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사
혜철대사가 이곳에 주석하기 이전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有舍名曰大安其寺也”라는 기록인데 사(舍)라 칭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의 규모는 매우 초라한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혜철대사 주석 이후 태안사는 매우 번창하게 되되었다. 혜철대사가 이곳 동리산을 선문의 장소로 택한 이유에 대해 “谷城郡 동남쪽에 산이 있어 桐裏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집이 있어 大安이라 이름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로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이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 선사가 석장을 들고 와서 둘러보고 머물 뜻이 있어 이에 敎化의 장을 열고 자질 있는 사람을 받아 들였다”라고 하였다. 즉, 경치가 좋으며,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 수행하기에 좋다는 것이 이곳에 선문을 연 계기가 되고 있다.
언제 혜철대사가 이곳에 선문을 열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성왕(文聖王) 9년(847) 이전에는 이곳에 주석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의 사찰현황은 알 수 없다. 태안사지(泰安寺志)의 편사(片史)에는 혜철대사의 손제자(孫弟子)인 광자대사 윤다(允多)가 중창한 당시의 이 사찰현황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태조(高麗太祖) 이십년경(二十年頃) 광자선사(廣慈禪師) 중창당시불상간각(重創當時佛像間閣)”이라는 제목 하에 여러 전각에 대한 매우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금당의 당주가 약사여래철조좌상(藥師如來鐵造坐像)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식당의 당주도 약사철조좌상(藥師鐵造坐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태안사는 초기에 약사여래를 매우 중시했던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 규모가 총 40여동의 건물에 110여 간이었다고 한다. 이때 태안사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추정된다.
광자대사 윤다의 입적이후 1684년까지의 태안사의 세부적인 역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223년에는 무신정권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가 태안사를 중건했다는 것과, 조선 초 효령대군이 태안사에 머물렀다는 것을 여러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안사는 동리산에 위치하고 있다(泰安寺 在桐裏山)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에도 역시 태안사는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1684년에 태안사가 중창되었던 사실은 사적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지도서의 기록 역시 태안사가 동리산에 있다(泰安寺 在縣南五十里 桐裡山)는 기록이 있어 조선후기에도 태안사가 계속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태안사의 사적기로는 근래에 만들어진 동리산태안사적과 태안사사적을 들 수 있는데, 그 기록에 있어 매우 자세하며, 다른 사찰의 사적과는 달리 매우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렇듯 계속 사세를 유지해 오다가 한국전쟁 당시 태안사는 능파각, 일주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게 되었다. 그 당시 곡성경찰서를 태안사로 옮겼으며, 여기서 계속적으로 항쟁을 계속했고 최후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순직하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태안사는 대웅전을 비롯한 15개동의 거의 대부분 전각을 잃게 되었다. 이후 1969년 대웅전을 복원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적인 불사를 진행해 옛 모습을 찾아가려고 노력중이다.
자료출처: 전통사찰관광안내
태안사능파각
시도유형문화재 제82호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이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라 이름하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한다.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43년(1767)에 다시 지었다. 다리를 건너는 쪽에서 보았을 때 앞면 1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하여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배치하는 주심포 양식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동물상을 조각한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리와 문·누각의 역할을 함께 하도록 지은 특이한 건물이다.
태안사 일주문
시도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으로, 능파각에서 약 200m쯤 지나 높직한 돌계단에 올라서 있다. 조선 숙종 9년(1683)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앞·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 들며, 매우 화려하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태안사 광자대사탑
보물 제274호
태안사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광자대사는 대안사의 2대 조사(祖師)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法身)이고 법명은 윤다(允多)이다. 탑의 형태는 바닥돌부터 꼭대기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모습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받침이 올려져 있다. 윗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몸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흔하지 않게 머리장식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며, 각 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조화롭다.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보물 제275호
태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대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나,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몸돌의 파손으로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는 줄을 친 후 새겨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한 힘이 느껴지고 은은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통일신라에 비하여 서예가 훨씬 발전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곳곳의 여러 조각들을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참신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950)에 세운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태안사 보제루
태안사 종각
태안사 요사
태안사 해회당
태안사 대웅전
태안사 대웅전내
태안사 삼성각
태안사 전경
태안사 약사전
태안사 약사전내
태안사 적묵당
적인선사탑 입구
태안사 적인선사탑
보물 제273호
이 탑은 승려 적인선사 혜철의 탑으로, 혜철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대안사는 신라시대 선(禪)을 가르치는 유명한 종파인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높으며, 적인선사 혜철(惠哲)은 대안사가 속한 동이산파를 연 스님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탑 옆의 비문을 보면,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태안사 적인선사탑비
태안사 요사
태안사 요사
태안사 해우소
태안사 보제루
태안사 삼층석탑
태안사 삼층석탑
문화재자료 제170호
태안사 내 연못 중앙에 마련된 작은 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절 내의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基壇)의 한쪽 면과 탑신(塔身)의 1층 지붕돌, 2·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보충하여,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갖추고 있다. 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다란 풍채를 보인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으며, 윗면에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낮은 장식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들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긴 하나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태안사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석곡 나들목 → 18번 국도 → 태안교 우회전 → 원달방향 약 5㎞진행 후 좌회전 → 태안사 도착
2) 남해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서순천 나들목 → 17번 국도 (구례방향 약 10㎞) → 괴목삼거리 좌회전 (월등방향 4㎞) → 죽곡방향으로 약 6㎞ 진행후 우회전 → 태안사 도착
3) 곡성읍 → 17번 국도 (구례방향 약16km) → 압록유원지 우회전 → 18번 국도 (죽곡방향 약6km) → 태안교 좌회전 → 원달방향 약 5㎞ 진행 후 좌회전 → 태안사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