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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학대 속에도 계신 하나님
출 1: 15-22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심히 창성하는 것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같은 셈족인 쫓겨난 힉소스 왕족들과 합세하여 애굽을 대적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아예 노예로 삼고 강제노동을 시켜 괴롭히고 번식을 억제하므로 그들의 수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중노동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당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몸과 마음이 더욱 튼튼해졌습니다.
바로 왕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엄하게 일을 시켰습니다(13, 14).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 인구감소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아예 이스라엘 민족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16)"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고 노여워하며 물었습니다(18). 산파들이 대답을 합니다. "예, 왕이여!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19)."
이제 바로 왕은 더욱 악랄하여졌습니다. 그는 아예 공공연하게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서 바로 왕의 학대 속에도 그의 백성을 지키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왕의 박해 속에서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일을 통하여 그 백성들을 유익하게 해주셨던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환난이 많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그러한 사랑으로 돌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좀 더 깊이 살피고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십니까?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해하려는 악한 자의 간계를 폐하십니다.
10절에 보면 애굽 왕 바로는 그 신민들에게, "자, 우리가 그들에게 지혜롭게 하자!"고 했습니다. 곧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할 간계를 꾸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꾸민 간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로의 간계는 인간적인 면으로만 보면 참으로 현명하고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노동을 시킴으로서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고 그들을 연약하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중노동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는 서서히 감소되고 결국에는 멸절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바로의 간계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당신의 백성들을 해하도록 방치해 두지 않으셨습니다.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는 간계를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간계를 폐하사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창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해하려는 악한 자들의 간계를 폐하시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 성도들이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악한 자들이 끊임없이 성도들을 해하기 위해 간계를 꾸미는 가운데서도(시 38:12) 진멸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욱 번성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해하려는 악한 자들의 간계를 폐하시고 성도들을 보호하며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사실을 바로 알아 비록 악한 자들이 우리를 해하기 위해 에워싼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소망 가운데 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의 때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견디기 힘든 고난을 만날 때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가까이 이른 줄로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며 인내로 고난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말세에 임할 고난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되면 성도들에게 큰 고난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24:21; 딤후 3:1). 그러나 말세는 또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때이기도 합니다(히 9:28).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세를 당하여 닥친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가까이 이른 줄로 알고 아무리 암울한 상황을 만난다 할지라도 도리어 기뻐하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욥 5:12-14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며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2. 하나님은 악한 자의 계교까지도 당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
바로왕은 혹독한 강제 노역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 증가와 번성을 억제하려던 자신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8-14) 이번에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새로 태어나는 남아들을 살해함으로서 이스라엘을 점차 고사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는 바로의 악한 계교까지도 도리어 그의 백성들을 위한 당신의 원대한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의 악한 계교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해야만 했던 고통은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준비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을 받지 아니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였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출애굽 명령에 순종하여 기름진 애굽 땅과 고기 가마를 버려 두고 거칠고 황량한 광야로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애굽에서 모진 고통을 당했기에 하나님의 출애굽 명령이 떨어지자 애굽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과감히 애굽을 떠나 광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로의 이스라엘 남아 살해 명령이 내려진 가운데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를 준비시키셨습니다(2:1-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해하려는 바로의 악한 계교를 도리어 이스라엘의 출애굽 준비 과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악한 자의 계교까지도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가장 뚜렷한 실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사탄과 그의 조종을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방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악한 자들의 계교를 오히려 인류 구속의 결정적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그의 백성을 해하려는 악한 자들의 계교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로 말미암아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드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악한 자들의 간계로 인해 고통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악한 자들의 간계는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드리는 방편이 될 뿐이요 여러분을 해할 수 없음을 믿으십시오. 정녕 여러분은 아무리 큰 핍박과 환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어떤 유서
예루살렘에서 먼 지방에 살고 있던 한 어진 유태인이 아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학교에 넣었습니다. 아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이에 아버지는 병이 들어 아무래도 아들을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유서를 썼습니다.
