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긴 철계단 아래 한 사람 서기도 좁은 골목, 그 길을 채운 제각각 생긴대로 어엿한 가게들, 하얀 빨래가 눈부신 마당에 홀로 앉은 고양이, 그 자체로 멋스럽고 고운 녹슨 창틀, 담벼락, 장독대, 어디고 편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옅은 온기가 느껴지는 정적.
생각했다. '채움'이란 돈을 들여 말끔하고 보기좋은 물건으로만 하는 게 아니구나. 원래 있는 것에 시간이 쌓이고 정성을 더하며 매일매일 누군가의 삶이 녹아내리면 그 채움이 빛처럼 번지는구나. 대로변에 선 재래식 변소 문도 곱게 색을 칠해 꽃을 틔우니 저리 예쁘구나.
이제 얼마지 않아 고향에 내려가 나의 게스트하우스 채우기를 시작할 것이다. 당장은 침대, 탁자, 간판 뭐 하나 더할 여력이 없다. 아마도 한동안은 나의 체온과, 내가 끓여서 먹는 물과 차의 향기가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이부자리만으로도 족하다며 숙박을 예약한 손님들이 있으니 곧 그들의 체온과 이야기와 기억도 더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게스트하우스다운, 그리고 나다운 공간이 만들어지겠지. 귀향, 열흘 전이다.
북촌의 '복정터'와 '다사리아'에 소원돌 두 개
네 번째 소원돌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서울 용산에 사는 엄혜진(35) 님과 이메일로 소원만을 전해주신 이민용 님이다. 엄혜진 님은 NGO 단체에서 활동 중에 인연 맺은 인물로 '어메이징'이란 별칭처럼 아시아 소외계층을 위한 사업들을 놀라운 집념으로 펼치고 있다.
여덟 살 연하 남편과 신혼을 보내고 있는 그의 소원은 내년에 예쁜 딸아이를 갖는 것. 북촌 한옥마을을 걷던 중 우연히 발견한 '복정터'란 곳에서 소원 빌었다. 조선시대 물이 깨끗하고 맛이 좋아 궁중에서만 사용했다 하며, 대보름에 밥을 지어 먹으면 행운이 깃들었다고. 작은 동굴 속 맑은 우물이 어머니의 양수를 연상케 했다.
이민용 님은 어디선가 본인 기사를 읽고 메일을 보내신다 했다. 당신의 소원 역시 '퇴직 후 여행자들을 위한 편안한 집을 만드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내가 만드는 게스트하우스와 강릉 강문에 있는 '감자려인, 숙이'의 성공을 통해 당신 꿈의 롤모델이 생겼음 한다 했다.
이민용 님의 소원은 북촌의 '강력 맛집'으로도 소개하고픈 '다사리아'란 닭꼬치 가게에서 빌었다. 간판도 없이 사람 너댓 명 들어서면 꽉 차는 곳이었다. 하지만 깔끔하고 아늑한 자리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잔과 함께 먹은 닭꼬치 맛은 진정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더욱 인상적이었던 건 주인 아주머니의 친절. 본의 아니게 두 식탁 중 하나를 본인 혼자 차지하고 있었는데 곧이어 둘셋 되는 손님 무리가 들어왔다. 합석을 요청하거나 은근 눈치를 주리라 생각했지만 아주머니는 1초 망설임 없이 "자리가 없어요. 죄송해요" 했다.
그리고 한 손님이 좁은 통로벽을 걷다 간판을 떨어뜨렸는데 곧바로 손님의 안녕부터 챙겼다.
"안 다치셨어요?" "저는 괜찮은데 얘가(간판) 다친 것 같아요." "괜찮으심 됐어요. 얘 다친 건 제 팔자죠."
미안하고 머쓱해하던 손님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내 게스트하우스를 찾을 여행자들에게도 저리 친절하면 좋겠다 싶었다. 받는 이도, 주는 이도, 보는 이도 편안하고 기분좋은 친절. 비록 홀로 앉아 있었지만 기꺼운 맘으로 건배를 제안할 수 있었다. '이민용 님과 우리 모두의 꿈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