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대찰 답사기는 늘 조심스럽다. 예로부터 작금에 까지 많은 문인재사. 역사학자. 미술사학자.여행작가들의 현란한 문장과 미사여구. 비교와 분석에 근거를 둔 명확한 해설서가 넘쳐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나의 주장과 감정를 최대한 배제하고 문화재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하여 길잡이 역활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법주사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자료는 문화재청. 보은군청.법주사 홈페이지. 한국사지총람.전통사찰관광정보.사찰문화유산.문화유적 총람. 돌베개 답사여행의 길잡이를 참조하였다.
그리고 나와 같은 불행한 답사객이 없기를 바라며 노파심에서 사족을 붙이자면 '사하촌 주차장에 차를 두고 진입공간 오리숲을 거닐며 스스로 속리를 만끽하면 좋겠다'. 속리는 방문객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를 버릴 기회가 있었는지 자문자답하며 정체성을 되짚어 보면 좋겠다. 아울러 내가 좋아하는 수필중의 한 편인 고은 선생의 법주사 에세이를 옮겨 왔으니 음미길 바란다.
법주사는 축구장 보다 넓은 부지위에 일정한 룰없이 전각이 분포되어 있어 어쩌면 굉장히 산만한 느낌이 들어야 하건만 잠시도 한 눈을 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답사객의 발걸음을 분주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런 분위기는 속리산의 8개 봉우리, 8개 대(臺), 8개 돌문이 연꽃잎처럼 감싼 터에 법주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고 전한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과정은 조선시대에 편차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근대에 완성된 조선불교통사 등에 설화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553년 무렵 신라에 의신 스님이 있었는데, 불법을 구하고자 머나먼 천축국(인도)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후 신라로 돌아오면서 흰 노새 한 마리에 불경을 싣고 돌아 왔다. 그 뒤 스님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아 이리 저리 순방하던 중,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우는 것을 보았다.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깨달은 바가 있어 걸음을 멈추고 산세를 둘러보니 아름다운 절경에 비범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마침내 이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
이와 같은 의신 조사의 창건 설화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우선 절을 창건하였다는 553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후 신라의 고승들이 가까운 중국 유학 길에 떠나는 것도 7세기 이후부터 비롯되는데 머나먼 인도까지의 험난한 역정을 통해 불경을 가져왔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절에 관한 이러한 설화적 창건담은 절 이름인 법주사의 뜻풀이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것이다.
창건 뒤 760년(경덕왕 20) 무렵 진표율사와 그 제자 영심 등에 의해 절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여러 기록을 볼 때 법주사의 실제적 창건주는 진표 율사와 영심 대사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인 「법주사사적기」에는 725년(성덕왕 24)에 창건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현재 절에 남아 있는 쌍사자석등, 사천왕석등, 석연지, 희견보살상 등이 신라 중대에 조형된 것임을 볼 때 이 무렵의 중창은 대단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의신 조사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하지만 진표 율사의 가르침에 따라 영심 대사가 길상사를 창건하고, 이곳이 오늘날 법주사의 터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심 대사 이후 법주사는 미륵불을 모시는 법상종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 차례 중창이 거듭되었다. 먼저 문종(1046∼1083)의 다섯 째 왕자였던 도생 승통이 절의 주지를 지냈다. 도생 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혜덕 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것은 그가 곧 법상종 승려임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그가 주지를 지낸 법주사 역시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종 때(1122∼1146) 김부식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 1342년(충혜왕 3)의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 그리고 「도생승통비」 등이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은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원종 (1259∼1274)때는 자정 미수(1240∼1327) 대사가 절에 주석하였다. 스님은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절의 법등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 세조 때(1455∼1468)는 신미 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세조의 스승으로서 큰 존경을 받았던 신미 스님은 이보다 앞선 1449년(세종 31) 12월에 속리산 내의 복천사를 중창하기도 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한 「복천사중수보권문」이 전한다. 이 무렵 법주사를 방문한 세조는 절 초입에 서 있는 소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는데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가마가 무사히 지났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정이품송이 탄생한 것이다.
조선 중기 절은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했으나 정유재란을 맞아 또다시 절이 전부 불타버렸다. 전쟁 뒤에는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사명 대사 유정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다. 1624년 다시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불사를 마치고 「법주사사적기」를 편찬하였다. 그 뒤 벽암 각성, 1575∼1660)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다. 1851년(철종 2) 3월 영의정 권돈인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1872년(고종 9)에는 지금의 금동청동미륵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 규모의 용화보전이 헐렸다. 1927년 진하당과 탄응당 대사의 비를 세웠다.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다. 주지 장석상 스님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영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이 요절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다
속리산사실기비각
조선 현종 7년(1666)에 건립된 석비로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속리산에 얽힌 단편적인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문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 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10층의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을 효종 4년(1653)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다. 그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또한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벽암대사비
법주사를 중창한 조선시대 중기 고승인 벽암 대사(1575~1660)의 행적을 기록한 석비이다. 대사는 1575년 보은에서 출생하여 14세에 출가하였다. 부휴 대사의 제자가 되어 명산고찰을 순례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3년에는 부휴 대사와 함께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인조 때는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도들을 이끄로 남한산성의 축조를 감독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승병을 조직해서 적병에 대항하였다. 대사는 이외에도 법주사 중흥이라는 대업적을 남겼으며 1660년 구례 화엄사에서 입적하였다. 이 비석은 1664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다.
