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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묵상글 ( 성모 승천 대축일. - 땅에서 하늘을 살기. 등 )
# 07:00, 김찬선 신부님 묵상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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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땅에서 하늘을 살기 < 2023.08.15. 06:17 >
오늘 축일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났을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덕담하자 이에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엘리사벳의 덕담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여기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되다고 하는데,
마리아가 여인 가운데 가장 복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는 마리아만큼 불행한 여인이 없는데
어째서 마리아가 여인 가운데서 가장 복되다고 하는 겁니까?
마리아가 가장 행복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세상에서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듯 저세상으로 바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아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였기 때문이고,
아들의 Passio(수난)를 Compassio(동병상련)했기 때문이며,
아들의 수난에 동병상련했기에 아들을 따라 하늘로 올려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리아의 축일은 오늘 축일뿐 아니라 모두 아들을 따르는 축일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축일이 십자가 현양 축일과 성모 통고 축일이고,
그리고 예수 승천 축일과 성모 승천 축일입니다.
사실 두 분뿐 아니라 아들과 엄마의 관계가 대개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아들이 가는 곳은 엄마가 가는 곳이다가
나이를 먹으면 그것이 바뀌어 아들이 가는 곳이 엄마가 가는 곳이 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 성전 방문을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했을 겁니다.
어린 예수가 부모를 따르지 않고 성전에 홀로 남은 사건 말입니다.
왜 부모를 따르지 않았느냐고 어머니 마리아가 나무라자
당돌하게도 아들 예수가 오히려 어머니 마리아를 나무라는데,
그것은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냐는 거였고,
이것을 마리아는 마음속에 깊이 그리고 오래 간직하였다는 거였지요.
이것이 인간적으로는 사춘기 현상 곧 부모로부터의 독립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이제 아들이 더 이상 인간 부모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이때부터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고,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가는 길을 끝까지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길이란 타볼산에서 내려와 해골산으로 오른 십자가 길이고,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옮아가는 나그넷길이요 승천의 길입니다.
오늘 감사송은 마리아가 이 길을 충실히 간 우리의 모범이라고 찬미합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우리가 이 축일을 성대하게 지내는 이유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마리아가 우리에게 선명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라는 얘기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리아처럼 나그넷길을 잘 가
‘직 천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것이 오늘 본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하늘로 부르시어
그 육신과 영혼이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셨으니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그리워하는 것,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늘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자주 얘기하듯 ‘땅에서 하늘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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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라면, 새로운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은 “성모승천” 교리를 예형론을 통해 이해 해 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지 새 아담만이 아니라 새로운 출애굽을 이끌 새로운 모세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40일 밤낮으로 시나이 산에서 단식했듯이(탈출 34,28) 예수님께서도 40일 밤낮을 광야에서 단식하시고(루카 4,1-2),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로운 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였듯이(탈출 16,1-31), 예수님께서도 외딴 곳에서 신비로운 빵을 많은 군중에게 먹이시고(루카 9,10-17), 모세가 이스라엘 여두 지파와 계약을 맺듯이(탈출 24,1-8),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때 열두 제자와 “새 계약”(루카 22,20)을 맺으십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출애굽’이 이집트 땅에서 시작해서 약속의 땅에서 끝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출애굽’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하늘나라에서 끝납니다(루카 9,30-31;24,50-51). 곧 지상의 약속된 땅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출발지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라면, 새로운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계약 궤’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에 도착해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탈출 19-20장),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지상 거처로서 당신 백성들 가운데 머무실 장소로 ‘성막’을 짓고(탈출 25,8-9), 그 안에 당신께서 백성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장소로 ‘계약 궤’를 만들라고 합니다(탈출 25,8-22).
이 ‘계약 궤’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개의 증언판’(탈출 31.18)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 그리고 싹이 돋은 대사제 아론의 신비로운 ‘지팡이’가 모셔졌는데(탈출 16,34;민수 17,25), 그 위에 하늘에서 주님의 ‘영광인 구름’이 내려와 머물렀습니다(탈출 40,21.34-38). 이 ‘영광의 구름’은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가시적인 표지였으며, 당신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 제국에 파괴되기(기원전 587년) 전에 하느님 ‘영광의 구름’이 예루살렘에서 떠났다고 전합니다(에제 10장). 그리고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다시 ‘자비를 보이실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하며, ‘주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 ‘계약 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2마카 2,8)고 말합니다.
