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산굼부리 하늘에서 다시 느끼다
태초의 섬이 멀어진다. 이동의 주체는 물질이지만 육지에서 보낸 시간은 가치로 저장 되었다.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문인들과 함께한 여행. 무엇을 하며 며칠을 보낼까 생각하였는데 오히려 남은 날들을 아름답게 색칠할 파스텔을 선택 할 수 있게 되었다.
땅에서의 하루를 자세히 그릴 수 없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 보니 바쁘게 걷고 차를 몰았던 길은 한 뼘이었다. 대구에서 느낄 수 없었던 맑은 바람이 가슴으로 들어올 때는 갑갑하던 마음이 서늘하리만큼 시원했었다.
며칠 전, 비행기는 구름을 헤집고 미끄러지듯 제주공항 활주로에 닿았다. 그리고 가을에 물든 산굼부리에 들어섰다.
군락을 이룬 억새는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며 나른 유혹했다. 머플러를 휘날리는 여인마냥 춤을 추고 있었다.
함께하던 일행들도 억새의 흔들림에 부서지는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소녀마냥 ‘깔깔’ 거렸다.
도시의 공기와 다른 상큼한 바람이 연신불어와 가슴이 뻥 뚫렸다. 추억을 갈무리하기위해 ‘산굼부리’라 음각된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가을이 내게 온 것이 아니라 시간에 마냥 쫓겼던 내가 가을을 붙잡지 않은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세월이 빠르고 쓸쓸하다고만 했지 내가 언제나 계절 속에 있음을 잊고 있었다.
모두는 바람속의 낙엽임을 생각하며 은빛 향연 속에 있는 신비로운 분화구를 내려다본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여행의 묘미가 더해진다.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릇처럼 생긴 곡선의 아름다운 구조는 마치 자궁처럼 포근하게 보인다.
한국전쟁의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안전하게 지냈던 나는 산굼부리가 사랑의 상징만 같았다.
심장병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신 어머니는 언제나 천천히 걸으셨다. 어린 아들은 그것이 걱정되어 훗날 의사가 되어 그 병을 고쳐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함이 죄스러웠다.
제주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으로 5개의 유인도와 5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고 비취색 물빛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워 세계인들의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주사람들이 해마다 팥죽을 올리고 제사를 지낸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설문대할망’의 오래된 이야기가 생각난다.
너무나 큰 덩치에 큰 키를 가진 할망은 아들과 탐라사람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섬을 만들기 여념이 없었다. 그때 한 벌뿐인 구멍 난 옷 사이로 흙이 흘러내려 만들어 졌다는 368개의 오름.
원추형, 원형, 말굽형, 복합형 등 4가지의 굼부리로 분류되는데 산굼부리는 39개 있는 동그런 굼부리를 가진 원형오름에 속한다. 그 오름을 오르는 언덕에 억새가 참으로 보기 좋게 만발하다. 오늘처럼 가을바람이 불고 나의 머릿결도 억새처럼 하얗게 변해가니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가 더욱 그립다.
여행을 함께하는 소진선생님의 아들집 정원에서 빙 둘러 앉아 보내는 제주의 밤. 이곳 큰 병원의 의사지만 어머니를 위해서 하루 휴가를 내어 ‘셰프’가 된 아들부부는 질 좋은 쇠고기를 미리 숙성시켜 놓았다. 그리고 정성껏 구웠다. ‘미디움’으로 구워진 고기는 접시에 올려놓기 무섭게 사라졌다.
내가 꿈꾸어 왔던 넓은 저택의 잔디에서 소박하게 보내는 제주의 시간은 천혜의 섬 속으로 스며들었다.
수많은 불덩이가 솟아올라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할망의 전설처럼 나무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사랑의 불덩이를 만들고 있다.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으니 사람들의 생(生)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가 많을 때는 활활 잘 타오르고 뜨겁지만 서서히 그 열기는 식기 마련이다. 열이 있을 때 음식이 잘 끓고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은 또 얼마나 잘 데워 졌는지 둘러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그러지 못했음을 느낀다.
한참 잘 나갈 때는 불꽃만 보았지 주위에 시선을 두지 못했다. 이기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면서 크게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뒤에 넣는 장작은 인연불이란 생각이 든다.
화력이 좋을 때 장작을 더 넣으면 솥의 물이 넘치고 시선을 다른데 두면 오히려 불과 연결된 것들은 사그라들게 된다. 그런데 오늘 셰프가 된 의사아들은 어머니와 연결된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쓰고 있음을 느꼈다.
선한자들을 비추는 가을달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음악소리는 따스함을 더 했다. 즐거운 대화는 웃음소리와 섞였다. 어디선가 귀뚜라미도 “또르르 또르르” 노래를 부르기에 지치고 슬픈 사람들에게 제주로 여행을 떠나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는데 옆 좌석의 일행이 말을 걸어와 고개를 비행기 밖으로 돌린다.
개미처럼 작게 보였던 집과 사람들은 어느새 세월마냥 빠르게 사라지고 없다. 지난 시간이 있었기에 철들 수 있었고 행복한 나를 찾을 수 있었듯, 며칠간의 여행은 좋은 휴식이 되었다.
어제의 시간 속에서 찾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어찌 내일의 시간 속에서 건지려 했겠는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그 땅은 내가 걸었던 땅이었으며 내일의 시간에 또 반영될 길임을 느끼고 온 시간들.
첫댓글 제주의 아름다운 억새가 달빛에 춤을 추는 듯 한 글 잘 읽었습니다. 부회장님~^^
제주에서의 몇날을 떠올려봅니다.
은빛으로 일렁이던 억새밭. 그 사이로 헤집고 들어온 햇살, 바람.
지치고 외로운 이들을 보듬어 주던 산굼부리.
오래오래 저장해 두고 싶은 추억입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의 춤
마당을 비추는 달과 감미로운 음악처럼 아름답게 버물어진 고운 수필 잘 읽었습니다
저도 산굼부리를 갔습니다만,
이처럼 아름다음을 느끼지 못했는데..
좋은 작품 잘 보았습니다.
제주의 바람과 햇빛 그리고 달빛마저도 아름다웠습니다ㆍ선생님들의 댓글이
바람에 춤을 추는 억새의 물결로 스며들게 합니다ㆍ
산굼부리
저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 참 잘 쓰셨네요.그 집 수제맥주는 못드셨는지요?호호.
오늘 서귀포 문협 송년회에서
인도여행 제의를 받았습니다.
여행 복 저도 한 번 터져봅니다.
부웅!
저도 맛만 보았습니다만, 정 많고 활동가이신 선생님에게만 더 특별한 수제맥주를 내셨을지도 모릅니다ㆍ같이 갈 걸 그랬나봅니다ㆍㅎㅎㅎ
복이 많으신분이라 인도까지 여행을 떠나신다니ㆍㆍㆍ건강하시고 즐거운 여행되시길 두손 모웁니다ㆍ
담백하고 상큼한 글 잘 읽었습니다
김복건 부회장님, 산굼부리 갈대숲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일행들과 함께 한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 할 겁니다.
밝은 미소 뒤에 산굼부리리는 글이 가려 졌지만
갈대가 뒤덮은 가을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