수정교 건너 석주
용도가 무엇일까? 당간은 경내에 있어 가능성 제로이며 괘불지주는 전각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 석주에 관한 자료는 법주사는 물론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사진 뒷쪽에는 구멍이 상하로 있다. 철주를 세우고 그 홈에 고정 장치를 설치한후 사진에 보이는 두 겹 원에는 철제 선으로 철지주를 묶는다. 그러면 석주 끝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되는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크게 활약한 백암대사 당시 승군의 야간 훈련을 위한 불을 밝히는 장치가 상부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보면 어떤가? 그래서 나는 노주석이라고 생각한다. 철기둥과 화로(?)는 전화 또는 대원군 당백전 주조를 위하여 공출되어 결실되ㄴ 것으로 본다. 금강문
금강문 수리로 인해 경내 진입은 우회해야 한다. 창건시의 배치는 알 수 없지만 화재. 전쟁 등으로 인하여 본래 전각 배치에서는많이 벗어났을 것이지만 현재의 배치를 살펴보자. 중심축에 당간지주, 천왕문, 팔상전, 쌍사자 석등, 사천왕석등, 대웅보전이 서 있고 그 좌우로 여러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중심축 왼쪽에는 아래서부터 능인전 일곽, 석가세존사리탑 석탑 2기, 석연지 금동청동미륵대불, 원통보전과 희견보살상, 진영각, 명부번, 삼성각이 자리 잡고 있다. 중심축 오른쪽에는 철확, 약사전, 석등 요사와 선방 건물군이 밀집해 있고 선희궁원당이 있다.
법주사 당간지주는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 높이는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 당했다. 이 와중에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은 녹여졌던 것이다. 현재 당간지주는 1910년 무렵 22m 높이로 다시 만들었으며 1972년에 보수하였다
지주와 배례석은 본래의 부재이다. 한편으로는 속리산의 풍수형국이 배의 형태이어서 배를 정박 시키려는 돛대를 표시한 비보책으로로 본다.
쇠솥(보물 제1413호). 120㎝, 지름 270㎝, 두께 10㎝의 거대한 규모이다.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솥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원래는 조사각 뒤편의 석옹(石瓮 : 돌도가니)이 있는 곳에서 시냇가 쪽으로 3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석연지
능인전 앞에 석연지로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의 부재로 사각의 테를 두르고 안에 지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안상과 우주를 새겼다. 위에는 3단의 층단으로 체감을 줄여 올라 가다가 복련으로 살짝 덮었다. 중대석은 전체 구조의 기둥 역할을 하는데 둥글게 피어나는 구름문양이 사방을 감쌌다. 위의 거대한 상대석을 받치기 위해 윗면을 아래보다 넓게 하여 안정감 있어 보인다. 상대석인 연지는 반구형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3단의 커다란 앙련을 새겼고 다시 그 연꽃 속에는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나타냈다.
연지의 가장 위는 난간을 돌렸다. 연지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돌란대를 올렸는데, 둥근 원형 면마다 천인상을 새겼다. 일부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상단에 놓인 이 난간의 형상으로 미루어 혹 대형 향로를 조성할 목적으로 조형물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있다. 또다른 해석으로는 천상의 연지를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법주사, 김제 금산사, 공주 대통사는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가람이며 현재 석연지가 전해오고 있다. 따라서 석연지는 용화전 앞에 인위적으로 설치한 연지로 미륵신앙과 연못의 관련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석조
능인전 앞에 위치한 높이 1.3m, 길이 4.46 m의 통일신라시대 석조물이다. 아무런 조식이 없는 단조로운 네 벽은 수직을 이루며 구연부의 윗자리를 경사지게 깍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다. 법주사의 3000승도가 살았을 당시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사용하였다고 전하며, 신라 성덕왕 때 중수 당시 조성된 것이다. 우리나라 석조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하며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다고 한다. 밑바닥에 물을 뺄 때 썼던 지름 11㎝의 구멍이 있다.
적멸보궁
능인전. 출입이 통제된 전각으로 인지 했었다. 능인전은 적멸보궁으로 현판을 바꿔 달고 창을 통해 세존사리탑을 참배 할 수 있도록 했다. 능인전은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호영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제 제이름을 되찾은 듯 하다.
