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일 쇠날
날씨: 아침은 제법 춥다. 옷깃을 여민다. 어제 비가 온 탓일까, 미세먼지가 없어보여서 안심한다.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을까 고민하지만 이 맑은 하늘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미세먼지 가득한 지구에서, 다시 맑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사진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다짐한다. 아침에 이런 생각을 한다는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는데 버스를 보낼 뻔 했다. 얼른 현실로 돌아온다.
겪은 일; 아침열기- 농사수업(밭 정리, 폐 파레트 줍기)- 점심 식사- 그림그리기(개똥산에 가서 그림 그리고 냉이와 쑥 캐기)- 새참만들기 (쑥, 냉이튀김)- 모두 마침회- 교사 마침회
[운수좋은 날 / 선생은 더 기분 좋은 누리샘]
오늘 아침은 무언가 하나씩 엇나가는 일들이 많았다. 온수기를 틀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찬물로 목욕을 했고,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찍을까 다짐하다가 버스를 놓칠 뻔 했고, 관문사거리 정류장에서 내리려고 일찍부터 채비를 했는데 교통카드가 찍히지 않아서 하마터면 내리지 못할 뻔 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누른 줄 알고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다가, 신호가 바뀌지 않아서 한번 더 신호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 사소한 불행들이 쌓이는 것이 불안했다. 사소한 징크스에 의미부여를 하는 성격이라, 오늘 하루는 얼마나 더 많은 불행들이 나를 기다릴까? 걱정하며 출근하였다.
날은 차지만 하늘은 아름답다. 오늘은 꼭 어린이들과 아침걷기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리 다짐한다. 어린이들이 늦는다. 본디 일찍 오던 어린이도 오늘은 늦는다. 아직 내 불행은 끝이 아닌 것인가. 그래도 9시에 다들 맞춰 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밖에서 공부하며 노는 공부를 하는 날이다. 아침엔 밭에 가서 흠뻑 농사일에 빠져보고, 낮에는 들로 나가서 피사체를 정하던가, 아니면 자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저마다의 기분 따위를 시, 글, 그림 따위로 표현하는 시간이다. 분명 텃밭을 간다고 하면 텃밭에 가지 말고 차라리 수학을 하자는 어린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림을 그리자고 해도 마찬가지 일 거라. 그래도 막상 공부를 시작하면 맑은샘학교 어린이들 중 공부에 몰입하는 어린이들이다.
오늘은 그 전부터 계획을 세우던 1학년과 함께 틀텃밭을 만들기로 한 날이다. 틀텃밭이란, 한 이랑에 나무 따위로 틀을 만든 다음, 농부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틀텃밭을 하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학교에 나무가 충분치 않아서 마을 둘레를 돌아다니며 나무를 구하기로 한다. 마침 2학년도 틀텃밭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1,2,5학년이 함께 나무를 구하러 다닌다. 일주일전에 누리샘 어린이들과 마을 걷기를 하며 공사 현장에 잔뜩 쌓여있는 파레트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나무가 여전히 잘 있나 살피러 둘러 걸어본다. 여전히 그 공사현장은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비계(건물을 지을 때, 인부들의 안전을 위해 세워둔 구조물)를 철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앞에는 여전히 파레트가 잔뜩 쌓여있었다. 가져가도 되냐고 물으니, 비계를 다 철거하면 가져가라고 흔쾌히 말씀하신다. 앞으로 누리샘과 일놀이로 나무를 많이 쓸 생각이었는데 마침 좋은 나무를 구할 수 있어서 고마운 마음을 가득 안고 놀이터로 향한다. 1,2학년 동생들이 있어서 바로 일을 할 수는 없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텃밭에 가서 텃밭공부를 할 참이다.
놀이터에서 선생과 어린이들이 다방구를 한다. 본디 운동을 위한 기구들이 많은 놀이터여서 다방구를 하지 않는 어린이들은 여러 운동기구를 타본다. 그러다 한울이가 혼자 놀다가 눈을 살짝 부딪힌 듯하다. 놀라서 권진숙 선생님과 가보니, 눈 둘레에 살짝 상처가 나서 얼른 다방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 텃밭 공부 할 채비를 한다. 본디 농기구는 낮은 학년 어린이들은 만지지 않고 높은 학년 형님들이 챙기는 것인데, 5학년 형님들이 척척 잘 챙긴다. 선생과 있을 땐 어리광도 많이 부리고 꽤도 많이 내는 어린이들이지만 동생들 앞에선 제법 형님다운 모습을 자주 보인다.