사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하느님 영광의 구름’과 ‘잃어버린 계약 궤’가 없이 텅 비어 있었고, 그래서 당시 유다인들은 잃어버린 ‘계약 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하느님 현존을 나타내는 ‘영광의 구름’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께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렇게 해서, 성막 위에 내려온 ‘영광의 구름’과 ‘마리아에게 내려온 성령’이 연결됩니다. 곧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다(επισκιαξω).”(탈출 40,34-35)는 말과 “성령이 동정 마리아를 덮을 것이다(επισκιαξω).”(루카 1,35)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곧 성막 안에 자리한 ‘계약 궤’가 출애굽 여정에서 하느님 현존의 특별한 자리였듯이, 이제 주님 탄생 예고를 통해 마리아는 새 출애굽 여정에서 하느님 영광이 머무시는 특별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주님 탄생 예고에서 마리아를 ‘새 계약 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주님 현존이 머무는 곳인 ‘계약 궤’가 나타날 때처럼 환희에 차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루카복음사가는 예수님을 새로운 출애굽을 이끌 ‘새 모세’로, 그리고 마리아를 하느님 현존의 새로운 지상 거처인 ‘새 계약 궤’로 묘사해 줍니다.
또한, 오늘 <제1독서>에서는 ‘태양을 입은 여인’에 대한 요한의 환시(묵시 11,19-12,2)를 통해, ‘여인과 계약 궤’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늘에 있는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면서, ~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의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날 것입니다.”(묵시 11,19-12,2)
이렇게 ‘계약 궤’와 ‘여인’은 하늘의 성전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참된 계약 궤’가 더 이상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 ‘계약 궤’와 ‘여인’은 한 사람에 대한 이중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새 계약 궤’라면, 그녀의 몸은 ‘하느님의 지상 거처’라는 말이 되고, 예수님은 ‘지상의 하느님’이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줍니다. 결국, ‘새 계약 궤’로서의 마리아의 정체성의 신비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아주 깊은 신비를 밝혀줍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느님 말씀의 거처이신 분, 오 새로운 계약의 궤여, 순금대신 순결을 입으신 분, 당신은 계약의 궤, 참된 만나를 담은 황금 그릇, 신성이 머무르는 육신이로다. ... 당신 안에 온전한 발, 머리, 완전한 하느님의 온몸을 지니고 계시니, 당신이야말로 하느님께 쉬시는 거처로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리아 안에 주님께서 친히 와 계시니, 마리아께서는 ... 계약 궤이며,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다.”([교리서] 2676항)
그래서 교종 비오 12세께서는 1950년 마리아의의 육신이 천상으로 들어 올림 받으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썩지 않는 나무로 지어져 주님의 성전에 안치된 계약 궤를 동정녀 마리아의 지극히 순결한 육신의 예형으로 여겼습니다. 마리아의 육신은 무덤의 부패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채 보존되었으며 천상의 지고한 영향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습니다.”(교종 비오 12세,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 26항)
이제 우리는 답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계약 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신약성경은 ‘참된 계약 궤’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말해줍니다. 바로 “하늘에”(묵시 11,19) 있습니다. ‘옛 계약의 궤’는 참된 하느님의 거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요한 1,14)의 어머니 마리아의 예형인 것입니다. 곧 마리아는 ‘새 계약의 궤’로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되시고, 육신의 부패로부터 보존되시고, 하늘로 들어 올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들어올림 받으신 마리아는 육신의 부활과 승천이 예수님께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부활하고 승천하리라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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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어머니를 통하여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세주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전구해 주시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의 전구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성모님을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교황 비오12세는 1950년 교황령에서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었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 된 신앙의 진리이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장차 얻게 될 신분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께서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누린다는 뜻입니다. 천국을 차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모승천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인간의 몸을 지니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았기에 우리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도 하늘로 올림을 받을 수 있도록 성모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믿음의 승리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예형이요, 모범으로서 죽음을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더불어 하늘의 꿈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가 엘리자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자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으로 복된 마리아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성모마리아이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믿음에서 왔습니다.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실 구원의 역사는 믿음의 행위로 시작되고 또 열매 맺게 됩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지만 구세주를 낳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믿었고 구세주를 낳았습니다. 마리아가 믿고 받아들인 행위는 죽음을 각오한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믿음의 어머니, 순명의 어머니,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실 몸이었기에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힘입어” 원죄로부터 보호받아 당신 자신이 “원죄 없이 잉태” 되시는 특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봉헌하시어 “평생동정”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히 주님을 뒤따랐던 성모님을 성자 예수님께서 누리신 영광에 동참하게 “몽소승천”,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상 영광을 누리고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한 전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는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구지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 의탁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순명과 겸손의 삶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 현장에서 첫 기적을 행하셨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려 여섯 개의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요한 2,1-12). 그러므로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성 베르나르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잉태에서 죽음까지 그리고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제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갖가지 모욕을 당하며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을 때 다른 모든 이의 믿음은 흔들렸지만, 성모님께서는 그분이 하느님이셨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성 알폰소리구리오).
