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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회장님의 카톡에서]
♧ 인간이 소유한 6가지 감옥(監獄)
● 심리학자 케이치프 노이드의 말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1. 첫 째 감옥은, "自己陶醉(자기도취)"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주변의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신 분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못 말리겠지요?
2. 둘 째 감옥은, "批判(비판)"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없습니다.
3. 셋 째 감옥은, "絶望(절망)"의 감옥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감옥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도 의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즉, 이들은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4. 넷 째 감옥은, "過去志向 (과거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현재가 더 좋은데 말이지요. 이렇게 과거에만 연연하다 보니, 현재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가 없지요.
5. 다섯 째 감옥은, "羨望(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도 있지요. 이 속담이 꼭 들어맞는 감옥입니다. 즉, 내 떡의 소중함을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6. 여섯 째 감옥은 "嫉妬(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의 정신과 육체를 다스릴 수 있을 때, 이러한 감옥들에서 탈출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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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짝사랑
임대 전전하던 '최빈국' 대사관 '한' 을 푼 것은 동포들의 피와 땀이었다.
무시받던 일본에서 교포 기부로 도쿄, 오사카에 번듯한 공관을 마련했다
.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 서갑호 등의 기여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5월의 일본 도쿄, 대한민국 공사가 오사카의 한 기업인을 찾아와 읍소한다. 도쿄 공사관이 작은 빌딩 한 층에 월세로 들어가 있는데 쫓겨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임차료를 못 내니 건물주가 나가라고 독촉하지만 갈 곳이 없어 버텼는데, 전기 공급을 중단하고 엘리베이터를 꺼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한 국가의 외교부 대표로서는 참담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기업인에게 어쩌란 말인가! 며칠 후 그 기업인이, 공사를 대동하고 부촌으로 유명한 다케야초의 한 건물을 방문한다. 7934㎡(약 2400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
이 정도면 어떠냐고 물었다. 입이 딱 벌어진 공사, 뭐라고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기업인은 당시 돈으로 4200만엔을 주고 그 건물을 매입했고 공사관은 바로 이사했다. 월세는 어떻게 하면 되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1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선물로 한국 정부에 기증된 그 건물이 현재 일본의 대한민국 대사관이다.
서갑호, 먹고 살기 힘들어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에서 시작해 온갖 거친 일을 거쳐 방직산업으로 성공했다. 한때 서일본에서 소득세 1위까지 했던 분이다. 1915년에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났는데 신격호 회장의 옆 동네였고 ‘도쿄의 신격호, 오사카의 서갑호’로 불리며 의형제로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동네, 뭔가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의 공사관도 동포들의 성금으로 운영비를 내다가, 1963년에 와서 사달이 났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공사관을 옮겨야 하는데 보증금 2700만엔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또 그가 나섰다.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서갑호, 한록춘, 안재호 등 오사카의 다섯 동포가 부담했다. 그래 놓고도 월세 신세가 안타까웠는지 7년 뒤에는 아예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공사관을 옮기자는 결의를 한다.
그래도 염치가 있었는지 외교부는 굳이 비싼 곳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동포들은 그건 우리가 쪽 팔려서 안된다고 말하며 도심 한복판인 신사이바시의 대지를 매입키로 했다. 그런데 땅 주인이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팔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렸다. 결국 한록춘 씨의 일본인 부인 명의로 매입했다. 1974년 지상 9층, 지하 2층 건물을 완공했고 그 즉시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교포들이 설계, 부지 매입, 공사 비용으로 당시 돈 8억엔을 전액 기부한 최초의 사례다.
