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져 주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7:31-3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2주일이다. 평안하신가? 날마다 평안을 묻는 일은 새삼스럽지 않다. 주변에서 크고 작은 사고, 사건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나니 일상적인 굿모닝이란 인사조차 실감이 난다.
성경에서 평안은 샬롬인데, 크게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하지만, 일상의 안부를 묻는 표현이기도 하다. 안녕, 건강, 화목, 심리적인 안정, 좋은 기분 등을 말한다.
내 일상생활은 과연 샬롬한가? 서로 일상의 샬롬을 위해 기도하고, 형편을 살피며, 따듯하게 위로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하여 늘 주님이 주시는 평안,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같이하시길 바란다.
요즘 가장 자주 듣는 뉴스 두 가지를 꼽으라면 의료대란과 딥페이크이다. 일상의 삶의 자리와 사이버공간이 모두 큰 위협이 되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겠는가? 우리 사회의 지성, 법, 치안, 교육, 도덕의식에만 탓을 돌릴 일이 아니라, 한국이란 공동체 전체가 함께 책임을 지고 대책을 마련할 일이다.
흔히 멘붕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문법에 맞지 않는 신조어인데 ‘멘탈 붕괴’를 줄인 말이다. 멘붕은 심리적 안정이 무너져 버린 상태다. 외부로부터 오는 심리적 물리적 충격과 공격 때문에 스스로 지탱할 수 없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상처 받았다’로 통했는데, 그 강도가 아주 세진 셈이다. 웬만한 경우에도 멘붕이라고 한다. 그런 멘붕 상태 때문일까? 이에 대한 대응으로 ‘힐링’이란 단어가 있다. 힐링은 신조어가 아니다.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치유라는 단어다. 치유는 심리 치료, 내면 치료는 물론 영혼 치료라는 영적 의미로 쓰인다.
멘탈이든, 힐링이든 모두 샬롬의 다른 표현이다. 지금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단어이다.
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치유하시는가, 어떻게 새로운 사람으로 인도하시는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새로운 창조의 삶이 허락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아픔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위대한 치유자이다. 헨리 나웬은 예수님을 가리켜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고 불렀다.
위로는 대단히 구체적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신다. 예수님에게 언제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체적 불구, 질병문제, 정신적 상처, 사회적 희생 등 온갖 멘탈 붕괴자들이 함께 하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 슬라브인의 속담에 “불평하려거든 너를 도울 수 있는 이에게 불평하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문제의 치유자 되신 예수님을 물불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문의 지리적 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행동반경은 종횡무진하다. 잠시 이방지역으로 몸을 피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 지역에서 만난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기적을 행하셨다. 바야흐로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있다.
이것 보다 조금 앞부분에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불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대인 엘리트들인 바리새인이나 장로들은 전통적인 신앙을 가졌는데, 그들은 늘 사람을 향해 양날의 칼을 휘둘렀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교 신앙은 없지만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방인들은 전적으로 신뢰를 보인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욱 빨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전통이니, 종교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질 못한 셈이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이방 지역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아주 절박한 요구를 지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방지역에서 만난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고, 율법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요청에도 귀 기울이시고 은총을 베푸시고 치료하셨다.
복음은 말한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부터 배제된 사람은 없다. 심지어 예수님은 율법의 정결례를 어기면서까지, 종교적 장벽을 허물어뜨리면서까지 사랑을 베푸셨다.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일, 이것이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역이었다.
2)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이방 땅에서 돌아 온 직후의 일이다.
갈릴리에 머무실 때에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몰려든 사람들 중 특별히 그를 주목하셨다. 그리고 따로 불러내어 둘만 잠시 무리에서 떠났다.
왜 따로 불러내서 그를 치유하셨을까?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로 삼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 장애인과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치유하시려는 뜻일 것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33).
예수님은 조금 유치해 보이는 방식으로 그와 소통을 하셨다. 그는 귀를 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믿음을 갖도록 이끌어 내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장탄식을 하신다. 그를 깊이 동정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안타까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때 하늘의 도움이 열린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4).