바로 성모님은 예수님의 삶의 여정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성모님께로!”입니다.
성모님의 시선이 늘 당신의 아드님을 향해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가슴에 품었기에 우리도 “성모님처럼 생각하고 그분이 바라신 것을 바라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행하고 그분이 지향하시는 바를 지향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성모님 안에 있으라는 뜻입니다”(알베리오네). 성모님 축일에 그분의 믿음, 겸손을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정령 ‘믿으셨기에 복된 분’입니다. 우리도 믿었기에 복된 사람이 되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어머니!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희망의 어머니
‘마리아 당신은 희망의 어머니
주께서 빛나는 별들로 구미셨네
우리를 비추소서 동정녀시여
사랑의 어머니 마리아여’
1. 은총이 가득하신 어머니 마리아
당신은 우리 구원의 여명이여
우리 즐거움의 원천 빛나는 등대
영원한 빛줄기 하늘의 문
2. 주님의 말씀을 실행한 복된 분
당신은 우리 마음의 기쁨이며
모든 덕의 씨를 뿌리시니
당신은 수려한 하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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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토마시 할리크의 ‘그리스도교의 오후’를 읽고 있습니다. 책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종교, 교리, 교의, 신학, 조직’의 형태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은 전승과 역사를 통하여 발전하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신앙을 판단하고, 때로는 박해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삶이 불신앙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도 신앙의 이름으로 이방인을 판단하고,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고, 죽음으로 몰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의 대상으로뿐만 아니라 신앙은 삶과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부른다고 하느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삶은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위선과 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신앙인이지만 신앙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위기가 있다면 신앙을 대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삶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끌림과 떨림’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격이나 취미가 비슷하면 더 끌리기도 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맛이 있는 음식도 있지만 입맛에 끌리는 음식도 있습니다. 술도 비싼 술이 좋지만 입맛에 끌리는 술이 있습니다. 저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이 끌린 사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쳤던 소경, 깨끗해지기를 바랐던 나병환자,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던 백인대장, 딸의 병을 위해 찾아왔던 여인,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자캐오, 예수님께 시중들던 마르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끌리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리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는 연인은 마음이 떨릴 것입니다. 서품식에서 바닥에 엎드려 성인호칭기도를 듣는 서품자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둥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릴 것 같습니다. 드디어 새집을 마련해서 입주하는 아내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저도 첫미사를 봉헌할 때 무척 떨렸습니다. 무서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벅차서 떨리는 것입니다.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의 마음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들것을 들고 걸을 수 있었던 중풍병자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떨렸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떨렸다고 합니다. 익숙함으로 소중함을 잊어버리기보다는 처음 성체를 모셨던 그 설렘과 순수함으로 신앙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모님께서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셨다고 믿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기 때문에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 대한 이 모든 찬사와 공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님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성모님께 대한 찬사와 공경은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채워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미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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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로 올라가심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성모승천 대축일을 우리는 조금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성모님을 기리는 날이면서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를 기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승천’이라고 하면 주님의 승천과 성모님의 승천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승천을 서로 비슷하면서도 차이를 나타냅니다. 주님의 승천은 스스로 올라가신 승천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들어 올려진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 승천을 다른 말로 ‘몽소승천’이라고 하는데요. 그 의미는 하늘로 불려 올려 졌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왜 불려 올려졌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주님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모님 안에 온전한 하느님, 즉 삼위의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면에서 승천에 합당한 분이셨습니다.
