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43
3월28일[사순 제5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jM-cbUVHMo (김여욱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란 존재는 대체 누구인지? 내가 왜 사는 것인지?>
우리가 한 인간 존재로서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깨우쳐야 할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이해입니다. ‘나란 존재는 대체 누구인지? 내가 왜 사는 것인지? 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동시에 나의 근원은 어디인지? 내 삶의 종착지는 또 어디인지?’
자신의 신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지닌 몇몇 몰지각한 리더들로 인해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숱한 고초를 겪어왔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또한 스스로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나서야 될 것인지 아닌지 전혀 분위기 파악 안 되는 ‘무뇌인간’(無腦人間)들의 모습을 보며 크게 안타까워합니다. 본인들 때문에 지금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고,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고 있는데...
이 시대, 특히 대한민국 땅에서 리더들이 지녀야 할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 고민해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들이 손에 쥐게 될 권위나 권한은 잠시 하늘로부터, 그리고 국민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겸손한 신원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리더들은 주인인 국민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종이요 봉사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국민의 얼굴에 가득한 수심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환한 웃음꽃을 피우게 만드는 사람, 행복지수를 한껏 끌어 올려줄 사람이 우리들의 리더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우리가 견뎌왔던 리더들은 어떠했습니까? 일단 많은 경우 자신들이 차지한 자리에 대해 크게 잘 못 이해했습니다. 스스로를 최고권위자,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제왕, 말 한마디면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천상천하유아독존 같은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섬김과 봉사는 철저하게 뒷전이었습니다. 특권의식 속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천문학적 금액의 부정한 재산을 원 없이 축척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서민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담 안에서 아부꾼들과 궁녀들, 내시들 사이에 둘러싸여 화려한 궁중 생활을 만끽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 참담한 우리나라의 현실인 것입니다.
정체성이란 양날의 검 같습니다. 신원의식이란 마치 날이 잘 선 번뜩이는 주방용 식칼과도 같습니다. 식칼은 어떻습니까? 잘 사용하면 주방 안에서 첫 번째 가는 이기(利器)입니다. 그러나 어떨 때 잘못 사용될 때 즉시 흉기(凶器)로 돌변합니다.
리더의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와 직분을 하느님께서 주신 봉사의 도구로 여길 때, 그 리더는 백성들을 위한 고마운 도구, 이기(利器)가 되는 것입니다. 그를 인해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고, 그로 인해 안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리더가 자신의 신원을 망각할 때, 그는 존재 자체로 백성들을 위협하고 궁지로 몰고 가는 흉기(凶器)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리더들이 겸손한 신원의식으로 재무장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인 동시에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들, 결국 아래에서 온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위로부터 오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 손을 잡으시고 위쪽 세계로 초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복음 8장 23~24절)
우리 인간 존재란 주님 자비에 힘입지 않고서는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니 리더들은 당연히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동시에 백성들 두려워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JTtAwzezcc
++++++++++++++++++
<내가 누구인지는 잠들기 직전, 이 한마디로 드러난다>
일본군 성노예로 8년을 살다가 일본의 말도 안 되는 발뺌을 보고는 제일 먼저 당신이 위안부였다고 선언하며 나서신 ‘김복동’ 할머니가 계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평생을 ‘피해자’로 살다가 ‘인권운동가’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당신의 삶에 후회가 없으신 것입니다.
처음 위안부임을 누구에게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하고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이유를 말할 수 없었던 그 가당치도 않은 부끄러움은 오로지 당신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런 피해자라는 신분에만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과 같이 피해를 본 이들이 아무런 보상과 사과를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고 일본은 위안부나 강제 집용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자의로 한 것이라는 망언을 내놓고 있었고 일본 젊은이들은 전쟁으로 우리나라에 피해를 준 사례가 하나도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제 피해자라는 신분을 넘어서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더는 힘이 없어, 또 침략받게 만들지 않으려고 장학 재단을 세우고 거대한 세력과 투쟁을 하였습니다.
