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은 귀가 엷어 (외 1편)
오세영
봄밤은 귀가 엷어
뒤뜰의 매화 피는 소리가 들린다.
봄 잠은 귀가 여려
꽃잎에 이슬 맺히는 소리가
들린다.
봄 꿈은 귀가 옅어
그 꽃대에
후두둑
바람 지는 소리가 들린다.
길섶 어디선가
살포시 별들을 밟고 오는 그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
아득한 하늘, 강 건너 사람.
어두운 등불 아래서
한 겨울 밤
정갈한 백지 한 장을 앞에 두고 홀로
네게 편지를 쓴다.
그러나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자
터벅터벅 사막을 건너던 낙타의 고삐 줄이
한 순간 뚝 끊어져버리듯
밤바다를 건너던 돛배의 키가 불현듯 꺾여지듯
무심결에
툭,
부러지는 연필심.
그 몽당연필 하나를 들고
흔들리는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내 마음 막막하여라*
*최치원崔致遠의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의 한 구절. “窓外三更雨/燈前萬里心”
—시집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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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196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시집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 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갈필渴筆 의 서書』 등.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 저서 『한국현대시인연구』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한국낭만주의 시 연구』 『시쓰기의 발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