성모송을 외우면 그 전반부가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은총이 ‘가득하신’은 ‘성령’이고 주님은 ‘하느님’ 그리고 ‘태중의 예수님’, 이 삼위가 모두 성모님과 함께 계셨기에 성모님은 죄도 죽음도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승천할 사람이고 하늘로 들어갈 사람입니다.
와인 한 장고
벌써 몇 달은 지난 이야기입니다.
동기 신부님들이 왔습니다.
다 합치면 15명인데 몇 명 빠졌습니다.
저녁을 함께 먹고
제 거실에 모여
두런두런 살아온 이야기와 요즘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 와인 한 병만 마실까?
제게는 작은 와인 냉장고가 있습니다.
작지만 8병은 들어가는 냉장고입니다.
한 번의 웃음에 한잔
한 번의 아픔에 또 한잔
한 병이 두 병 되고, 두 병이 네 병이 되고….
줄어드는 와인 만큼
우리의 고민과 힘겨움도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밤 한 냉장고를 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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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동아리 MT로 전라도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광주신학교 신학생들을 만나서 모임을 하고, 저녁에 술자리를 함께했지요. 이 자리에서 안주로 ‘홍어’라는 것을 처음 접했습니다. 심한 암모니아 냄새와 함께 코가 뻥 뚫리는 체험을 했지요. 이 이상한 음식을 왜 먹나 싶었습니다. 몸에 좋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느끼면서까지 먹어야 하냐고 물었지요. 하지만 그곳 신학생들은 계속 먹다 보면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 된다면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30년 전에 시작했던 홍어와의 만남이 지금은 어떨까요?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피 음식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홍어가 나오면 입맛이 돋고 술맛도 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홍어의 맛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미사를 처음부터 기쁨과 행복으로 체험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군대에 있을 때, 성당 가면 맛있는 간식 준다고 꼬셔서 함께 미사에 갔던 동료가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성당의 미사는 너무 힘들어. 계속해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니, 편안히 잠잘 수 있어야 말이지. 그런 면에서 불교가 최고야.”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기쁨은 이 고통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진짜 맛을 느끼는 상태까지 와야만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쯤 오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냅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상당히 부러울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모님의 승천이지요. 죽음을 건너뛰고 하늘로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이며 영광입니까? 그러나 이 영광은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얻은 것도, 또 운이 좋아서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계속된 고통을 당신의 가슴으로 안으셔야만 했습니다. 그 고통의 크기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성모님께는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낳을 장소가 없어서 허름한 마구간을 선택했던 것도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또 산후조리도 못 한 채 이집트로 피신까지도 가야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성전에서 잃어버리기도 했고, 세상에 나간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것도 부족했는지 이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모습까지도 직접 봐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고통과 시련을 넘어섰기에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모든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성모승천이라는 영광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작은 고통과 시련에도 크게 넘어져서 주님으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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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생이 하나의 긴 문장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쉼표가 필요하다(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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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5. 성모 승천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우리 모두 승천하신 마리아 성모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참으로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에 적절한 권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5주년인 2018년 3월19일 자신의 세 번째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 서명했고,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이라는 부제를 단 이 교황 권고는 4월9일 전 세계에 공개됐습니다. 말 그대로 ‘현대 그리스도인을 위한 지침서’입니다.
“모든 거룩하고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전구와 더불어, 여러분에게 저의 새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보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모든 이가 각자 일상생활에서 성덕의 소명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고자 이 권고를 작성했습니다.”
교황님의 서두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과 더불어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지 78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얼마나 성모 마리아님과 축복된 인연의 한반도 나라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날마다 승천 대축일이요 성모님과 함께 승천 여정의 삶입니다.
희망과 꿈이 사라진,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혼돈과 어둠의 시절에 주님은 승천하신 성모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하늘길을, 하늘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성모님 승천의 희망의 빛이 우리의 어둠을 환히 밝힙니다. 문득 성모님께 무엇인가 선물로 드리고 싶은데, 하루하루 날마다 나를 통째로 다 드리기에 드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저는 매일 평생 써놨던 연서(戀書)와 같은 강론집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모님을 뵈올 때는 지금까지 써놨던 연시(戀詩)와 같은 사랑의 시집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바치고 싶은 두 편의 시가 생각나 그대로 나눕니다. 앞 시는 주님께, 뒤 시는 성모님께 드리는 선물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며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며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사랑하올 주님께 바칠 연시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에 이어 오늘 승천하시어 우리를 위해 늘 전구하고 계신 성모님께 드리는 다음 “임오시면”이란 연시입니다.