이분들처럼 어떠한 소명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들은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 나라에서까지 일본이 화해하자고 한 것을 사과한 것이라 여기고 직접적인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사과도 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단지 돈만을 원한 것처럼 돈을 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처리해버립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돌아가시며 “일본 놈들 해도 너무 하네!”라고 하셨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라도 끝까지 사과받아내려고 한 소명을 가지고 사셨던 김복동 할머니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인권운동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는 우리가 당신을 십자가에 들어올린 다음에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해자라고 그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야 그분들이 피해자가 아닌 인권을 위해 싸우신 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끝까지 소명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소명’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든 누구의 소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자녀는 사탄의 소명을, 하느님 자녀는 하느님 소명을 실천합니다. 사탄의 자녀 소명은 거짓으로 하느님과 세상과 자신을 속이려 하며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합니다. 하느님 자녀는 진리를 추구하며 하느님의 소명인 ‘사랑’을 실천합니다. 사랑은 나의 피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희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우리를 하느님이라 믿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십자가의 순명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의 소명을 당신 성령을 통해 부활로 확증해주십니다. 그 이전에도 예수님 스스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증하시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십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만약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하루 종일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은 십자가의 삶을 살고 그 누군가가 편안히 쉬는 모습을 보며 기쁨에 잠겨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부모’일 가능성이 큽니다. 부모는 자신의 소명인 십자가의 삶을 다 살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습니다.
그 뿌듯한 마음으로 “다 이루었다”라며 잠자리에 듭니다. 기쁘게 내어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거짓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우리도 소명으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되새깁시다. 마지막 때 하신 이 한 말씀이 그분을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토론토에서 신문홍보를 하면서 사제관에 머물렀습니다. 사제관에는 ‘삼국지’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읽어보았는데 그때는 요약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10권짜리 삼국지를 읽었습니다. 유비가 얼마나 후덕한 사람인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유비는 늦가을에 추운 개울을 건너야 했습니다. 개울을 다 건넜는데 개울 반대편에서 한 노인이 유비를 불렀습니다. 노인의 이야기는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힘이 없으니 유비에게 와서 업고 건너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비는 노인의 말을 듣고 이왕 몸이 젖었으니 다시 건너가서 노인을 업고 오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 건너니 물이 더 차가웠습니다. 겨우 노인을 모시고 왔는데 노인이 급하게 건너오느라고 짐 보따리를 놓고 왔다고 합니다. 유비에게 개울을 건너 짐 보따리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유비는 마음이 좀 상했는데 이번에는 노인이 다시 자신을 업고 가라고 합니다. 유비는 노인이 장난치는 것 같아서 화가 났지만 이왕 좋은 일을 했으니 다시 노인을 업고 개울을 건넜습니다. 노인은 유비의 후덕함을 칭찬하면서 앞으로 그런 후덕함을 보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유비에게 그런 후덕함이 있었기에 관우, 장비, 조자룡, 제갈공명과 같은 유능한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조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조조는 도망가는 길에 어느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문틈에서 조조는 노인이 칼을 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노인은 아내에게 ‘어떻게 죽일까를 묻습니다.’ 조조는 노인이 잠이든 자기를 몰래 죽이려한다는 오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먼저 노인 부부를 죽였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죽이려고 했던 것은 조조에게 대접할 닭이었습니다. 조조는 다음 날에 노인의 가족까지 모두 죽이고 도망갔습니다. 자신이 노부부를 죽인 것을 알고 가족들이 복수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조조의 성격은 ‘적벽대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조조는 제갈공명의 계략에 속아 유능한 장군들을 즉결처분하였습니다. 그 장군들은 강의 흐름을 잘 알고, 함선을 잘 다루는 장군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조조는 자신이 제갈공명의 계략에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유능한 장군을 없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과감한 판단력과 전략으로 조조는 나라를 세웠지만 후덕함에는 유비를 결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유비와 조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햇님과 바람’의 동화가 생각났습니다. 햇님과 바람은 길을 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합니다. 바람은 힘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옷을 더 단단하게 여미면서 길을 갔습니다. 햇님은 따뜻함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 했습니다. 나그네는 옷을 벗어들고 길을 갔습니다. 조조의 군대가 침략했을 때입니다. 장군들은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일단 후일을 도모하자고 하였지만, 유비는 백성들을 모두 안전하게 대피하게 하였습니다. 백성이 없는 나라는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조는 특유의 냉철함과 판단력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백성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사람을 판단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바람으로 사람들의 옷을 벗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햇빛으로 사람들을 품어주셨습니다. 죄인이라고 여겼던 세리, 창녀, 이방인, 중풍병자는 모두 예수님의 따뜻한 햇볕을 받아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오늘 독서는 광야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이집트에서 지내던 때를 그리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이라는 바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였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느님께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 ‘구리뱀’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구리뱀이라는 햇빛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과 용기를 얻어서 거친 광야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바람으로는 결코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건널 수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이라는 바람으로는 결코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건널 수 없습니다. 이해와 용서라는 햇빛을 바라보면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나눔과 희생이라는 햇빛을 바라보면 사순시기라는 광야를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21-30: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21절) 그분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박해하려고 찾았으며,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그분을 찾았다. 바리사이들은 악의에 차서 잘못된 방식으로 그분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24절) 하신 것이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된 의도로 찾는 이들에게 일어난다. 