세존사리탑(유형문화재 제16호). 고려 후기인 1362년(공민왕 11)에 조성되었다. 그 옆에는 1650년(효종 1)에 조성한 세존사리비가 함께 있어 사리탑의 조성 과정을 전하고 있다. 홍건적을 물리친 후 공민왕은 통도사의 적멸보궁에 모셔진 석가여래의 진신사리 1과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라고 하명하였고 그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조성됐던 것이다. 전체 높이 3.4m에 이르는 이 탑은 고려 말기 부도이다.
오층탑.삼층탑. 적멸보궁 세존사리탑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오층탑.고려시대 석탑으로 보인다. 초층탑과 이층탑 탑신이 바뀌었거나 하나는 기단면석으로 보인다. 기단부의 팔각 대좌는 석탑 부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탑신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전각은 상하에 반전이 있다. 옥개받침은 4단이며 상륜에는 보주만 남아 있다. 본래 위치는 어디었을까?
삼층탑.규모와 층급받침 등으로 미루어 고려탑으로 보인다. 특별한 조식이 없으며 탑신에는 양우주라 보인다.상륜에는 노반석(?)만 남아 있다. 오층탑과 마찬가지로 본래 위치는 전하지 않는다.
자정국존비
1270년 당시 법주사에 머물렀던 지장국존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로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조성된 비석이다 자연 암벽에 바위면을 정방형으로 파서 그 위에 비신을 고정시켰다. 보명대사(普明大師)라는 호를 가진 스님은 유식론을 강설하고 92권에 달하는 경론 해설서를 찬술하기도 했으며, 법주사 주지로 계시다가 88세에 입적하셨다고 한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사천왕문
법주사...고 은 법주사는 여름에 가야 한다. 겨울도, 봄도, 그리고 가을도 좋지만 여름의 장마철에 비를 맞고 가 보면 속리산 법주사의 진정한 실감이 우러나오는 것이다.속리산 전체의 우렁찬 녹음이 오랜 습기로 젖어 있고 때로는 낮은 비구름이나 비안개에 파묻혀
도비원인인원도(道非遠人人遠道)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이를 멀리 하고
그러나 속리산은 그곳에 들어간 사람에게 그런 여유를 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여자, 그런 남자가 되지 말고 조선 초기의 난폭한 풍류아 세조대왕이 되어서 보은 고을에서 쉬고, 그 길로 문자 그대로 구곡양장(九曲羊腸)인 말티고개를 굽이쳐 오르내려가는 것이 최선의 법주사 여행이다.말티고개를 굳이 양의 곱창이라고 한 것은 그것을 사람의 곱창과 같은 길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일에 대해서 퍽 섬세하고 구수한 표현이다.
“그 녀석 제법 풍채가 있도다. 에라, 과인이 큼지막한 벼슬 하나를 떨어 뜨려 주고 가마. 정이품 벼슬이면 과인의 숨소리도 들을 만큼 과인 바로 아래에 있도다. 허허.” 이제 와서 세조 대왕이 아니라도 그의 즉흥을 흉내내어서 소나무 한 그루에도 마음이 내키면 벼슬을 주어볼 일이다. 그뿐이랴. 삼라만상에 다 벼슬을 줄 일이다.
벌써 법주사 경내의 충만한 여름숲이 우기(雨期)의 색감을 짙게 풍기면서 유명한 ‘오리숲’에 접어든다. 비가온다. 비에 젖은 녹음은 비 맞은 사람에게 숙연한 느낌으로 압도된다. 1천 5백년 전 신라의 의신(義信) 스님은 이 숲길로 가지 않고 문수봉을 넘어서 경북 상주지방에서 온 것이다. 그는 속리산을 제압함으로써 왔고 나는 비를 맞으면서 속리산에 귀의하기 위해서 오리숲의 어둠에 들어간다.
절은 큰 절일수록 그 절 아래에 마을을 마련하고 있다. 절을 받들고 절에 의존해서 사는 마을이다. 그것이 중세 불교의 사노(寺奴) 계층으로 연원된 사하촌(寺下村)이다. 소설가 김정한은 그이 대표작 <사하촌>에서 승려의 타락과 지주적 착취를 리얼하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의 절 아래 마을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그들끼리 절을 둘러싸고 관광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결과는 상관없는 그들의 장사 저자를 독립시키고 있다. 그렇다. 속리산 관광호텔 로비에서 좋은 흥취를 돋굴 수 있다.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차려 놓은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품을 살 수도 있다.
어디선가, 숲 사이로 목탁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비에 젖은 그 소리는 멀지만 똑똑하다. 새벽의 물소리가 그때까지도 쉬지 않고 들리는 것을 생각건대, 바로 길 부근의 어느 굽이에 개울이 흐르는지도 모른다.목탁소리, 개울물 소리가 있더니 깊은 녹음 속에는 짤막짤막한 새소리도 점이 찍히면서 들린다.