유서에는 "전 재산을 한 노예에게 줄 것이며, 다만 재산 중에서 하나만 아들이 원하는 것을 아들에 게 주라!"는 내용이었다. 그 아버지가 죽자 노예는 자신의 행운을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그 아들에게 부친이 죽은 것을 알리고, 유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들은 대단히 놀라며 슬퍼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아들은 앞길이 막연하여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랍비의 집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아버지는 왜 저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한번도 아버지를 화나게 한 적이 없는데요?"라고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랍비는 "터무니없는 소리! 자네의 아버님은 아주 현명했고, 또 자네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었네. 이 유서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노예에게 전 재산을 주고 아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았으니 애정도 없고, 어리석은 행위였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자네도 자네 아버지만큼 현명하게 머리를 써보게! 아버지가 무엇을 바라고 있었던 가를 생각해 보면 자네에게 훌륭한 유산을 남겨주었음을 깨닫게 될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이 유서에서 제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죽었을 때 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노예가 재산을 가지고 도망가거나, 재산을 써버리거나, 자기가 죽은 것조차 아들에게 알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전 재산을 우선 노예에게 준 것이네! 재산을 전부 주면 노예는 기뻐서 급히 자네를 만나러 갈 것이고, 재산도 소중하게 관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
아들은 "그것이 저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젊은 사람은 역시 지혜가 부족하군! 노예의 재산은 전부 주인에게 속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자네 아버님은 하나만은 자네에게 주지 않았는가? 자네는 노예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야! 이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 현명한 생각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그제야 겨우 깨닫고 랍비가 말해 주는 대로하고, 나중에 노예를 해방시켜 주었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십니다. 그것을 믿고 소망을 가지세요!
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기에서 건져 주십니다.
15, 16절에서 애굽 왕 바로의 히브리 남아 살해 명령은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실로 위기 중의 위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바로의 히브리 남아 살해 명령은 곧 이스라엘 자손의 씨를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멸망 받도록 내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두 히브리 산파를 들어 이스라엘 자손을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17).
이것은 마치 페르시아 시대에 유대인을 말살시키려는 하만의 간계로부터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신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에 3-8장).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그들을 해하려는 악한 세력의 계교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지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3)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즉 여러분! 아무리 위험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염려하거나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해 주십니다.
시 37:28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 우리의 방패 되시는 하나님
여섯 살 난 사내아이가 어머니가 양파의 껍질 벗기는 것을 보며 서 있었습니다.
"엄마, 그거 종이예요?"
"아니다. 이것은 양파를 보호하기 위해있는 껍질이야, 킴. 자, 여기에 우리가 쓰는 부분이 있지!"
어머니는 먹음직한 양파 속을 보여 주었습니다.
"모든 물건에는 다 그것을 보호하는 껍질이 있지. 우리 인간에게도 그런 껍질이 있거든!"
어머니가 인간의 피부가 그런 것이라는 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려고 했을 때, 아들은 눈을 크게 뜨며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말했습니다.
"나도 알아요!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위기에서도 건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호 껍질이 있습니다. 믿으세요!
⊙ 결론(決論)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랄한 바로 왕의 학대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사랑으로 돌보셨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또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어떻게 돌보시고 계십니까? 과연 그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해하려는 악한 자의 간계를 폐하십니다.
2. 하나님은 악한 자의 계교까지도 그의 백성을 위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십니다.
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기에서 건져 주십니다. 우리는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 1 : 15 - 22
벌 받지 않는 거짓말
서 론
애굽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 요셉이 은혜를 잊어먹은 애굽의 통치자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번성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는 수단으로 산파를 시켜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히브리 산파는 신앙 양심상 적도 아닌 순수한 양민을 죽일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살려주고 애굽왕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1. 신앙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5-16 "애굽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산파들은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맡았습니다. 산파도 먹고 살기 위한 직업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신앙 양심 및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죄를 범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아니하고 자기 직무를 유기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로 자기 양심을 위로하였습니다.
2.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7-19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하였습니다.
이는 분명히 거짓말입니다. 진실과 반대되는 것이 거짓말인데 지금 산파들은 자기들이 행한 일과는 정반대로 말을 하고 있는 자체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과 유익을 위하여 남자아이를 살려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살인을 할 수 없어서 살려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즉 거짓말하는 것보다 살인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무서웠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아실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음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하였습니다. 거짓말은 분명히 했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은 거짓말 자체가 복을 받은 것이 아니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야기처럼 놀부와 흥부는 같이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었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제비의 다리를 고치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시겠지 하는 양심적인 면에서 신전의식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 론
요 1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하였습니다.
거짓말이 분명히 죄는 죄자만 벌받지 아니하는 거짓말도 있습니다.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도 거짓말을 했지만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었고 오히려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진실이 거짓말 보다 해를 끼칠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의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하니님 앞에서 신앙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삼가 조심해야지 본문의 말씀을 약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라합이나 산파들의 거짓말은 잘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옥 갈 만한 죄라고도 할 수 없고 다만 인간의 연약성과 불완전성에서 나타난 약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거짓말은 상인이 본전에 판다는 말이나 노인이 죽고싶다는 말과 처녀가 시집가지 않겠다는 거짓말과는 다른 것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끝으로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원문보기 글쓴이: 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