예수님은 악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시는 데 이들은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21절) 하셨다. 자기 죄 속에서 죽는 이는, 진리에 관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의와 지혜를 믿는 이는 불의를 행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25절) 하고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25절) 이 말씀은 그들은 그분의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처음부터”라는 말씀은 당신 자신이 이미 “한 처음”(요한 1,1)이신 말씀이심을 나타낸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미래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당신도 참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참되신 분의 아들로서 당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이야기하셨으나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27절) 한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28절)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이 수난을 통하여 들어 올려지기 전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들어 올려짐’은 십자가로 들어 올려짐이며 이 들어 올려짐은 그분의 치욕이었다. 이 수난은 이 말씀을 들은 이들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으나 언제나 함께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이 가신 곳이면 어디나 계시다. 아드님을 버려두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29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경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기회는 부여되어 있지만,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다시 그 은총의 때를 맞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깨어있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때를 잘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는 결단을 내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단을 내릴 기회가 주어져 있으므로 거기에 관한 결과도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책임 있는 선택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앎과 알지 못함, 믿음과 믿지 못함. 요한 복음은 이 주제를 빛과 어둠의 대조로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상반된 주제 사이에는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던지는 질문처럼 예수님의 신원이 자리합니다. “당신이 누구요?” 요한 복음의 내용은 마치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사실 요한 복음의 시작도 이렇습니다.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 곧 그리스도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부터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다인들은 여전히 예수님께 누구이신지 묻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요한 20,31)을 다양한 표징과 사건으로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하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파견으로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보내신 분의 뜻에 따라 충실히 모든 일을 수행하시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뜻을 가르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오셨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도록 파견되신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마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위로, 하늘로,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실 구원 업적의 절정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 그분을 믿으라고 요청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
[장른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의 '존재'와 '행위'>의 골자가 모두 드러납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복음 8장 24절)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 엄청난 자기 계시의 발언을 하십니다. "내가 나"라는 말씀은 오래 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시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모세에게 당신을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드러내셨던 바로 그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하느님과 한 분이신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이름을 통해 당신이 하느님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이스라엘의 구원이고 주인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복음 8장 25절) 예수님을 두고 왈가불가하며 좀처럼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던 유다인들이 이 말씀에 담이 서늘해진 듯, 곧바로 그분께 질문을 던집니다. 유다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역사 안에 남기신 이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해 오셨던 바를 다시 묻는 이유는, 그동안 그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탓이겠지요. 그리고 이 무지와 회피는 그들의 때가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 것이다."(요한 복음 8장 28절)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하실 행위를 언급하십니다. "들어 올려지심"은 광야에서 모세와 주님께 대들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을 구해 준 구리뱀의 표상을 소환합니다.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기 21장 8절)
제1독서는 이 사건을 다루며 구체적으로 구리 뱀이 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합니다. "물린 자"는 뱀으로 인해 상해를 입고 죽어가는 이들입니다. 원죄의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 죄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 갇힌 이들, 악의 독소로 영혼의 생기를 상실한 이들이 뱀에 물린 이들입니다.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비록 죄의 상처로 죽음의 올가미에 걸려든 이들이라도 처방을 믿고 구리 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바라봄"은 절실한 생의 욕구와 믿음, 희망의 표현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는 미사 초입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지요.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입당송)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와 구원 행위에 대해 명확한 답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한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 나무에 높이 달리시어 구원을 보증해 주신 어린양이십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행전 9장 5절) 유다인의 거친 질문을 가다듬어 우리의 목소리로 다시 주님께 여쭈어봅니다. 그분께서 여러 방식으로 당신이 누구시며 왜 우리와 함께하시는지를 누차 밝히시는데, 마냥 의뭉하게 모르는 체하며 주님과 거리두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지요. 이제는 정말로 진지하게 여쭙고 답을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고백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어떻게 구원의 업적을 이루어가고 계시는지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존재와 이름이 하나이신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며 그분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듯, 우리에게도 그러하심을 생생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있는 나"이신 주님과 함께 머무르며 사랑으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고자 나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예수회 이재욱 요한세례자신부님]
사무실에서 한참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어보세요. 다른 시각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줍니다.”
