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는 성과 폭력으로 얼룩진 선정적 장면으로 이뤄졌다는 비난의 소리가 높다.말초적인 자극만을 부추기는 추세를 비판하는 말이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는 이런 것들에 깊이 침투돼 있다.
폭력으로 따진다면 우리 주변은 전쟁과 대학살로 점철되었다.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유태인 학살,일본군의 포로 생체실험,르완다와 유고의 내전에서 시작해 광주사건에서의 참혹한 살상,정보부의 잔인한 고문에 이르기까지 폭력은 우리 이웃에 널려있다.
○인간내부엔 악의 속성이
폭력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에서,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점에서 절망감은 더해간다.자신의 이익이나 상부로부터의 강압적 지시에 의한 행위로 폭력을 설명할 수만은 없다.근원적으로 인간 내부에는 암흑의 세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인간에게는 누구나 생명의 본능과 함께 자기 파멸적 죽음의 본능이 공존한다고 프로이트도 말하지 않았는가.
노벨문학상 작가로 잘 알려진 윌리엄 골딩은 ‘파리대왕’(1954년)에서 인간본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암흑의 존재,즉 악의 존재를 파헤쳤다.이제까지 역사를 이끌어온 주된 원동력으로 믿었던 이성과 합리성 또는 상식과 윤리의 원리를 송두리째 뿌리뽑는 거대한 악의 위력을 냉정하게 해부했다.
잔혹할 정도로 냉철하고 염세적인 골딩의 진단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짙게 내비친다.인간의 탄생이 에덴동산이 아닌 실락원에서 출발한다는 기독교적 원죄의식이 투영돼 있다.본래적으로 죄를 짊어진 인간존재는 필연적으로 악의 속성을 안고 있다는 인식이다.
○문명의 외피가 벗겨질때
작품 배경은 천국과 같은 남태평양의 외딴 무인도.열대과일이 풍요롭게 열려있는 평화로운 이 섬에 비행기 사고로 추락한 한 떼의 소년들만이 도착하는 인위적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된다.어른 세계와 분리돼 문명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어린 아이들이 홀로 자연과 조응하며 생존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학교 수업과 부모들의 간섭에서 벗어난 소년들은 해방감을 느끼며 해변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에 넋을 잃지만 당장 부닥치는 생존과 구출의 필요성으로 그들 나름대로 소박한 사회제도를 세운다.조그만 무리들 사이에는 영국 의회제도를 본받아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이 정해지고 지도자가 선출돼 규율과 질서가 확립된다.이러한 결실은 합리성,상식,책임감의 원리를 가르치는 교육을 받아온 소년들이 고립된 섬에서 재현한 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의 결실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허약하게 인간의 삶을 감싸고 있는지는 이 사회제도의 실행과정에서 명백해진다.제도가 도입되는 순간 질서와 함께 분열,권력투쟁이 동시에 자리잡는다.
개인의 질시와 증오감이 드러나며,힘의 논리를 주장하는 독재자의 선동에 굴복하는 군중심리가 작동하면서 무리는 둘로 나뉘고,소수는 다수에 내몰려 생명의 위험까지 직면하게 된다.이들의 싸움은 자연에까지 재해를 안겨줘 아름다운 섬은 온통 화재에 휩싸인다.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역설적이게도 섬 밖에서 핵전쟁을 벌이고 있는 추악한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반복하는 비극을 낳고 만다.
○폭력은 사악한 본성때문
순수한 어린이들이 합리성의 원리를 저버리고 살상과 폭력의 야수상태로 빠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작가는 인간본성의 내부에 메스를 가한다.제멋대로 놀던 소년들은 어둠이 찾아오자 모두 은근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숲속에 거대한 괴물이 살고 있다는 환상을 피워놓는다.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는 공포감의 환상은 합리적 사유를 정지시키고 엉뚱한 비합리적 돌출구를 찾아 내뻗을 수밖에 없다.형체없는 공포감과 적의감은 우연히 숲속에서 찾은 새끼 밴 암퇘지로 향해 이를 살육하고,피를 접한 소년들은 서로간에 적의감과 살해의 쾌감을 느끼는 타락성 사악성에 빠지고 만다.
슬기와 통찰력으로 상황의 올바른 사실을 알려주려던 외톨이 소년이 오히려 살해당하는 작품의 결말은 인간의 구원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순수하다고 믿는 어린이들 세계에서조차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발견할 때 미래 역사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골딩은 캐묻는다.갈수록 심화되는 폭력의 문화가 사회구조의 모순에 앞서 인간의 사악한 본성에서 출발한다면 합의와 합리성이 물결치는 시민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