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전 오늘 (8월 9일)은 한반도에 대단히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특히 스포츠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바로 88년전 그러니까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한반도의 손기정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손기정 선수의 친구인 남승룡선수는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특정 나라 선수가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 다시말해 3개 메달가운데 2개를 따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마라토너들은 달리고 또 달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그 억울함과 슬픔과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에서 그들이 유일하게 위안을 얻는 일은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세계 1차대전으로 몰락한 독일을 다시 세계속에 굳건하게 세우겠다는 히틀러의 야심으로 가득찬 대회였습니다. 당시 일본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세계 제패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스포츠에서도 타국들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주기위해 각종 종목에서 인재발굴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마라톤에서만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당시 각종 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는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를 제외시킬 수 없었습니다. 일본 언론의 질타속에 손기정 남승룡 선수는 올림픽에 참가해 당당히 금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특히 남승룡 선수는 막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는 초인적인 질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손기정 선수는 시상식에서 히틀러에게 받은 월계수 가지로 일장기를 가렸다고 합니다.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조국은 일시적으로 없어졌지만 그의 핏속에 흐르는 한반도인의 자긍심과 용기는 대단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상식의 사진속에는 손기정과 남승룡선수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손기정선수는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으며 남승룡선수는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고자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 할 날에 나라 잃은 슬픔속에 잠겨있는 두 청년의 모습에서 한국인들은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한민족의 정서를 잘 아는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 가슴에 걸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강압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언론인들의 참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다릅니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으로 무기한 정간을 당합니다.
그로부터 88년이 지난 2024년 8월 9일 현재 한국 스포츠 상황은 어떻습니까. 더 나아졌습니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프랑스 파리에서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리는 정말 한국 스포츠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변하지 않고 퇴보하는 분야는 정치와 스포츠협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의 스포츠 자질은 엄청나게 향상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때 못 먹고 못 입던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이제 신체적인 면에서도 다른 선진국이나 서구국가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좋은 환경에서 익힌 기술 수준도 상당합니다. 한국의 스포츠 선수들은 이제 모든 종목에서 세계 상위권을 차지 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체격도 좋고 기술력도 향상되니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오히려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포츠 선수들을 도우면서 그들의 수준을 향상해야하는 스포츠 협회는 그런 추세에 거의 정반대로 역행하는 모습입니다. 뭔가 협회가 잘나서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둔다는 대단한 착각속에 살고 있는 듯 합니다. 파벌과 혈연 학연으로 점철된 협회의 모습은 일부 몇몇 협회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안입니다. 협회 후원금 등으로 인해 재벌가나 유명인들이 협회장을 맡는 폐단속에 협회는 망가졌습니다. 특정 종목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큰 관심도 없는 인물들이 대거 협회장을 맡으면서 생기는 잡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협회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임원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입지확보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너서클을 형성하다보니 잡음과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결국 어린 선수들이 남은 자신들의 선수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폭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스포츠 어른들이 제대로 관리를 해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난 뒤 생긴 현상입니다. 이제 기댈 것은 자신들 밖에 없다는 그 절박함이 다소 무례하다는 일부의 비판속에서도 할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없는 상황속에서도 세계의 최상위권 마라토너들과 겨루어 당당히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88년전 오늘 한국 스포츠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매우 차갑습니다. 별 도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 하나를 의지한 채 먼나라 독일 베를린에서 엄청난 쾌거를 이룬 지 88년이 지났지만 한국 스포츠를 구성하는 협회 등 주요단체의 모습은 한탄스럽기만 합니다. 뒤늦게 정부가 심각성을 인지하고 감사와 조사에 나섰다고 하니 얼마나 변할 수 있을 지 지켜볼 일입니다. 하지만 학연 혈연 지연 등 요상한 인연을 내세우면서 전문적 지식없이 당장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그런 분위기속에서는 한국 스포츠계의 발전과 개혁을 기대하기는 대단히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무척 슬프게도 말입니다.
2024년 8월 9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