고인(古人)은 자연을 세속적인 인사와 대비했다. 자연은 불보살이나 신선의 경지이며, 인사는 세속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동양 사람은 자연이 그들의 마지막 귀의처였던 것이다. 자연이 신이었다. 사람이 사람다와진다는 사실도 그 자연과 얼마나 깊게 교섭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잴 수 있었다.
법주사 경내는 점점 깊어지면서 이 나라의 오지를 실감케 한다. 이곳에서 자연이나 세속을 벗어난 경험을 가지지 않고 어느 곳에 가서 나뭇잎과 나무를 바라보랴. 어딘들 청산이 없고 백운이 없으랴. 그러나 신라 불교가 자연 가운데서 지켜져서 불교의 미륵신앙을 일으킨 속리산 법주를 잊고 그런 속세 인연은 끊을 수 없을 것이다.
비가 온다. 아무리 비를 막아도 이미 온몸은 그 속리산 비에 젖어서 더욱 적적해진다. 일주문 아래에서 잠시 머물 필요가 있다. 경내의 5리 숲을 지나니, 이제까지 온 그 숲도 차라리 속세였다. 속세가 따로 속세인가. 속세를 여의는 일이 따로 있을 것인가. 금강경은 ‘과거 수심도 잡을 수 없고 현재심도 잡을 수 없고 미래심도 잡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데 속세를 아는 마음, 속세를 여의는 마음이 이 속세의 세세생생 어디에 멈춰 있겠는가.
일주문을 지나서 늙은 소나무 가지가 휘영청휘영청 어둠을 밝히고, 비에 젖은 멋쟁이 잣나무와 잡목들이 제 수려한 수격(樹格)을 지키면서 서 있다. 부처란 사람만이 되는가, 저 나뭇가지들도 부처의 씨앗인 빗방울들을 눈부시게 매달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등지고 왔다는 것은 그 세상을 여읜다는 뜻도 뜻이거니와 그 세상을 다시 한번 알고 세상 자체를 내 마음 안에 품어 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속리산의 경지도 내 심경 안에서 다시 세상 자체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는 오고 날은 빗속에서 저물고 있다. 갈 길은 더 없으니 갈 길의 나머지를 너무 서둘지 말고, 말이라면 말발굽 소리를 느리게 해도 좋다.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다. 그 소리는 점점 둔중해진다. 울창한 숲은 그 숲의 아래로 훤하게 뚫린 길을 베풀어서 이런 곳에서 오랫동안 자란 여유를 듬뿍 안겨준다.
수정교(水晶橋) 돌 난간은 물 흐르는 소리에 울린다. 무려 13미터나 되는 돌다리인 것이다. 한용운 스님의 시 ‘물이 돌을 울리듯’이라는 구절이 떠오른다.그 다리를 건너서면 속리산 전체가 광활한 병풍으로 둘러쳐진 10여 만 평의 도량(道場)에 신라 고찰 법주사는 서 있는 것이다. 대웅전·원통보전·팔상전·사천왕문·삼성각·능인전·극락전·조사전 등의 가람 건물과 승료(僧寮)가 즐비하다. 그런 큰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도 넓은 도량은 오히려 허전한 것 같은 분위기인 것이다.
그 산이 거의 원을 그리면서 커다란 절터를 비워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법주사는 선문(禪門)의 추상 같은 위엄도 없고 허황한 협잡도 없이 동양 사람의 큰 도량을 표상한다.그리하여 법주사는 이른바 관광시대 이전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법주사의 밤 음영(陰影)이야말로 무엇으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 천지가 다 요란하고 아무리 세상이 난세라고 하더라도 이곳만은 가라앉은 적정을 누리게 한다. 과연 속리산은 사람을 속리인으로 만든다.만약 이 산 이름을 그대로 믿으려 한다면 법주사에 머물러, 만주도 헤매인 일이 있는 장부승(丈夫僧) 월산(月山) 스님한테 사정을 통하고 객실 한 구석의 일박을 바랄 일이다.아니다. 잠들기 전에 잠이 오지 않으리라. 문득 오래 전에 바른 빛바랜 창호지의 영창이 밝아지기도 한다. 길고 지루한 추적추적한 여름 우기는 때때로 여름 보름달을 그 장마 사이에 비쳐 주는 것이다.
아직 여기저기에 구름이 널려 있다. 그러나 그런 밤하늘에 젊은 어머니가 따고 있는 대추 열매만한 별들이 후둑후둑 쏟아지고 그러다가 구름에 숨겨진 달의 얼굴이 벗겨져서 그토록 음울하던 법주사 경내를 휘청거리게 밝히는 것이다.이런 월백의 야기에 적셔진 몸을 끌고 나서 텅빈 것 같은 도량을, 우뚝 솟은 미륵불 아래를, 그리고 신라 예술의 대표작인 팔상전 대석(臺石)을 산책하면 누구나 저절로, 한많은 여행자가 되고 저절로 한 번 앓아보고 싶은 아름다운 병을 앓는 넋의 환자가 되는 것이다.
