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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린 두코전투(맹호 기갑연대 3대대)
장 태 순.
1966년 8월 8일, 9중대는 며칠 전, 밤에 적 척후병이 접근했던 것을 알고, 중대원 2/3가 매복을 나가게 되었다.
그 빈자리 경계 임무를 내가 속한 11중대 1소대가 파견 나가 하루 밤을 잤다.
9일 오전, 매복에서 귀대하는 9 중대원들이 지난밤에 내린 비로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귀대했다.
대열 중에 오음리 출발할 때, 우리들을 인솔했던 강세호 대위가, 신임 9 중대장으로 매복에서 귀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루 밤을 더 자느냐, 마느냐? 설왕설래하다 오후에 중대로 철수했다.
두 번째 근무자가 깊은 잠에 빠질 무렵 비상이 걸렸다.
"따 따 땅! 따! 따! 땅 피웅! 쾅! 쾅! 쾅! 비상! 비상!"
산천이 울리고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 청천벽력이었다. 소총소리, LMG, 대포소리, 혼란 속에서 '비상' 외치는 소리가 연거푸 났다.
어느새 선임병들은 번개같이 날쌔게 총과 탄띠를 챙겨 들고, 교통호로 뛰쳐나갔다, 나도 탄띠와 소총을 거머쥐고, AR 벙커로
가니 벌써 사수 이상병은 철조망을 향해 사격을 하고 있다. 철조망에 매설한 조명 지뢰들이 몽땅 터져 불야성을 이뤘다.
뒤이어 155mm, 105mm 포, 오늘 투입된 4.2 인치, 81mm 박격포들이 포문을 열고 불을 토해내 천지가 흔들린다.
'적들이 공격해 왔나?' 언제 적 총탄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 동안 사격을 해도 아군의 총소리만 요란할 뿐 철조망 밖의 반응이 없음을 느낄 때
"사격 그만! 각자 경계 철저히 하고 각 분대장들은 집합하라!"
소대장의 명령이다. 분대장들은 낮은 자세로 소대본부로 달려갔다.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 같다.
잠시 후 소대원을 전원 완전 군장하고 집합시키더니 서용원 소대장은 소대원들 앞에서 조용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여러분은 그동안 맹호 5호 작전을 경험했고, 크고 작은 작전과 매복을 통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은 종전 베트콩과 다른 정규군과의 교전이니 만큼, 대단한 각오로 나의 명령에 잘 따라 주기 바란다. 중간에 매복이 있을지 몰라, 두 명씩 2~3m 거리를 유지하고, 말은 절대 하지 말고 야간 정숙 보행규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조명이 뜨고 있으니까 나무 그늘을 잘 이용할 것, 신병들은 선배들의 뒤를 따르고 두려워 말라! 절대 대열 이탈하면 안 된다. 크고 작은 용무는 출발 전에 처리하도록, 우리 소대가 선발이고, 1분대 첨병이다. 어제 갔다가 오늘 철수한 길이니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맥주 한 캔씩 먹고 출발한다. 이상!"
소대장은 맥주 한 캔씩 주면서 어깨에 손을 대고 "자신 있나?" 주문했고 "자신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다짐들 했다. "전원 앞에 총! 총구 하늘로 향하고 격발! 앞에 총! 탄알 장진! 열쇠 풀어! 밤이니까 안전사고에 각별히 조심한다! 첨병 출발!"
소대장의 심각한 당부는 우리를 더 긴장시켰다. 첨병이 허리를 굽히고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처음부터 긴장되었던 몸이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가슴이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적들이 중간에 적은 병력이라도 매복병을 배치했다면, 우리는 혼비백산할 것이다. 전쟁만 치른 그들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고, 아군이 가장 염려하는 시나리오다. 평소에 무서움 없다고 장담했던 내가 갑자기 이렇게 떨릴 줄이야! 머리에서는 '무섭지 않다.' 하면서도 가슴이 떨리고 몸이 위축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파월된 지 열흘, 소대에 배치된 지 일주일 밖에 안된 신병이라 그럴 것이다. 신중을 기해 야간 정숙보행을 철저히 지키다 보니 3km 정도를 3시간여 동안 이동한 것이다. 가장 염려한 매복은 없었다.
우리 중대가 9중대를 볼 수 있는 능선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걷힐 무렵이었다.
잠시 후 조명탄 세례는 멈추고, VT신관이 요란하게 쏟아붓는다.
지형을 살펴보니 물은 없었지만 샛강이 길게 있었고, 70여 m 정도의 뚝이 곧게 뻗어 있었다. 그 뚝 너머로 개활지 한편에 9중대가 둥그렇게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가장 넓은 방향 정면으로 적들이 쳐들어 온 것이다.
