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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학교에 대해서 철저히 구별해서 대우했다. 혜화전문에서 승격한 불교 대학인 동국대학이나 조선 유학을 계승하는 성균관대학은 비교적 도심에 있는데도 전혀 피해를 주지 않은 반면, 일제의 후신이라고 본 서울대학이나 경기중학교는 거의 학교 운영을 마비시켰다.
서울대학에는 인민군 사령부와 예하 기관들이 대거 들어섰고 경기중학교에는 의용군 지원수용소가 설치되었다. 다음으로는 선교사 학교들이 피해를 보았다. 배재중학교는 감리교 학교인데다 이승만의 출신교라서 더욱 천대를 받았다. 그곳에는 의용군 교육대가 있었다.
한편 서울대 교수 회의는 '전원 의용군 지원안'을 가결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렇게도 재빨리 변신할 수 있는 것인지? 모름지기 지식인이란 정치· 사회 문제에 올바른 식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지식인의 언로를 통제·감시하는 것은 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보다 더 심했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처자를 거느린 약한 존재라는 점에서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명색이 국립 서울대학교의 교수라는 사람들이 권력 앞에 스스로 굴종하여 '전원 의용군 지원안' 따위나 가결시켰으니, 그것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임이 분명했다. 물론 그들 중에 정말 의용군으로 나갈 생각이 있어서 지원안에 찬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터였다.
이승만의 출신학교인 배재중학교 정문에는 유달리 큰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배재중학교에는 인민군 교육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 이승만 괴뢰도당을 어서 바닷속으로 처넣자. -
사실 어느 면에서 이승만이야말로 정말 비참한 인간이 아니었을까?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를 빼앗기고 자기가 다녔던 학교에도 이런 구호가 붙었다면, 그는 분명히 인생에 실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놀랍게도 훈련병 중에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서울 문리대 교수들이었다. 40 전후의 교수 몇이서 어린 소년들과 함께 흙에서 뒹굴며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명에 이병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결의만 했을 뿐 실제로는 의용군 지원에 응하지 않았는데 유독 고전과 골동품을 애호한다던 <난초>의 시인 이병기는 몸소 나가서 훈련을 받았다.
호를 ‘가람’이라고 쓴 이병기는 일제 말 정지용, 이태준과 함께 <문장>파를 자처하면서 난초와 고전과 골동품 등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시를 썼다 하면 으레 ‘자연과 탈속’을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이 주도한 의용군에 지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