“스님 안 주무시는군요.” “예. 저녁 무렵에 오신 손님이시군요. 달을 오랜만에 봅니다.” “이런 달밤은 이제 이 나라에는 아주 드물어졌습니다. 스님은 너무 젊군요.” “그래요. 젊다고 해야, 전생(前生)을 이어서 산다고 하면 이 세상의 노인보다 더 노인이지요. 흐흐.” “딴은 그럴 법하군요. 장마가 곧 걷힐까요?” “네. 아직 더 이어질 겁니다. 속리산 장마는 좀처럼 속리산을 떠나기 싫어하나보지요.” “스님은 입선(入禪)하십니까?” “아니요, 아직 사집(四集)을 읽는 소년 사미올시다.” “스님 이 세상에 끝이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끝을 말하고 있어요.” “글쎄요.” “물론 그건 이를테면 불안의 종교라고 할 수 있지요.” “글쎄요. 끝이 있다 없다는 말은 그 끝만큼이나 어리석은 듯하군요.
이런 대화는 더 길면 좋지 않다. 딱 잘라버려야 달밤의 운치와 일치한다. 젊은 스님은 가엾다. 역시 스님은 흰 머리가 성깃성깃한 늙은 스님이어야 한다. 쇠눈깔만한 단주(短珠)를 구을리다가 잠깐 사이 그것을 구슬리기를 잊음으로써 멈춘 고요의 노쇠야말로 법주사 조실((祖室)에 주석(駐錫)할 수 있다.
젊은 사미가 달밤에 방을 빠져나온 것도 파계다. 그는 곧 달을 파란 삭발 자국의 머리에 이고 요사 강당으로 들어간다.이런 절의 한 경치를 경험하고 객실에 들어가면 아주 황홀한 꿈을 꾸면서 잘 수 있다.그 꿈은 이런 꿈이었다. 법주사 대웅보전 앞뜰에 있는 쌍사자석등이나 석련지가 그대로 살아 있는 불교 상징주의의 화엄세계(華嚴世界)였다.
두 사자가 머리에 받들고 있는 광명을 짐작하는 것이나 연못을 이루는 돌의 발원(發願)이 이미 법주사의 것이 아니라, 그 법주사에서 꿈꾸는 여행자의 것이다.그런 꿈을 깨어서 새벽 도량석 염불소리를 들으면 몸 안에 시냇물이 흐르는 것 같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어젯밤 그 스님의 소리였다. 목탁소리가 다른 쪽으로 가면 염불소리가 그곳을 따라가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 새벽이 지나서, 봄 산채를 말려서 걸어 둔 것으로 졸인 반찬에 간소한 식사를 마친다.
아아 과연 법주사는 비 오는 법주사였다. 어젯밤 둥근 달은 어디로 가고 다시 어제처럼 길고 지루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다만 신라 의신 스님이 당나라에서 불경을 싣고 오다가 머무른 법주처(法住處)인 법주사를 한 눈길로 돌아다보아서 맑게 씻어주고 싶은 마음이면 그곳을 하직해도 좋다. 여행자는 인사 없이, 자취 없이 떠나는 것이 최선의 인사다.그리하여 법주사에는 기둥이 5백 61개나 되는 팔상전만이 이 여름을 보내게 하라.
법주사 사천왕문은 정면 5칸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정면 5칸 가운데 어칸 1칸을 통로로 열고 좌우는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로 짰는데 칸 너비가 좁은 협칸은 주간포 대신 화반을 1구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에 한식기와를 올린 맞배지붕인데 원래는 팔작지붕이었다. 앞면 3칸에는 판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을 달았다.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팔상전
법주사의 얼굴인 팔상전. 수리중인 모습이 오히려 가슴에 더 각인 되지 않을까? 그래서 본디보습을 가져오지 않았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8폭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를 봉안한 전각을 말한다.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은 목탑 구조의 전각으로 안에는 4면에 팔상도를 봉안하고 있다. 한 폭에 각각 2상을 나타냈는데 세로 200㎝, 가로 90㎝로 1897년에 조성하였다. 팔상도 앞에는 각 면에 4위의 불상을 안치했다. 그런데 1구는 석가여래의 열반모습을 재현한 와불상이다. 불상 주변에 소형 불상 500위를 모셨다.
