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3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새 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굳어버린 종교인, 율법주의자 되지 않도록
주님 안에서 늘 새롭고 자유한 영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본문 주해)
1~4절 : 왕자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를 서술한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고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한다.
본문에서는 그 이유가 드러나지 않지만 두 사람은 공히 ‘여호와의 전쟁’을 이해했다. 즉 두 사람이 모두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여 전쟁에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는다.
더 높은 지위의 요나단의 주도하에 언약을 맺지만, 강제성을 띤 언약이 아니라 사랑을 기초한 언약이다. 그리고 요나단은 언약의 표징으로 자기가 입고 있는 겉옷을 다윗에게 벗어주고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 주었다. 이는 요나단이 왕자의 권리를 포기했음을 상징한다.
요나단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것은 삼상23:17에 나타난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5절 : 5절은 17장 55절부터 18장 4절까지의 요약문이다.
다윗은 사울이 어떤 임무를 맡겨도 잘 해냄으로 사울은 다윗을 군대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온 백성과 왕의 신하들도 그의 임명을 기뻐한 것이다.
6~9절 : 골리앗을 물리치고 블레셋에 대승한 군인들이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노래하며 춤추며 악기를 연주하면서 왕 사울을 환영한다.
그런데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며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노래한다. 당연히 다윗에게 돌아갈 칭송이지만 사울 왕은 이에 분노한다.
사울이 그렇게 얻고 싶어 했던 민심이 다윗에게로 돌아가자 사울이 분노한다. 소위 ‘사울 콤플렉스’이다.
이 사울 콤플렉스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름 부음을 사울은 몰랐지만, 사울은 그로부터 다윗을 ‘이 나라를 차지할 놈’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의 묵상)
다윗과 요나단 : 요나단이 다윗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사랑한다.
이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공히 여호와의 전쟁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수나 제대로 된 무기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인 것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바로 이 여호와의 전쟁을 이해하는 자들이다. 성도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알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과거에 성도의 교제를 오해했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마음이 맞아서,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물론 이런 모임도 서로를 알아가는 점으로 본다면 어느 정도 유익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세상 모임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이기에 자신들의 유익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과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간 후, 성도의 교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성도의 교제의 중심은 말씀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에 연합된 각자의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말해도 십자가 없다면 그와 같은 교제는 자기 자랑과 자기의만 가득한, 율법주의적인 것이 되기 십상이다.
여호와의 전쟁을 이해한 다윗과 요나단처럼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알고 교제할 수 있는 지체들,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된 자로서 매일의 말씀을 묵상한 것을 나눌 수 있는 지체들이 주위에 있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주님의 손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것을 서로 바라보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그것은 그저 끼리끼리 좋은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입을 모아 주님을 찬양하고 더욱 힘있게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교제가 되는 것이다.
다윗과 사울 : 나는 사울의 시기 질투를 이상히 여기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윗이 만만의 칭찬받아 마땅한 인물인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기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사울의 그 마음의 상태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해한다.
그런데 내가 이해한다고 그것이 합당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성경에는 사울의 그런 마음의 상태를 악령과 관련지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6:14, 18:10~11)
복음을 알고 생명으로 살아가니 이와 같은 시기와 질투가 다 사탄이 장악하여 통치하는 옛사람의 본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육체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이 옛사람의 본성이 죄의 세력에 의해 날마다 순간마다 조정받아 움직이는 것이다. 전에 나는 이같은 것을 몰랐기에 그저 본성대로 행했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이즈음은 그렇지 않다.
물론 여전히 내 안에는 시기 질투가 솟구칠 때가 있지만 이를 그대로 두고 삭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나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통치를 받는 자가 아님을 선포하며 주님의 십자가 보혈 아래로 달려간다.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이미 누리는, 가장 귀한 영생의 삶을 알게 하시는데, 무엇 하러 세상의 거짓 것, 허무한 것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며 시간을 낭비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에게 악령이 판을 치며 이 불쌍한 사울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니 너무도 안타깝다.
그러니 매일의 말씀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주관하여 주시길 원한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를 억지로 참아내는 자가 아니라,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평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의 더러운 기운이 아닌, 주님 주시는 기쁨을 뿜어내는 자 되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다윗과 요나단을 통해
성도의 진정한 교제를 확인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교제가 되게 하옵소서.
다윗과 사울을 통해
성령님의 역사를 간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헛된 세상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영생의 삶, 평강의 삶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