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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일두 고택>
모든 것이 꿈이다. 변치 않겠다던 사랑의 맹서도, 부귀공명을 안겨주겠다던 행복의 약속도, 절의를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도 꿈, 꿈이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또 다른 꿈을 꾸어야 한다. 바람이 불고 가을이 이슥해지자, 먼 데가 그리워지고 사람들은 자꾸 길을 떠난다. 떠난 사람 뒤를 좇아 우리도 꿈꾸기 좋은 곳을 찾아간다.
양지 바른 땅 함양의 개평마을. 늠름한 학자들이 문기(文氣)를 다져놓고 굽이굽이 장쾌한 기운이 서린 지리산 봉우리들이 아스라이 둘러선 곳. 이 마을에 들어서면 그저 순박하게 맞아주는 마을사람이며 늙은 소나무 앞에서도 왠지 옷깃이 여며지고 마음가짐이 돌아봐진다. 가풍과 전통의 위력이다. 마을 한가운데는 반듯한 자세로 5백년을 건너온 일두 정여창 선생의 옛집이 있다.
정여창 선생은 조선 시대 다섯 현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문묘에 배향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 발짝 다가서서 선생을 이야기할 때면 덤덤하게 말하기 어렵다. 선생은 두 차례의 사화에 연루되어 두 차례의 죽임을 당하고, 자신이 사랑한 학문의 처음과 끝을 밝혔던 문집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런 탓에 선생의 삶과 학문을 헤아리는 일은 아뜩하다. 그럴수록 우리는 마음 흩이지 않고 살펴보아야 한다.
정여창 선생은 1450년 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터로 달려가 한 달 동안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시신을 고향에 묻고 이때부터 학문의 세계로 들어갔다. 선생의 나이 17살. 사서삼경을 쌓아놓고 지리산에서 3년을 보내고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 찾아 들었다. 그곳에서 생사를 같이하며 학문과 생의 도반이 되었던 한훤당 김굉필을 만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리나라 철학과 사상사에서 운명적인 장면으로 꼽힐 만하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조선의 유학을 도학의 기풍으로 감싸고 그 철학적 바탕이 되는 이기론을 태동시켰던 것. 두 사람 이전에 유학은 문장과 시부 중심의 사장학(辭章學)과 세상 경영의 경세학(경經世學)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서 비롯된 조선의 성리학은 훗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러 만개하여 우리 사상도 줏대를 곧추세울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은 학문을 사랑했을 뿐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 연산군을 가르치고 안의 현감으로 있었던 그 몇 년이 공직생활의 전부였다. 선생은 사람이 학문해야 하는 까닭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려면 물욕과 공리를 버리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 선생은 스스로 “한 마리의 벌레”라는 뜻의 일두(一?)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 이는 그저 겸양하는 표현이 아니라, 우주를 들여다보고 그 비의를 알아챘다는 은유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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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 선생의 18대손 정의균 선생>
정여창 선생의 18대 손 정의균 선생을 만나러 간다. 저 유명한 정려 편액 5개가 꼭대기에 빈틈없이 걸린 솟을대문에 들어서자, 사랑채에서 장작을 지피던 선생이 나와 이른 시각에 들이닥친 객들을 맞는다. 선생의 몸에서 불내가 나고, 그늘진 얼굴에는 간밤의 쓸쓸함과 고단함이 역력하다.
이 옛집으로 내려온 지 2년이 되어가고 아내와 자식들은 서울에 있다고,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왠지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무심하다.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예닐곱 살에 서울의 가회동 1번지 집으로 올라갔다. 국민학교 1학년에 다니던 해 6.25가 터졌다. 고향에서 피난하고 9.28수복 때 서울에 되돌아가서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중앙청에 근무하던 부친은 끝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고 고향에 살다 22년 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듬성듬성 말을 이었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은행에서 일했다. 해외 지점장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가족을 데리고 런던에 가 있어야 했다. 그곳 생활이 대우도 받고 경제나 직무조건이 좋았지만, 임기를 채우지 않고 2년 만에 서둘러 귀국했다. 아내를 비롯하여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고향에 어머님이 홀로 계시는데, 집을 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2백 50년 된 사랑채 벽에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씨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성리학적 정신이자 이 집안의 정신이다. 고택 안을 거닐수록 이야기가 흐른다. 사랑채 뒤쪽 굴뚝 곁에는 통나무로 된 간이 변소가 있어서 먼 걸음하기 싫은 어르신의 꾀바른 모습이 숨어 있고, 5백년 된 안채의 나뭇결은 어찌나 어여쁜지, 아침햇살을 받아 홍시빛깔로 빛나고, 5대조 만석꾼 할아버지한테 꼭 필요했음직한 곳간 여러 채도 이 집의 역사를 귀띔해준다. 오색단청을 입힌 사당의 문을 열면 선생을 빼닮은 정여창 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정의균 선생 자신과 부친 및 아들 삼대의 얼굴에서 일두 선생의 모습을 되짚어 그린 그림이다.
뒤란마다 펼쳐진 채마밭에는 고추, 고구마 등속이 갈무리를 기다리고, 생김새와 색깔이 저마다 다른 호박들이 뒹군다. 정의균 선생의 작품이다. 적막한 산골에서 선생의 쓸쓸함을 덜어주는 것들이다. 또 있다. 불현듯 찾아와 곡차를 질탕 마시고 일주일씩 긴 산행을 하며 속세의 때를 벗고 가는 오랜 벗들이 있다. 귀가하는 그들 손에는 호박 한 덩이, 고구마 상자가 들려 있곤 한다.
시간이 되어가자 선생은 들떴다. 독일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해 박사가 된 아들과 성악을 전공한 며느리, 손자들이 곧 도착한다고 했다. 그리웠던 가족이다. 아침나절 장작 한 짐을 지펴서 사랑채를 뜨끈하게 해놓았다. 선생은 소일거리라고 했지만,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보아야만 가지런한 자연의 순리를 몸으로 안다. 또 혼자 캄캄한 절벽에서 외로워 보아야만 사람의 정을 속속들이 느낄 수 있다. 그렇듯 선생은 유서 깊은 옛집에서 사람살이의 참 지혜로 살고 있었다.
일두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을 잊지 않고 들렀다. 마을에서 차로 5분 거리. 서원의 누각대문 풍영루에 올라서면 나직한 바람노래가 들린다. 1489년 봄, 일두 선생은 탁영 김일손 선생과 더불어 보름 남짓 두류산(지리산) 등반을 감행했다. 그해 선생은 불혹을 앞둔 나이였고 그간 벼렸던 학문과 경륜을 펼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전 숨을 고르던 시기였다. 그때 부른 선생의 노래 한 소절이다.
바람과 부들 너울너울 나부끼니
사월 화개 땅엔 보리가 가을이구나
두류산 천만 첩첩 휘휘 둘러보며
외로운 배는 강물 따라 내려가는구나
5백년의 터울을 두고 외로운 배처럼 강물 따라 흐르는 두 선생의 꿈을 보고 돌아간다. 그러니 여름날의 잡꿈에서 깨어나 실한 꿈을 꾸어볼 수 있겠다. 두류산 갈바람이 꿈속까지 불어올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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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선생을 모신 남계서원>
<김정겸 전주주재기자, 사진 박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