법주사에 팔상전을 처음 세운 것은 의신 스님으로 절을 창건할 때 지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이후 776년(혜공왕 12)에 병진 스님이 중건하였다.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유정 사명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하여 지금에 이른다. 1968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팔상전 해체 중수공사를 하면서 심주 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의 건립 경위를 알게 되었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5칸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줄어들고 맨 위인 5층은 사방 1칸인데 내부는 통층으로 트여 있다. 각 층의 사면은 모두 창호를 설치하였다. 1층은 각 면 어칸에만 출입문을 달고 나머지는 머름 위에 창호를 달았다. 기단과 계단은 현 건물보다 앞선 시기 작품으로 조선시대에 재건하면서 건물을 키워 기단면이 매우 좁다. 가운데 심주를 세우고 구조를 결구하였다.
공포는 각층마다 다른데 1층의 공포는 기둥 위에만 얹은 1출목의 주심포 형식이지만 2· 3· 4층은 2출목의 주심포 형식이고, 다시 5층은 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기둥 사이에 공포를 올린 완전한 다포형식이다. 이처럼 층간의 포가 다른 것은 재건 당시 여건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처마는 서까래만 쓴 홑처마로 구성하여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렸다. 최상층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한 가운데에 절병통과 상륜부를 올려 마무리하였다.
팔상전 옆 석등.통일신라 전형이다.
법주사의 이미지라 할만큼 법주사 하면 미륵대불을 떠올린다. 하지만 높이 8m의 기단 위에 25m 높이로 우뚝 선 미륵대불이 법주사에 자리 잡은 것은 불과 4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미륵대불이 위치한 곳에는 옛날 산호전·산호보광명전 또는 용화보전이라 불리던 법당이 있었다. 법당 안에는 신라시대 진표 스님이 조성한 금색의 미륵장륙상이 있어 오랫동안 법주사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란 명분을 들어 흥선대원군은 미륵장륙상을 압수하여 녹이고 말았다.
1939년 주지 석상 스님의 원력과 김영곤 거사의 시주에 의해 미륵불 조성불사를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미륵불을 조성한 것은 1964년에 이르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시주로 완성하였다. 그러나 시멘트로 조성한 불상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외관이 볼썽사납게 변하였다. 1990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지 월탄 스님과 사부대중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청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완성하였다.
미륵불입상으로 통통하고 원만한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중앙계주가 있는 육계를 갖췄다. 머리 뒤의 두광은 투각으로 화염문과 법륜, 화불을 장식하였다. 법의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법의자락은 상반신에서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하반신에서는 무릎 밑으로 U자형 주름을 이룬다. 대좌는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이다. 이 상은 최근 개금불사를 하여 금색의 휘광을 내뿜고 있다.
미륵대불의 대좌 아래 지하에는 반가사유상을 모신 용화전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안에는 중앙의 반가사유상을 본존으로 주변에 전시공간을 만들어 절과 산내 암자 등에 있던 성보를 전시하고 있다.
법주사 약사전은 원래 20세기초까지는 원통보전 동쪽 정면에 있었다. 지금의 약사전은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석등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생각된다. . 약사전 중앙 불단에는 약사불 좌상을 독존으로 모시고 뒤에 약사불 후불탱을 걸었는데 모두 1997년에 조성되었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은 팔상전과 대웅전 사이 중심축의 왼쪽에 자리 잡은 전각이다. 1624년(인조 2) 벽암 대사가 중창한 이래 고종 29년(1892)에 중수한 기록이 있고 천장을 비롯한 지붕가구의 일부는 후대에서 수리된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74년에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 작업을 하였다. 하지만 원통보전을 받친 기단과 계단, 초석은 고려 전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통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면이 측면에 비해 약간 길지만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이다. 기단은 지복석 위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갑석을 쌓은 가구식구조이며 정면 중앙에 소맷돌을 갖춘 계단을 두었다. 팔상전 계단 소맷돌과 같은 양식이다. 초석은 쇠시리를 둔 방형초석인데 상면만 다듬은 부정형 초석으로 2개뿐이다. 전면 기단 모서리에는 활주 초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팔각형 석재가 놓여 있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다듬은 원형기둥인데 일부는 약하게 배흘림으로 치목한 것도 섞여 있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결구한 다음 평방을 놓고 공포를 조립하였다.
일반적으로 평방은 다포계 공포를 짤 때 쓰는 부재인데 원통전은 주심포계 공포 건물이면서도 평방을 두었다. 공포는 전체적으로 주심포계지만 부분적으로 다포와 익공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구는 2고주 7량가를 변형한 방식이다. 사모지붕을 구성하기 위해 대들보 상부에 심주를 설치하여 종도리 역할을 대신한 독특한 구조이다. 처마는 4면 보두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인데 모서리에는 추녀 위에 사래까지 둔 점도 흔치 않다. 사모지붕 한 가운데는 절병통을 세워 마무리하였으며 기와골 끝은 막새를 끼웠다.