모둠마다 한해 동안 농사를 지을 텃밭을 고르고 밭을 살핀다. 아직 1,2학년 어린이들은 삽과 쇠스랑을 잡고 쓸 손힘이 없어서 5학년 형님들과 선생이 1,2학년 밭도 살핀다. 지난 주 텃밭 공부 때 쇠스랑과 삽질하는 공부를 해주었는데, 제법 자세가 나온다.
텃밭 공부를 마치고 낮은샘 어린이들은 숲 속 놀이터에서 놀고, 누리샘 어린이들과 노학선생님과 같이 아침에 봐두었던 폐 파레트를 가지러 간다. 파레트가 제법 많아서 수레를 가지고 가니, 어느새 짐칸에 아이들이 타있다. 선생도 어렸을 때 수레가 있으면 잘 타고 놀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린이들의 놀고 싶은 마음은 다 같은 모양이다. 찻길을 잘 살피고 어린이들과 수레를 타며 재밌게 놀고 나무를 가져온다. 파레트를 가득 실은 수레를 선생 혼자 운전을 못할 듯해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본디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던 어린이도 참을성을 가지고 학교까지 쉬지 않고 닿았다. 진지함보단 장난스러움이 더 많았던 어린이도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동무들과 힘을 모았다. 이래서 높은샘 형님이구나 싶더라. 아쉽게도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파레트 분해는 노학섭 선생님과 둘이 함께 한다. 파레트는 많이 남았으니 어린이들과 천천히 파레트로 나무 공부를 시작하면 될 듯하다. 누리샘 어린이들과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무궁무진하다. 어린이들도 학기 초 밑그림을 살필 때 나무로 만드는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무를 많이 얻을 수 있어 다행이다. 오늘 줄곧 음식을 하자고 보채길래, 오늘 낮공부로는 개똥산에 있는 냉이와 쑥을 캐고 그것들을 그린다음, 새참으로 쑥과 냉이를 튀겨먹자고 약속했다. 점심에 학교에 부족한 비품을 사오고 돌아와서 하루생활글을 읽고 있는데, 우철이가 교사실로 들어와서 수학공부 물음을 한다. 요즘 누리샘에선 분수 공부에 애를 많이 쓰고 있는데 우철이도 많이 쓰고 있는 어린이중 한명이다. 우철이가 선생님들 방에 들어와서 놀아달라는 말은 많이 했지만, 공부 물음을 하러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요즘 영어공부와 우리나라 알기 공부에서도 눈빛이 초롱초롱 했었는데, 쉬는 시간에도 공부에 대한 물음이 있어서 들어온 우철이를 보고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했지만 쉬는 시간엔 흠뻑 쉬는 것도 좋은 것이라. 그래도 좋은 모습이고 좋은 변화라고 기쁘게 받아드려진다.
점심을 먹고 그림공책과 호미를 챙겨서 개똥산으로 향한다. 새참으로 냉이튀김을 해 먹을 요량으로 냉이를 잔뜩 뜯을 생각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선생도 들뜬 마음으로 개똥산으로 향한다. 쑥과 냉이를 잔뜩 캘 요량이었지만, 어린이들이 헷갈려 하는 탓에 생각보다 많이 뜯진 못하고 냉이 대신 호미를 저마다 그린다. 저마다 자리를 잡고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공기를 느껴보라고 일러준다. 선생의 말이 충분히 전달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날씨를 흠뻑 느끼며 그림을 그린다면 훗날 쓸모 있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
지우개를 까먹고 가져오지 못 한터라, 지우개가 있는 지환이와 예준이의 지우개를 돌려서 쓴다. 우철이가 지우개가 줄곧 필요한지 ‘지우개 사려~’를 외치며 지우개를 빌리러 다닌다. 지환이가 ‘지우개 줘!’ 라고 부르자 우철이가 잘 안들렸는지 다시 한번 물어본다. 중간에 있는 종현이가 ‘지환이가 지우개 달래.’ 라고 말하니 우철이가 ‘지우개를 달래주라고?’ 라고 하며 지환이 앞에서 지우개를 쓰다듬으며 지우개를 달래준다. 그 모습을 보고 누리샘 어린이들과 선생 모두 웃음이 빵 터져서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3월 들어서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크게 웃었다. 냉이와 쑥을 캐고 돌아오며 어린이들은 그것들을 다듬고, 나는 튀김을 위한 채비를 한다.