거꾸로 읽어보니 ‘다들 힘내!’가 되었다. 웃음이 나왔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갖가지 일이 겹쳐 정신없이 돌아가는 요즘에 바쁘다는 말도 못하고 피곤함을 느끼던 차에 한 친구가 보내온 작은 글 하나가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하고 힘을 솟게 하는 것 같다.
‘그래, 시각을 달리하면 세상이 달라지지!’ 새삼 살아가는 이 삶이 얼마나 축복인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니 어떤 충만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확신에 찬 증언을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디서 오셨고, 어디로 갈 것이며, 또 어떻게 당신의 삶이 기쁨 으로 충만하신지를 알려주신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왔고, 그분께 돌아갈 것이며, 그분 안에 함께 계시고, 그분의 기쁨 속에 영원히 사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 기쁨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사랑이 충만한 어버이의 품 안에 있는 아이는 안전을 느끼면서 두려움을 극복한다.
두려움이란 자기 방어를 위한 본능이다. 그리고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캄캄한 길을 갈 때 겁이 나는 것은 그곳에 나의 인식의 빛이 비치지 못하고,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이 더이상 존재하지 못한다는 체험이 없기에,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신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느님 안에 사시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기에 우리가 가 보지 않은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신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삶이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도 잘 아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다들 힘내! 내가 있잖아.”
=====================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잊지 말자고 다짐하였던 어떤 분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을 때 찾아가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분과 함께하였던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의 목소리, 함께 나누었던 대화, 호탕한 웃음소리, 호기심 어린 눈빛. 우연히 듣게 된 그 이름 때문에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추억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그 이름으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여쭙니다. “당신이 누구요?”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나는 나자렛 사람 예수요.’라고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임을.” 이 대답은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들었던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장 14절). ‘있는 나,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이름을 깨닫는 사건은 오늘 독서의 ‘불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불 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기둥에 구리 뱀을 달아 그것을 쳐다보면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나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름을 듣고 누군가는 하느님과의 추억과 관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 이 이름을 듣고 어떤 추억을 떠올립니까?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삶의 이야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고 우리는 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만약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이름을 잊고 살았다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불러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
국어 공부를 잘한 사람은 ‘주제파악’을 할 줄 알고, 산수 공부를 잘한 사람은 ‘분수’를 알며, 지리 공부를 잘한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고 말합니다. 주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이,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행함에 있어서 당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고히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버림받은 이들을 우선 선택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며 명의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가 명확해졌습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갖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난 것이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없이 행복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왕이면 주님과 더불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주님께 희망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 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의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습니다. 램프를 쓱쓱 문지르니 요정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입니다.” 그 젊은이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돈도 갖고 싶고, 예쁜 여자도 만나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한참을 망설이며 생각했습니다. 머리가 좋아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 좋은 머리를 달라고 할까? 아니야 돈을 달라고 하자. 돈이 많으면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한 가지를 청해야 하니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러다 생각했던 것을 한꺼번에 램프의 요정에게 말했습니다. “머리, 돈, 여자!”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젊은이는 ‘머리 돈 여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잠시 뒤, 저를 보며 직원이 “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물건을 과도하게 높이는 말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왜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며 화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표현임을 알면서도 이상한 존댓말을 쓴다고 하더군요. ‘손님은 왕’이니까 손님이 원하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마트에 가니, 코로나 규제가 완화되면서 다시 시식 코너가 생겼습니다. 이 코너의 직원이 제게 “한 번 드셔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역시 과도한 높임말입니다. 서술어가 둘 이상 이어질 때는 맨 마지막 서술어만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들어보세요. 먹어보세요.’가 맞습니다.