원통보전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배면의 고주 사이에 후불벽을 치고 그 앞에 불단을 조성하였다. 관음보살상 위 천장에는 닫집을 꾸미는 대신에 우물천장 4개를 합친 크기로 우물반자 2개를 나란히 설치하여 닫집에 버금가게 장식하였다. 정면은 전체적으로 창호로 꾸미고, 배면 가운데 칸과 좌측의 앞칸 및 가운데 칸에도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는 심벽구조로 벽체를 들였다. 문은 하부에 궁판을 둔 격자살이다. 외부 포벽에는 여래좌상을 그려 넣었고, 내부 내목도리 상부 벽에도 산수초목화를 그려 넣었다.
원통보전 중앙 불단에는 목조 관음보살상과 좌우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봉안하였는데, 관음상의 높이는 280㎝이다. 중앙 관음보살상은 얼굴은 원만한 방형으로, 머리에는 중앙에 아미타불의 화불있는 화려한 보관을 썼다. 수인은 중품중생인을 결하고, 화려한 채색이 가미된 목조의 연화대좌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정좌하였으며, 법의는 통견식으로 걸쳤는데 가슴으로부터 천의가 날리고 있다. 무릎 좌우에 배치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은 연화좌 위에 합장의 자세로 본존상인 관음상을 향하고 있다. 중앙 불단 위에는 이외에도 정토의 연못을 상징하는 듯 연잎과 연꽃조각이 배치되었다.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봉발석상으로 불린다. 통도사 용화전 앞 봉발탑과 더불어 법주사가 미륵도량임을 짐작할 수 있는 명칭이다. 전체 높이 2m에 달한다. 흔히 그 형상으로 미루어 희견보살상으로 보고 있다. 희견보살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나오는 보살로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가섭존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보살상은 한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 까지 조각하고, 맨 위에 언친 향로만 다른 돌로 만들었다. 대좌는 별다른 조각 없이 판석에 가깝다. 상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떡 벌어진 가슴, 짧고 굵은 다리와 팔은 역동적 분위기를 풍긴다. 어깨에 겉옷을 두르고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 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별다른 조각 없는 판석이다. 그 위에 올린 향로는 네 겹의 굵은 연꽃잎을 새겨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경내에 산재한 부재를 모아 두었다. 팔부신중이 새겨진 면석을 비롯하여 석탑 부재도 눈에 띄인다. 현존하는 석탑 보다 더 많은 삭탑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쌍사자 석등. 신라시대 작품으로 쌍사자를 모태로 만든 석등으로 국보 제5호이며 높이 3.3m에 이른다. 일반적인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중대석을 기둥 모양으로 만들지 않고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든 형태로 새겨 상대석을 떠받친 독특한 양식이다.
사자가 받들고 있는 상대석의 아랫부분은 두 줄의 가는 받침 위에 원형에 가까운 앙련석이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을 냈다. 옥개석은 위에서 아래로 약간의 경사를 보이고 추녀 끝에서 반전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복련과 공모양의 보주로 장식하였다.
지대석은 팔각형인데 아래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윗면에는 역시 팔각의 고임을 나타냈고 다시 그 안에 원형의 고임을 새겼다. 하대석은 한 겹의 커다란 연꽃문양과 그 속에 또 다른 꽃문양을 조각하였다.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버티어서고 앞발로 상대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새겼다.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댄 채 머리가 위로 향한 똑같은 모습이다.
진영
진영각. 대웅보전 왼쪽 지역에는 진영각과 명부전, 삼성각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왼쪽 벽에 대원(大圓)·호암(湖岩)·용허(龍虛)대선사의 세 분, 정면에 석상(石霜)·진하(震河)·탄응(坦應)·법영(法英)·영린(玲璘)·충은(衝恩)·보흔(普欣)·장신(莊信)·함월(函月)·의신(義信)·태고(太古)·명일(冥一)·지영(智榮)·세홍(世弘)·정준(靜俊)·명찰(明察)·도홍(道弘)·홍민(弘玟)·성인(性印) 등의 19분, 그리고 오른쪽 벽에 선현(亘玄)·태전(太田)대선사 두 분을 모셨다. 이전에는 선희궁 영당으로 부르는 건물에 진영을 모셨으나 현재 건물을 1990년에 짓고 이안하였다고 한다.
대웅보전.사천왕석등 사천왕석등
높이 3.9m에 달하며 보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대석에 새겨진 사천왕으로 인해 사천왕석등으로 부른다. 조각 기법으로 미루어 쌍사자석등과 같은 8세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팔각형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었다. 지대석은 방형으로 네 개의 돌로 구성했 다. 그 위의 하대석은 2단인데 하단의 각 면마다 안상을 얕게 부조하였다. 상단은 그릇을 엎어놓은 형상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면을 줄이고 8개의 복련을 나타냈다.