뚝 쪽으로 공격했다면 아군은 더 방어하기 어려웠을 텐데, 적은 각본에 따른 것처럼 정면으로 질서 있게 공격을 한 것을 보면, 필시 적은 이곳 지형을 조금도 연구 안 하고, 무모한 공격을 한 것이다. 날이 밝자 포격은 멎었다.
"1소대와 2소대는 앞에 보이는 뚝에 붙어 적을 진압하고, 3소대는 후미를 경계한다." 뒤 따라오던 중대장이 명령했다. 1,2 소대원들은 동작 빠르게 좌우로 흩어져 뚝 위로 붙어 적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나도 뚝에 올라가 적을 향해 처음으로 사격을 해보니 몸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머리끝에서 무엇이 서서히 내려오는 느낌이 들더니 떨리던 가슴이 진정되고, 발아래로 더운 기운이 빠지면서 긴장이 확 풀려 버렸다.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개활지에 적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려있는데, 아직 생존한 적들이 최후 발악으로 사격을 가해왔다. "아이코! 위생병 나 어깨에 맞았다." 한 병사가 외치자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장 일병 위험해! 너는 뒤로 빠져! 신병이 겁도 없이 날뛰고 있어!" 분대장이 외치며 나를 뚝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나는 긴장이 풀리고 두려움도 없어져 다시 뚝으로 기어올라 9중대 쪽을 바라보니 탱크 2대가 천천히 전진해 온다. 앞에 오던 탱크에서 미군 병사가 웃옷을 벗은 채 뚜껑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이때 적이 불쑥 나타나더니 방망이 수류탄을 탱크를 향해 던졌다. 아군의 집중 사격을 받은 적은 양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쓰러졌다.
"사격 그만! 사격 정지!" 중대장 크게 외치자 총소리가 멎었고 잠시 정적이 감돌 때, 중대장은 미군과 영어로 대화한 다음 명령했다. "1소대는 앞에 있는 탱크 뒤를 따라가고, 2소대는 우측 탱크 뒤를 따라간다. 움직이는 적은 뒤퉁수 칠지 모르니까 사살하라!"
"3분대 첨병이다. 탱크 뒤를 따라가라!" 소대장 명령에 따라 우리 분대는 2열 종대로 개인 거리 확보, 허리를 굽히고 탱크 무한궤도 뒤를 따라가는데 탱크 옆에서 적이 방망이 수류탄을 굴렸다. "수류탄이다!" 외치며 분대원들은 재빠르게 엎어지며 사격을 했다. 탱크의 무한궤도가 적을 향해 지나가자 적은 흙 속에 묻혀 버렸다. 앞에 가던 분대원들은 무사했는데, 뒤에 오던 분대장이 팔에 파편을 맞고 후송 갔다.
우리 소대는 적 공격 루트를 찾기 위해 주변 수색 정찰을 하게 되었다. 어느 세월부터 자라온 나무들인가, 아름드리나무들이 쪽 곧게 서 있어 동서남북 구분이 안되는데 그나마 잔나무들이 없이 비어있어 정찰하기는 수월했다. 그리 더운 날씨도 아닌데 무거운 탄통 때문인가,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기동을 한 데다 이제는 상황도 끝나 긴장이 풀려 몸이 나른해진다.
철수하는 길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적들이 침입한 곳을 볼 수 있었다. 2 소대원들이 피 묻은 총기류와 무기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아직 운반하지 못한 61m 박격포가 5문이나 나란히 포진하고 있었으며, 뒷 쪽으로는 대전차 직사포가 있고, 개인호도 사람이 설만큼 깊이 팠고, 어둠 속에서 소리도 안 내고 배치와 호 작업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복장은 카키색 정규군 복장인데, 신발은 운동화와 샌들, 혹은 맨발이었다. 허리에 찼던 누런 주머니에서 터져 나와 흩어져 있는 쌀은 비상식량인가 보다.
시체 중에는 다리가 없는가 하면, 팔만 뒹글고 있고, 몸 전체가 벌집처럼 흉하게 뚫린 것도 있어,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저렇게 많은 시체를 보니 얼마나 많은 병력이었는지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겹겹이 쳐져 있던 철조망이, 실탄 세례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린 위를 걸어서, 9 중대 진지를 향하니 철조망 너머에 시체 두 구가 있고, LMG 벙커 바로 옆에 한 구의 시체가 있었으니 전투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9 중대원들은 상기된 얼굴로 진지를 정리하면서 간밤에 싸웠던 이야기들로 떠들썩했다.
LMG 벙커 앞까지 침투한 적을 조수가 사살했다니 얼마나 치열했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같이 출발, 9 중대로 간 조정복 소식이 궁금했으나, 소속을 몰라 안타깝기만 했다.