“임오시면
달맞이꽃
연노랑 저고리에
메꽃
연분홍 치마
달개비꽃
영롱한 고무신
해드리고 싶네
임오시면”-2000.7.16.
모두가 여름철에 들판에 피어나는 영롱하고 청초한 야생화 들꽃들입니다. 이 시와 더불어 오늘 일어나자마자 수도형제들과 함께 주님과 성모님께 선물로 바쳤던 아름다운 성무일도 초대송에 이어 찬미가와 후렴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오늘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 하늘에 오르셨으니, 어서와 우리 주님께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2.“태양의 빛입으신 동정녀시여 열두별 머리위에 꾸미신이여
저달을 발판삼아 우뚝서시니 환하게 빛나도다 당신의 광휘”(찬미가1절)
이어 5절까지 계속되는 찬미가 내용들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우리 영혼을 고무하고 위로하며 환희에 넘치게 합니다. 이어지는 후렴 둘도 아름답습니다.
3.“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곳에 왕중의 왕께서, 별빛 찬란한 옥좌에 앉아 계시는도다”
온통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승리와 영광의 성모님을 기리는 내용들입니다. 참 고마우신 주님에 이어 참 아름다운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이 좋아 말이 많다보니 서론이 길었습니다. 성모님 사랑과 자랑에 서론만 쓰다 강론이 끝날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성모님과 함께 승천 여정을 살고 있는, 이미 지상에서 천국의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복된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믿음(信)의 참된(眞) 삶입니다.
겸손과 섬김, 순종의 믿음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혈연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마리아 성모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제 강론을 쓰는 책상 위 사제서품식때 가족사진의 신마리아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저를 보는 듯 합니다.
겸손과 섬김, 순종과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은 친히 영적도반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감격에 벅찬 엘리사벳의 환대와 더불어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귀에 들리자 저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성모님을 닮아 참된 믿음의 삶, 겸손과 섬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승천의 삶입니다.
둘째, 희망(望)의 참 좋은(善) 삶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삶입니다. 성모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무한한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성모님을 통해 은은히 빛나는 그리스도요, 바로 성모님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과 기쁨이 됩니다. 성모님을 통해 궁극의 승리와 영광으로 빛나시는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의 샘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실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아 이런 궁극의 희망이자 기쁨이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성모님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화답송 시편과 묵시록에 소개되는 성모님의 모습은 얼마나 우리의 희망과 기쁨을 붇돋우는지요!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승리와 영광의 성모님이,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희망과 기쁨의 참 좋은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성모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찬미와 감사의 사랑(愛)에 기쁨이요, 찬미와 감사의 아름다움(美)입니다. 묵시록의 마지막 말씀도 우리의 찬미와 감사를 북돋웁니다. 성모 마리아 어머니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 찬미의 행복입니다. 감사의 기쁨, 감사의 사랑, 감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지니게 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영혼 건강, 정신 건강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보다 더 좋은 영약(靈藥)은 없습니다.
그러니 찬미와 감사의 삶을 선택하여 부단한 훈련을 통해 찬미와 감사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은혜에 감격하여 바치는 오늘 복음의 마니피캇 찬미감사가는 얼마나 우리 전존재를 찬미와 감사의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는 지요!
참으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들인 우리가 바칠 참 자랑스런 특권이 이런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2천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님과 함께 바치는 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마니피캇 찬미감사가입니다. 늘 바쳐도 늘 샘솟는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을 선물하는 마니피캇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칠 것입니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 자랑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성모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영광이요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 지상에서 성모님처럼 영적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살게 합니다.
1.섬김과 순종의 참된 믿음의 삶을,
2.희망과 기쁨의 참 좋은 삶을,
3.찬미와 감사의 아름답고 사랑 충만한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승리와 영광의 승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이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모님을 닮아 진선미(眞善美)의, 신망애(信望愛)의 영원한 삶, 승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승천하시어 승링의 영광을 누리시며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시는 성모 마리아는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미래요 희망입니다.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미하는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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