다른 이에게 존중받기를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어에 맞지 않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존중받아야만 해야 할까요? 어린이들은 때로 어른에게 반말로 말합니다. 아직 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어른은 화내지 않습니다. 어려서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화내며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쩌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존중받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존중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진상, 꼰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겉으로만 존중받는 삶이 아닌 진정으로 존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겸손한 삶이 요구됩니다. 남이 알아주는 삶이 아닌 내가 알아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겸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굳게 믿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가지고 있는 교만의 마음으로 인해,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놓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주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서, 의심과 불신으로 주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겸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또 일상 삶 안에서 충분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겸손의 덕을 갖추고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죄 속에 죽는 삶이 아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과 함께>
요한 8,21-30 (예수님의 신원)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나에게 오시니
나 있는 제자리에서도
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있었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서 가시니
나 있는 제자리에서는
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없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그만큼
그분 가신 방향으로 감으로써만
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있답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
죽었다가 사는 법을 얘기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이지만 오늘 주제를 약간 빗겨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독서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서 잠재우시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이 짧은 얘기에 불평불만의 원인과 처방이 있습니다. 우선 불평불만의 원인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양식이 있는데 그 양식이 그들에게 보잘것없어 보이고, 심지어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원하는 양식이 없고 충분한 물이 없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불만이 보통 그렇습니다. 이것이 있는데 저것을 원하니 이것이 불만이고, 이만큼 있는데 저만큼 있기를 바라니 이만큼이 불만이지요.
있는 것은 만족치 않고 없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의 문제이고, 이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욕심 곧 ‘더’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또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고 불평까지 할 경우, 이에 직방인 처방이 바로 극약처방이고 최악 처방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의 요구와 불평을 들어주신 하느님께서 불평이 이렇게 계속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으시고 이번에는 죽음이라는 최악을 극약처방 하십니다.
죽음이라는 최악을 생각하면 죽음만 아니어도 다 악이 아니고 선이 되지요.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는 만 원도 큰돈인 것과 같습니다.
최악이란 최선의 반대이며 선은 하나도 없고 악뿐인 상탭니다. 죽게 되면 사실 존재 자체가 사라질 판이니, 욕망은 사치이고 그래서 욕망도 사라지겠지요.
그러므로 행복하려면 우리는 스스로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의해 최악을 맞이하고 하느님께 간청해 살 수 있는 처방을 겨우 얻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 행복하려면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욕망을 내려놓고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렇게 합시다. 사랑에는 최선을 다하고, 욕망에는 최악을 각오합시다.
이렇게 하여 불평불만은 잠재우고 행복을 요즘 봄날처럼 꽃피웁시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旅程), 믿음의 전사(戰士), 믿음의 훈련(訓鍊)>
-무지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4)
어제 저녁 식사후 세기중 제가 한말에 제가 공감했습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분들은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형제에게 말하고 제 주변을 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본질은 전쟁이죠”, 얼마전 모 유명정치인의 짧은 언급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방식으로 말하면 "믿음의 전쟁"입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믿음의 훈련-무지에 대한 답은 믿음이다-”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빼버리면 허무와 무의미 자체일 것입니다.
삶과 믿음입니다. 삶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여정인 것입니다. 불신불립(不信不立)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안정과 평화가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합니다. 믿음이 없을 때 원망, 절망, 실망이지만 믿음이 좋으면 감사, 감동, 감탄입니다.
인간 품위의 기초가 믿음입니다. 잘 나갈 때는 모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고난이 계속될 때 비로소 믿음은 진가를 발휘합니다. 갑작스런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성장은 없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여 영원한 현역의 믿음의 전사로서 믿음의 훈련에 충실할 때 비로소 믿음의 성장에 성숙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음의 수준은 여전히 초보자 수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믿음의 최종 시험이 죽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의연히, 믿음으로, 편안히 선종하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극히 드물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 훈련과 공부가 실천이 믿음의 훈련, 믿음의 공부, 믿음의 실천입니다. 치매에 대한 결정적 처방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매일 목숨을 걸고 쓰는 강론은 일종의 믿음의 훈련, 믿음의 공부, 믿음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노년 인생 품위의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밥의 욕망만 있고 인간 품위의 기초인 믿음이 없으면 말그대로 노욕, 노추의 삶일 것이다. 날로 성장 성숙해가야할 믿음이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정말 돈 유산 보다 물려 줘야 할 값진 유산이 믿음의 유산이니다. 세상에 믿음의 유산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믿음도 보고 배운다. 부모로부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는 믿음이다. 믿음의 교사로 부모를 능가는 사람은 없다."