'사병 7명 전사, 부상 42명, 강세호 신임 중대장 전사.' 그 와중에 전해진 뉴스다. 오음리 출발할 때 우리를 인솔했던 강 대위, 월남땅을 밟은 지 10여 일 만에 전사하다니 너무 안타깝고 허무하다.
헬기는 분주하게 날아와 보급품을 내려놓고, 부상병들을 후송하기에 바쁘다. 벌써 소식을 들은 내외신 기자들이 군복 차림으로 사진 촬영하고, 지휘관들과 인터뷰하기에 바쁘다.
2 소대원들은 노획한 총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전류품 나르기에 바쁘다. 노획품 중에는 피가 빨갛게 묻어 있는 것도 많았다.
그동안 한 마리도 구경 못하던 까마귀 떼들이 노을이 진 석양 무렵, 하늘을 한 바퀴 배회하더니 포탄에 그을린 나무 가지마다 무리를 지어 새까맣게 모여들고 있다.
9 중대 진지도 우리 중대와 같이 취침호는 분대 단위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만큼 땅 밑을 파고, 위는 통나무로 깔은 다음 흙을 1m 정도 덮고, 갈대로 엮어 덮어 빗물이 새는 것을 차단하고 있는 철옹성이다. 안 쪽 튼튼하게 쳐 저 있던 철조망은 크레모아 폭발로 파괴되고 밖에 세 겹 철망은 사격을 맞아 주저앉았다. LMG 벙커와 AR 벙커 역시 튼튼하게 구축했으니 처음에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 고생의 보람으로 교전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선임들의 대한 고마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튿날도 시체 위에 까마귀들은 여전히 많았다. 우리 소대는 적 침투 루트를 찾으러 수색 정찰에 나섰다. 서서히 냄새를 풍기는 시체 무더기 사이를 지나 정글 입구에 도차하니, 도랑물이 있는데 풀잎을 밟은 흔적이 5m 정도 완전히 뭉개져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병력이 틀림없다. 조금 더 안으로 진입하자 대나무 숲이 하늘을 완전히 덮고 있었고, 좀 넓은 공간에서부터 4줄의 유선이 전방 쪽으로 설치된 것을 보면, 이곳이 지휘소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뒤에는 적들이 도망간 흔적이 뚜렷했으나 바로 앞이 캄보디아 국경선이니 더 이상 가지 말라는 소대장 명령에 주위만 살피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도랑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3소대 병력이 피 묻은 적들의 옷을 물에 횡구고 있었다. 전리품으로 고국에 보내기 위해서란다.
9 중대는 날마다 잔치였다. 언론사 인터뷰는 물론, 상급 부대장들 방문에는 선물 보따리를 받았다. 반면 11 중대는 소모한 탄약 보충, 파손된 교통호와 진지 보수, 경계 근무, 날마다 고달프고 너무 힘들었다.
8월 14일, 9 중대가 드디어 우리의 환송을 받으며 헬기를 타고 철수하고, 대대 본부 잔여병을 보충받아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9 중대원들은 연대 기간병은 물론 민간인까지 연도에 나와 대대적인 환영식을 하고, 전원 훈장 타고, 일계급 특진을 했다.
21일, 우리 중대원들은 탄약과 박격포들, 그리고 모든 집기들을 시누크로 보냈다. 취침호와 교통호를 대충 메운, 다음 우리 분대가 제일 마지막으로 헬기를 타고 풀레이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넘어갔다. 그 밤은 왜 그리 추웠는지,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이번 작전에서 배운 점은 적이 한국군을 너무 얕잡아 보아 대 실패를 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항상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아쉬운 점은 죽도록 고생한 11 중대원들, 사단장 표창이라도 주어 대작전에 참여한 자부심을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언론에 보도된 전과는 *확인 시체, 184명, 포로 6명, 추정사살 150여 명.
*노획 장비, 61m 박격포 5문, 중기관총 1정, 경기관총 10정.
*AK 자동소총, 43정 장총, 19정.
*대전차 유탄포, 12문.
*10여만 발의 탄약과 수많은 피복 장비.
*아군 피해, 전사 7명, 부상 42명.
ㅡ 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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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전투는
맹호의 파월 기록에 남을 전투일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오음리 파월 기념관에
사진으로 두코전투와
닌호아 사태가 있습니다.
공격은 9중대가 받았지만
마무리는 우리가 했습니다.
위 기록은 본대로 겪은대로
사실로 기록을 했습니다.
추천합니다.
두코 전투는 최고의 자랑입니다.
파월 되고 곧바로 격전지를 지원했는지 용기가 대단하군요. 적들을 통쾌하게 무찌른, 군 역사에
길이 남을 자랑스런 쾌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