벌써 감동이 오는가? 아직 멀었다. 지금 일본에 존재하는 외교공관 10개 중 9개가 재일동포들이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려 조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 부동산, 현재 가치로 2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동포들이 또 존재할까? 독하다는 유대인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다시 나선다. 그때 돈으로 100억엔의 성금을 모아서 기증했고 올림픽공원에 있는 경기장, 올림픽파크텔, 올림픽회관 신축 비용, 미사리 조정경기장과 장충체육관의 보수 비용으로 집행됐다. 서울의 66㎡(약 20평) 아파트가 2000만원 하던 시절에 541억원이었다. 당시에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의 동포들이 모은 성금이 총 6억원 이었으니 비교가 된다. 지독한 차별 아래 힘들게 살던 자신들이 쪽팔리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조국이 국제무대에서 부끄러우면 안 된다는 결기였다.
서갑호, 망해가던 방림방적을 인수해 한국의 방직업을 선진화했다. 구미에 대규모 공장을 추가 완공했는데 불의의 화재로 전소됐다. 그때 1차 오일쇼크의 불운이 겹치고 또 하필 그 순간에 일본 은행들이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부도로 무너졌다. 그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지만, 고국의 정부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점에 모국에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국민들이 재일동포들을 백안시하게 했다.
이젠 그 누구도 서갑호를 기억해주지 않지만 도쿄 대사관 지하의 작은 기념관만이 그가 그곳에 존재했고, 조국을 너무나도 짝사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영민 (롯데벤쳐스 대표)
당시 재일교포들의 헌신에 관련된 미담은 도저히 눈물 없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의 처절했던 조국에 대한 헌신은 향후 언젠가 낫낫히 밝혀지겠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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慘慽(참척)을 이겨낸 어떤 인생
작년 5월, 어느 신문이 한 변호사의 별세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후 판사가 된 그는 네 딸을 두고 있었는데,
첫째가 눈에 이상이 왔고 백방으로 치료했지만 결국 양쪽 시력을 모두 잃었다.
그는 딸 치료 등 뒷바라지를 위해 천직으로 여기던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 딸은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부를 잘해 미국으로 유학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돌아와 서울맹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취직한지 9개월 되는 때쯤 두 동생들과 함께 집 부근 삼풍백화점에 들렀었고, 그 때 붕괴 사고로 세 자매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변호사는 딸들의 보상금으로 받은 6억 5천만에 본인 재산 7억원을 보태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첫째가 근무했던 서울맹학교에 기증하였다. 그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정광진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 슬프고도 감동적인 기사에 첨부된 고인의 사진에서 나는 어디서 본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광진이라는 이름도 귀에 설지 않았다. 37년전 사법연수생 시절 우리반 변호사실무 강의를 했던 분인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공직 임관을 목표로 하던 때라 변호사 실무강의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생각나는 강의 내용은 없지만, 그 교수의 엄숙한 표정,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던 헤어 스타일, 그리고 앞니 위부분이 약간 깨져 있었던 것은 또렷이 기억났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니 그의 앞니가 깨져 있었다. 그 교수님이 삼풍사고 때 딸 셋을 잃은 피해자였단 말인가? 여태 누구도 그런 얘기를 내게 해준 사람이 없었다
세 딸을 한꺼번에 잃은 아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미쳐버리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가늠도 잘 안 된다. 아마도 짐승처럼 울부짖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격렬하게 대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격렬한 항의 중에 그는 희망의 빛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절망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이제 내 딸들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다"라고...
그는 놀랍게도 절대적 절망을 절대적 희망으로 전환시켰다. 그가 만든 맹인들을 위한 장학재단은 세 딸의 이름 한자씩을 가져와 "삼윤장학재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맹인 학생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나는 신문을 접고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끝낸 후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오월임에도 더위는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빈소에는 교회 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빈소 앞 대기공간 의자에는 기자로 보이는 젊은이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언론의 대서특필과는 달리 문상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빈소로 들어갔다. 상주는 건장하고 용모가 준수한 20대 청년이었다. 자신은 고인의 외손자이고 할아버지는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내가 사법연수원 다닐 때 할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변호사"라고 소개하며 조문을 마치고 나오려 하자, 그는 할머니를 꼭 뵙고 가시라며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는 접객실로 달려가 고인의 부인을 모시고 나왔다. 매우 선하고 고운 인상의 할머니로 보였다.