중대석 즉 팔각의 간주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늘씬하게 올라갔고 윗부분에만 8개의 앙련을 새겼다. 간주석의 위아래로는 각각 3단, 2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화사석 역시 팔각으로서 각 면에는 화창과 역동적인 사천왕상을 번갈아 두었다. 장방형의 화창 주위에는 쌍사자석등과 같이 구멍이 남아 있다. 경사가 완만한 옥개석은 경사가 끝에 약하게 반전시켰다. 위에 올린 보주는 새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은 법주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집이다. 법주사에 대웅보전을 지은 것은 고려 중기로 보고 있는데 신라 때 창건 무렵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을 중심 전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석가여래와 노사나불을 좌우에 협시한 삼신불을 봉안하였다.
평면은 상하 모두 정면 7칸, 측면 4칸인데 상층 너비가 하층보다 작다. 기단과 계단은 현 건물보다 앞선 시기에 조성된 것이다. 공포는 상하 출목을 달리하여 하층은 2출목이나 상층은 3출목으로 짰다. 처마는 겹처마에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으며 기와골 끝은 막새를 끼웠다.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 상부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불상은 모두 소조불로 현존 우리나라 소조불 가운데 가장 크다. 삼신불 뒤로는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각 상마다 후불탱을 하나씩 걸었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을,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탱을 걸었다.
소맷돌 문양.
계단 중앙 장대석을 가로로 설치한 높은 부분은 불상을 모시는 연이 통과하는 답도 인가? 소맷돌에는 연꽃문양(?), 고사리 문양(?), 태극문, 안상이 보인다. 벽사의 상징일 것이다. 이런 상징은 영압 도갑사 해탈문 소맷돌 태극문양에도 나타난다.
원숭이 상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우리민속에서는 원숭이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으며, 중국에선 건강과 성공, 수호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왔다. 왕궁이나 표충사 금당 합각마루의 손오공을 비롯 그 뒤로 저팔계, 사오정 등으로 구성된 잡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잡귀와 재앙의 침입을 차단코져 하는 상징물이다. 또한 금당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도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는 암시일 것이다.원숭이상은 송광사 일주문 소맷돌, 불국사 대웅전 내부에서도 보인다.
비로자나불
삼신불의 조성은 중국에서는 8세기말~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석남암사의 비로자나불상(766)이 최초이며 이후 삼신불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큰 규모의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 안에는 대개 삼신불상을 봉안하고 후불탱으로서 삼신불탱을 봉안하였다.
노사나불
대웅보전 안에 모셔진 삼존불은 중앙 법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응신 석가여래와 보신 노사나불이 협시한 삼신불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 허리둘레 390㎝인데 소조상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현존하는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석가보니불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른데,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취하였다.
추래암 삼층탑
비보탑으로 보이며 근접해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인다.
추래암 마애지장보살의상.마애여래의좌상
추래암? 암자가 아니다. 법주사에서 부도전을 거쳐 수정암으로 향하는 길목의 거대한 바위를 칭한다. 추래암은 속리산 수정봉 부근에 있었는데 속리산을 관장하는 산신이 수정봉과 어울리지 않은 바위를 발견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뜨려서 추래암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여래의좌상으로 불리는데 의상이란 원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되고 있다.
조각상의 전체 높이는 5m이다.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여래의상 좌측하단 암각화
짐을 싣고 있는 말,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음각한 암각화이다. 이는 창건주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냈다고 추측하는 암각화다.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이다. 왼손에는 지장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보살로 추정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각의 지장보살은 바로 마애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으로 새겼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지장보살상 상단의 홈과 마애보살상 상단의 홈(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으로 판단컨데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부도밭. 2기의 부도와 4기의 탑비가 두 줄로 세워져 있다. 앞줄의 부도는 1949년 조성한 석상 스님과 1975년 조성한 금오당 태전 스님의 부도이다. 뒷줄의 탑비는 바깥쪽이 석상 스님과 태전 스님의 것이고, 가운데 둘은 1927년 조성한 진하 스님과 역시 1927년에 조성한 탄응 스님의 비이다.
법주사에는 이미 답사기를 올린 여적암 다층석탑. 금강골 쌍탑. 순조태실 외에도 산내 암자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법주사 경내의 전각 후불탱화.성보박물관의 유물을 비롯하여 조선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제사를 지냈던 ‘선희궁 원당’도 둘러봐야 할 답사처이다. 경내를 벗어난 산내암자에도 옛님은 자리하고 있다. 수정암 석조보살 좌상,복천암 극락보전, 목조삼존불, 후불탱, 부도, 상고암 마애불상군, 비마라사 석불입상 등이 모셔져 있다. 그런 연유로 법주사는 암자 답사를 감안하여 하룻밤 이틀 낮으로 동선을 수립하면 좋을 것 같다. 2012.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