 일본좌익은 실상은 우익인 2중스파이들로 되어있지 않냐는 의심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 당시의 일본좌익이었습니다. 미군정의 일본좌익탄압은 나름 근거가 있었단것이죠.
깔끔한 정리네요 잘 봤습니다.
이글 어디서 봤더라했더니 디씨였네요
여하튼 잘 보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