"제가 20대 때인 86년에 사법연수원에서 정 변호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제 제 나이가 환갑이 되니 선생님은 떠나셨다."며 인사를 드리자 사모님은 나의 손을 꼭 잡으시며 "당시 사법연수원에 출강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다른 일로 그렇게 오래하지는 못해 아쉬워하셨다." 고 회고했다.
나는 선생님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세상에 빛을 보태신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하였고, 노 부인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시며 엷은 미소띤 얼굴로 끄득이셨다.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모습이 삶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지혜를 터득한 현인처럼 느껴지게 했다. 딸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아픔이 고인의 것보다 더 깊고 힘들었을 수 있었을 것인데도...
그 주, 사무실 변호사들과 점심식사를 하며 내가 정광진 변호사 별세 뉴스와 문상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상주가 외손자 한 명이었다고 말을 꺼냈다. 삼풍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 선배 변호사님이, "사고 당시 정 변호사님 관련 뉴스가 많이 보도되었다." 며 그의 스토리는 많은 주민들이 알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당시 프랑스에 나가 있던 나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선배 변호사님은 그러면서 고인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보태 주었다.
사고 때 세상을 떠난 둘째 따님은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한 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정 변호사님이 그 외손자를 데려와 자신이 키우며, 사위를 설득해 재혼케하여 새출발하게 하였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선택이 아닌가? 그 아이는 절망속의 조부모에게는 살아야 될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홀아버지보다 더 극진한 사랑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아이 생부에게는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출발하는데 부담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빈소에서 보았던 그 건장하고 용모 준수하며 정중했던 청년이 그 때 한살배기 아이였던 것이다. 고인의 선택이 더 없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현장을 내가 목격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런 탁월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몇년 후 넷째마저 병으로 떠났다. 어떻게 다 키운 자식 넷 전부를 잃고도 그런 좋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유대인으로서 나찌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삶의ㅊ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정광진 변호사님이 이런 태도를 취했던 것같다. 그 상황에서 삶에게 기대하는 것을 중단하고, "삶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앞에 놓인 과제가 무엇인가? 나는 그 과제를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고 질문했던 것같다.
그리고 그 책임을 온 어깨에 짊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떠난 딸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 그 남겨진 혈육이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다시 평화를 얻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해 냈다. 그리하여 임종의 순간에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나이다..." 하며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어느 소설의 결구처럼 '그렇게 슬픈 것만도 그렇게 기쁜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잘못과 무관하게 큰 시련이 올 때도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남탓하고 자책하고 비관하다가 파멸되어 사라지고, 또 어떤 사람은 고통을 극복하며 세상에 남을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다시 빅터 프랭클을 인용하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 선택과 힘이 들어 있다." 시련이 왔을 경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힘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
시련 속에서 억울해 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삶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냈던 사람은 불멸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
성경에서 욥이 그랬다. 빅터 프랭클이 그랬다. 그리고 정광진 변호사님이 그랬다...
받은 글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좋은 일만 가득한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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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感謝)하는 생활(生活)의 축복
유종해(연세대 명예 교수)님의 Blog 글입니다.
올해로서 내 나이 92세(歲)가 되어, 제법 장수(長壽)의 사람이 된 것 같이 생각되었으나,
우리 학교(學校)의 선배(先輩) 김형석 교수(敎授)가 105살인데,
얼마 전 “백년(百年)을 살아보니”란 책(冊)을 써서, 받아 읽어 보니 두 가지를 강조(强調)하였다.
첫째는 감사(感謝)하며 살 것, 둘째는 모범(模範)이 되는 생(生)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기독교(基督敎)를 믿는 선배교수에게서 좋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되었다.
🚶♂️➡️세상(世上)에는 세 종류(種類)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기쁜 일이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둘째, 기쁜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셋째, 역경속에서도 여전히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가 가장 바람직한 사람이지요.