깨끗이 손질한 냉이와 쑥을 보니 여간 먹음직스러울 수가 없다. 같이 반죽을 하고 저마다 한 젓가락씩 기름에 튀긴다. 마지막은 선생이 남은 반죽을 튀기는데, 튀겨지는 소리마저 먹음직스럽다. 본디 어린이들은 단 맛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반죽에 설탕을 넣어보며 한 꼬집씩 먹어보라고 하니 다들 몇 꼬집씩 더 집는다. 본디 냉이와 쑥을 한껏 뜯어서 학교 전체로 새참을 나누어 먹을 생각이었지만, 양이 많지 않아서 이번주에 줄곧 우리의 새참을 챙겨준 푸른샘 동생들과 나누어 먹기로 한다. 다음에는 꼭 전체로 새참을 나누어 먹어야겠다.
청소시간이 되어 다들 청소를 하러 들어가고, 뒷정리는 내가 하기로 한다. 이번주는 바깥에서 청소를 살피는 역할이어서 어린이들의 분리수거와 바깥청소를 살핀다. 쇠날은 쓰레기들을 모두 정리해서 도로가에 두어야 한다. 어린이들은 하기 어려울 수 있어 선생이 줄곧 챙겨왔는데 오늘따라 쓰레기도 많고 정리할 것도 많아서 모두 마침회를 늦게 들어갔다. 이번주에 다친 어린이, 다칠 뻔 한 어린이들이 많은데 모든 선생님이 안전에 관한 말을 꺼내신다. 특히 봄이되면 봄이되면 어른들도 들떠서 사고가 많이 일어나니, 어린이들은 오죽하랴. 선생도 줄곧 잘 살펴야겠다. 마침회를 하고 있는 도중에 글모음책이 학교로 배달이 되었다. 지난 한해 어린이들 공부의 기록장이자, 맑은샘 학교의 중요한 자산이기도 한 글모음을 보니 또 설레었다. 글모음을 펴내면서 많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고생,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한해의 기록이 왔다는 사실에 말이다. 글모음을 나누어주고, 선생님들 방으로 돌아오니 다들 글모음을 읽고 계신다. 나도 흠뻑 젖어 우리가 펴낸 책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며 책을 읽다 마침회를 할 시간이 되어 마침회를 한다.
마침회를 하고 하루생활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기분이 좋다. 교사실 밖에선 오늘 학교살이를 하는 옹달샘 어린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다.
그동안 미세먼지 탓에 선생이 계획한 바깥활동과 일놀이들을 거의 하지 못하고 교실에서 줄곧 수업을 해왔다. 내가 계획하고 어린이들이 바라는 수업은 이런 수업이 아닐 것이라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한해 공부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바깥에서 몸으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린이와 선생 모두에게 슬픈 일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나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 드디어 바깥에서 줄곧 수업을 해보니, 내가 맑은샘 학교의 선생이 되고자 먹었던 첫 마음이 떠올랐다. 어린이는 위대한 자연에서 공부하고 자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일뿐, 뭘 가르치거나 꼰대 노릇을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닐 것이다. 아침부터 바깥에서 공부를 하니 어린이들 표정이 잠깐은 좋지 않았지만 서로 부대끼며 있으니 무척 행복해보였다. 그동안 그렇게 공부를 하지 못해 어린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다음주부턴 바깥에서 할 수 있는 공부들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내가 오늘은 처음으로 (?) 좋은 선생 노릇을 한 것 같아서 줄곧 기분이 좋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불운한 일들은, 오늘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다.
첫댓글 텃밭보다는 수학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우철이의 깨알재간에 놀라고,
저녁에 먹은 냉이 튀김이 맛있어 놀라는 하루입니다~~~^^
(종현이가 냉이튀김을 하자고 어찌나 졸라대던지요)
하하하.. 우철이때문에 한참 웃었습니다. 뭐 그 전에 첫문단에서 선생님이 귀엽게 느껴져서 웃은것도 있습니다만.. ㅎㅎ
아이들과 생활에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는 선생님들이 계신 곳에 내 아이가 있다는 것이 제게는 큰 복입니다
한울이 상처는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그렇다면...
한울이도 누리샘이 되면 '이래서 높은샘 형님이구나' 싶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