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이탈리아인 컬럼버스는 유럽 각국의 왕들을 만나서 인도를 발견하겠다면서 협상을 했으나 결국은 에스파니아(스페인) 이사벨여왕의 도움으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향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나서 컬럼버스의 선단은 인도로 가지 못하고 카리브해의 바하마제도에 도착을 한다.
컬럼버스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을 했으며 그곳의 사람들을 인도 사람이라고 알았으며, 그후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컬럼버스가 바하마 제도를 발견한 순간이, 바로 자본주의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사벨 여왕은 처음으로 인도를 발견한 사람은 평생 동안 매년 금화 1만개를 준다고 약속을 했다.
처음으로 바하마 제도를 발견한 사람은 선원 로드리게였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금화의 욕심으로 로드리게를 죽이고 자신이 최초의 인도 발견자가 되었다.
컬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아메리카가 인도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유럽보다 인도를 먼저 발견한 것은, 명나라 영락제 시대의 정화의 선단이었다.
정화는 포로 잡힌 이슬람교도로 거세당한 환관이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번의 대원정을 떠났다.
대원정은 각국의 조공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인류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공식적인 인물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다.
그러나 과연 이 통념은 옳은 것일까?
정화의 선단은 마젤란보다 120여 년 앞서 세계 일주를 했고, 바스코 다가마보다 90여 년 앞서 인도양을 발견했으며, 콜럼버스보다 80여 년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면 믿어지는가?
600여 년 전 살았던 명나라의 환관 정화, 그는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또 다른 대항해 시대의 주인공이다.
정화가 이끈 원정대의 항해는 거리만 185,000km에 이른다.
원정대의 규모는 약 2만 7천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군 및 승조원 뿐만 아니라 역관, 의원, 천문가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함대는 총 60여척 (또는 240~300여척) 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컬럼버스의 선단은 산타마리아호, 핀토호, 니나호 세 척 뿐이었다.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며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터잡은 신생 독립국가 미국은 자신들의 건국 서사시를 마련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럼버스의 항해 관련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정치적으로도 수도를 컬럼비아 구로 명명한다든지,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이 국경일로 정해져 있는 등 아직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독립국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침략자, 학살자였고, 그 인성과 능력 또한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히 저열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 사회 정의 운동의 붐을 타고 원주민 중심의 아메리카사 인식이 보급된 뒤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나빠진 부분도 있다.
미국 내 오리건,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몇몇의 주에서는 콜롬버스의 날 명칭 대신에 원주민의 날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는 2020년 콜럼버스 조각상 2개를 철거했고, 코네티컷에서는 콜럼버스 석상의 머리 부분이 잘려 사라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