신기(新奇)하게도 가만히 보면, *받기만 하는 사람,
*묻는 말에만 답하는 사람,
*묻는 말에도 답도 안 하는 사람, *서로 주고받으며 교감(交感)하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카톡이나 문자(文字)를 보내는 사람은 시간(時間)이 남아 돌아서 보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世上)을 감사(感謝)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條件)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부모(父母)님의 은혜(恩惠), 아내, 남편(男便), 자녀(子女), 친구(親舊) 벗들에 대한 고마움 등은,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쉽지만 늘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절대(絶對)로 마음 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반드시 겉으로 표현(表現)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표현될 때 비로소 서로간 기쁨과, 행복(幸福)을 함께 공유(共有)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美國) 어느 지방(地方) 신문(新聞)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사(記事)로 났습니다.
어느 회사(會社)의 전무(專務)인 40대 남자(男子)가 혈압(血壓)으로 쓰러져, 그만 반신불수(반신(半身)不隋)가 되었습니다.
병원(病院)에 입원(入院)하여 매일(每日) 실망(失望)과 좌절(挫折)에 빠져,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면서,
짜증과 불평(不平) 불만(不滿)으로 옆에서 수발을 드는, 부인조차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의 문병(問病)을 받고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구의 권면은 신세타령과 불평과 불만만 하지 말고, 일생(一生)을 살아오면서 도움을 준사람을 생각하면서, *감사(感謝)의 조건(條件)을 찾아보라고 권면(勸勉)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할 조건이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도 별로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저 짜증만 났고, 부인(婦人)도 자식(子息)도 친구들도 고맙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력(努力)해서 지난 날을 회상(回想)하는 가슴 속에, 뭉클한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초등학교(初等學校) 때 *여선생(女先生)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工夫)를 잘 하지 못했는데도, 늘 담임 여선생이 칭찬(稱讚)을 잘 해주어서, 용기(勇氣)를 얻어 공부(工夫)를 열심(熱心)히 하게 되었고,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취직하여 회사의 중역까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어릴 적 그 여선생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기 저기 수소문해서, 그 여선생님이 계신다는 양로원의 주소를 찾아, 간단한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윌리인데, 지금 반신불수가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생애에 있어서 둘도 없는 은사입니다.
그동안 한번도 감사의 글을 드리지 못하고, 무심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중략"
이 선생님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홀로 양로원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편지통에서 이 편지를 받아 읽게 되었고,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서 답장을 썼습니다.
"사랑하는 윌리군! 내 평생 수많은 어린이를 가르쳤지만, 고맙다고 *감사편지를 써 보낸 제자는 자네밖에 없었네."
"이제는 늙어서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이 노친네를, 자네는 참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었네!"
"내가 자네의 편지를 눈물로 읽은 것을 아나? 나는 자네 글을 침대 옆에 놓고 매일 밤 한번 씩 읽는다네!"
"그리고 읽을 때마다 그 편지를 어루만지면서 자네에게 감사하네!"
"이 편지가 내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아는가?"
"내 생애 새로운 희열과 기쁨을 용솟음치게 해 주었네."
"나는 자네편지를 내 교편생활의 유일한 보람으로 알고, 내가 죽는 날까지 간직하려 하네!"
"자네의 건강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대의 선생 000"
이 편지를 읽는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뒤 그는 삶의 용기를 찾았습니다.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말하는 연습을 했고, 재활운동에 사력을 다한 결과,
건강이 점점 좋아졌고, 다시 직장에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부사장이 되고, 사장이 되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만큼 잘 알려진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작 행동으로 옮기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까닭은 이 구절에 "범사"라는 말이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큰 사고를 당했거나 난치병으로 사경을 헤맸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생명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기본이 닦여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내가 격은 실수로 생명도 잃을 수 있는, 큰 사고에서 순간 감사하는 마음을 잃은 것을 깊이 뉘우치며 반성합니다.
다른 두 개의 예에서도 밝혔듯,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 그런 기본적 생활 태도(態度)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한ㅣ 생명(生命) 감사하며, 살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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