“영적탄력이 좋아야 영적 부요의 삶이다. 바로 믿음의 탄력과 함께 가는 영적탄력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믿음이, 삶이 영적탄력의 요체이다.”
피정지도시 자주 강조하는 내용들입니다. 어제 써놓은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소망하며 쓴 “내 믿음의 품”이란 자작고백시도 생각납니다.
“한없이 넓고 깊은 그윽하고 아늑한 품이 하느님을 닮았다.
정주 수도원 자연의 품이 바로 그러하다.
수도공동체의 품이 그러하다.
모두를 받아들여
모두를 품에 안은 환대의 품
한없는 침묵의 품, 인내의 품, 사랑의 품, 생명의 품이구나.
아무도 오는 이들 막지 않고, 가는 이들 잡지 않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초연하고 넉넉한 품,
언제 이에 도달하려나
내 믿음의 품은.”
어제 점심중 식탁을 보니 3분의 상주 손님에 2분의 새 손님의 방문으로 무려 5명의 손님이 함께 하는 수도공동체 믿음의 품이 참 넓고 깊구나 감동했습니다. 정주 수도원에 빛나는 환대 영성은 베네딕도 수도회의 자랑일 것입니다. 정주와 환대 역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믿음의 빛, 믿음의 힘입니다. 불신의 어둠, 불신의 약함입니다. 믿음의 빛은 하느님의 빛이고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만이 인간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본처방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말씀의 대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매일미사책 시작 말마디가 이를 입증합니다. 제1독서는 “그 무렵”으로, 복음은 “그때에”로 시작됩니다. 언제나 “그 무렵”, “그때에”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1독서 민수기 말씀중,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여정중 마음이 조급해져 하느님과 모세에 불평하는 믿음 약한 백성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뱀에 물려 죽자 즉시 중재자 믿음의 모세에게 간청하니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 주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불뱀에 물렸을 때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으니, 바로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과 백성의 중재자 모세가 예수님의 예표라면 구리뱀은 십자가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 예수님의 신원이 은혜롭게 계시됩니다. 두 대목이 우리의 믿음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이래서 예닮의 여정을 통해 위에서 오신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빛과 생명 속에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바로 “나는 나다”라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죄속에서 결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믿음만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위에서 온 존재인 주님과 함께 생명과 빛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여정중에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통한 예수님과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이 말씀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예수님을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라 고백하는 것이며,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이를 수 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회개의 표지이자 믿음의 표지요 희망의 표지이자 구원의 표지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바라볼 대상은 십자가의 예수님,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도 날로 성장 성숙해 가리라 믿습니다.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영혼은 날로 믿음의 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새로워 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믿음의 성장과 성숙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천상 선물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8,28)
<십자가를 바라보자!>
오늘 복음(요한8,21-30)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요한8,25) 하며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뒤에야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곧 '예수님이 메시아요 있는 나이신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뒤에, 더 정확히 말하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진실 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다.
"당신은 누구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예수님이 정말로 나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이신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시고, 모세를 통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여정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힘들다고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시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21,5)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들을 보내시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그래서 백성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살려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하고, 모세는 주님께 간청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중재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리십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21,8)
정성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우리도 다시 살아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pJ5b3vtTUA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닫을 것이다."(요한 8, 28)
예수님의
들어 올려진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십자가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십자가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신 따뜻하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신지에 대한
참혹한 무지(無知)를
아프게 만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무지까지
따뜻이
감싸줍니다.
우리를 끝내
저버리지 않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생명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실천 앞에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사람 쪽에
서 있는 지
죽이는 죽음 쪽에
서 있는 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지 않는 삶은
바로 죽음입니다.
생명의 길은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들어 올려진
십자가는
우리의
얇고 얇은
인격을 비춥니다.
너무도 빠르게
너무도 숩게
십자가의 빛을
잃어 갑니다.
다시 우리의
생활에
밝은 빛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들어 올려집니다.
들어 올려진
십자가가
생명의 길을
밝힙니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사랑의
신비이며
지혜의
완성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배우는 사랑이며
빛의 지혜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