드디어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렸다. 이젠 말이 분명해졌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직업적인 기적 행위자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남보란 듯 과시하려는 영웅의 행각도 아니었다.
다만 인간을 인간답게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었다. 예수님의 치유는 육체 문제뿐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고치셨다. ‘에바다’는 자유의 선언이었다. 그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허락하신 일이다.
예수님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후 당사자뿐 아니라, 이를 지켜본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36).
그러나 경고하실수록 소식은 더 널리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이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찬양하였다. 사람들은 놀라며 말하기를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37)고 입을 모았다.
마치 에바다 기적은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이야기에 대한 결론처럼 느껴진다. 마치 창조를 마치신 후 하나님의 평가와 같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3)
예수님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공평하게 사람을 대하신다. 똑같은 장애 속에서 개인의 비참한 현실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 공동체의 아픔을 보셨다. 복음은 점점 땅끝으로 나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오늘 교회를 향해서도 그 모범을 따르도록 당부하신다. 사도행전의 중심 주제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에서 초점은 ‘땅끝’에 있다. 이방인이 지리적으로 땅끝에 속한 사람이라면,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땅끝에 속한 사람이다. 복음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으로 한 인간의 아픔과 사회적 소외까지 품으라는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이든 북이든 가리지 말고 찾아가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치유의 기적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표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칫 당신이 기적 행위자로 오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계하셨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람에도 소문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사실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입을 꼭 다물고 침묵할 수 있을까? 더욱 자신이 경험한 치유와 회복을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그를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30년도 더 오래 전에 경험한 일이다. 서울의 만원 전철 안에서 직접 목격한 일이서 아직도 기억이 새롭다. 몇 명의 젊은이들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통로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그때는 데모가 많았던 시절이라, 승객들은 웬 데모대인가 싶어 승객들이 잔뜩 경계를 하였다.
그중 키가 큰 젊은이가 목소리를 높여 “여러분!”하고 외쳤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실없이 웃고 말았다. 머리띠에 쓰인 구호가 기대를 머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의 머리에도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는 말더듬이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분, 나는 말더듬이입니다. 얼마 전에는 증세가 매우 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 남 앞에서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다시는 저 같은 말더듬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옆에 있는 친구를 소개했다. 저마다 심각하게 더듬는 어눌한 말씨였으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서로 돌아가며 말솜씨를 자랑했다. 구경하는 이들에게는 신선한 감동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은 ‘오직 한 분뿐인 의사’라고 불렸다. 진정으로 병을 치유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로 병든 사람, 장애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비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오장육부까지 감동한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예수님은 문제 해결을 바라는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그것이 해결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실 때 문제가 해결된다. 심지어 예수님은 나병 환자일지라도 몸을 만지신다. 손으로 만지시고, 품에 안아 주신다.
세상의 중심은 어디일까? 아픔이 있는 곳이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으나, 내가 응급상태가 되면 그 때 내 몸의 중심은 그 아픔이 된다. 그 아픔 때문에 내 삶에 경고등이 켜지고, 온통 집중될 수밖에 없다. 내 삶의 중심은 아픈 곳이고, 내 가정의 중심은 아픈 식구이고, 우리 공동체의 중심은 아픈 현제자매이다.
그러므로 남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다. 행여 공감하지 못하면 입을 다무는 것이 옳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문제에 진지하지 못하면 그 관계는 깨지기 십상이다. 사람의 아픔과 문제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믿을 친구가 못된다.
힐링이란 단어는 바로 예수님의 치유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의 답답한, 균열된, 무너진 내면을 흔들어 주셨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태도를 버려라, 쌓인 한과 응어리를 마음에 쌓아 두지 말아라,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살아라.
우리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들여라.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 칼 라너는 기적을 믿지 못하는 세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매 순간 기적에 의지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적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예수님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우리를 도우신다. 가슴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나를 맡겨라.
그리하여 주님의 만져주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늘 함께 하시어, 하나님의 치유와 기쁨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