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때 교우들의 피난처이고 처형지이며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
한티 성지는 대구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신자들이 박해 시대에 이곳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교우들의 피난처이고 처형지며,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대구에서 북쪽 팔공산과 가산 사이 깊은 산간 지대에 자리 잡은 한티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 가롤로, 최 바르바라, 조아기, 서태순 베드로의 묘와 무명 순교자의 묘 30여 기가 있는 한국 가톨릭의 성지이기도 하다.
한티 마을은 대구 천주교회의 요람지 신나무골과 함께 대구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신자들이 박해 시대에 이곳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깊은 산중 취락이었다. 한티에 천주교 신자 취락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1830년대 교우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피난지였다.
[아래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티 교우촌의 개척자로는 볼 수 없으나 한티를 오늘의 유명한 교회 유적지로 만든 이는 김현상 요아킴이다. 서울 관철동에 살다가 1837년 낙향하여 처음에는 신나무골에서 살다가 1838∼1839년 무렵 한티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가 발생하기 몇 년 전에는 상주 구두실 출신인 조 가롤로 가정, 1865년에는 대구의 이 알로이시오 가정, 1866년에는 서익순(인순) 요한과 서철순 바오로 가정 등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척박한 한티에서 옹기,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한티 교우촌에는 박해 기간 동안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신자들이 적지 않다. 1861년 경상도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칠곡 신나무골에 살던 이선이 엘리사벳 가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이선이와 큰 아들 배 스테파노가 포졸들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들 모자가 한티의 첫 순교자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에 걸쳐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들어와 재판 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 가롤로를 비롯하여 부인 최 바르바라, 여동생 조아기 등 30여 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달아나는 신자들은 뒤따라가서 학살하였다고 한다. 동네는 불타 없어지고 온 산 곳곳에 너무 많은 시신이 썩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
▒ 한티 성지 순교자들
한티 순교 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이중 33기는 무명 순교자의 묘지다.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의 묘는 다음의 4기이다.
○ 조 가롤로(공소 회장)
○ 최 바르바라(조 가롤로의 부인)
○ 조아기(조 가롤로의 누이동생)
○ 서태순 베드로
▒ 하늘 바라보며 죽는다는 것은 (한티에서) <김영수> ▒
팔공산 한티의 하늘은
늘 참회처럼 푸르고도 아립니다
바람들 깨어나 뭉게뭉게 구름꽃들 피우고
밝히는 옹기조각들엔 은은히 불들 밝습니다
오직 하늘 바라보며 살고
하늘 바라보며 죽는다는 것은
투명한 살 썩혀 기름진 땅 이루는
기나긴 사랑입니까
거기 알밴 적막의 초원에는
햇살 내리는 조출한 아침 식탁 있고
나는 언제 알몸으로 뜨거워져
영원의 길목 덥힐까요
십자가의 길 오르다
'그대 숨지심'에 닿아
아픔 황홀히 만날 때
문득 바람들은 신발끈 다시 매고
숲을 달리며 하늘을 달리며
푸르게 푸르게 머리를 감습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