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디 할머니
모처럼 단편 소설집을 한 권 집어 들었다. 교보문고 입구에 전시된 박완서 작가 별세, 15주년으로 그의 단편 소설 10편을 소개한 모음 책이다. 박완서 선생은 왼편에 가깝고, 박경리 선생은 오른편에 확실하게 선 분이다. 거의 동시대 일제 때 고녀 출신이고, 1931년생 박완서는 개풍분이지만 경기여고를, 1926년생 박경리는 통영분이지만 진주여고 출신이다.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를 장중하고 철학적 문체로 거대한 역사적 시야를 그리지만, 박완서는 현실 작가로 대학 1년 소녀 때, 맞은 동족상잔으로 현실의 위선과 욕망과 가족 관계를 자주 그리는데, 전쟁 트라우마가 약간 남아 있는지 그는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여러 작품에서 소재로 쓰며 왼쪽 입장이 짙게 풍자적으로 그린다.
쥬디 할머니 일과는 손주가 많이 있지만 유독 쥬디 사진을 확대해 놓고 사진하고 뽀뽀하는 것이 일과다. 오 남매 중 막대 아들만 미혼이고 나머지는 도두 출가하여 외국에 살고, 돌아간 남편 독사진까지 모두 6개의 사진을 자개 액자에 넣어 거실에 진열하고 있다. 그는 손주가 열 명인데 모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누가 손위인지도 가끔 헷갈린다. 외국에 사는 손주는 ‘알렉산더’니 ‘캐서린’이나 하는 서양 이름이라 발음도 서툴렸다. 그러나 막내 쥬디는 예외다. 쥬디는 쥐띠여서 외기 쉬웠던 모양이다. 올해 열 살인 쥬디의 서너 살 때의 예쁜 사진이다. 혼자 사는 신식 할머니가 쥬디 사진을 마주하고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손님이 왔다. 같은 층 3호의 상환이 엄마다. (아마 강남의 복도식 15층 아파트가 소재인 듯하다) 쥬디 할머니는 인심 좋고, 젊은 엄마들을 앞지르게 유식해서 이사 온 지 일 년도 못 됐지만, 같은 층에서 흉허물없이 드나들고 따르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세계 일주도 하시고 세상 잘 만나, 자녀들 잘 두셔서 노인네가 해마다 외국 구경을 하시는데 저희 들 사이에는 복 많은 할머니로 통한다며 부러워한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도 딸보다 야한 루즈를 바르고 코르셋으로 엉덩이를 치키고, 심심하면 다이어트 흉내까지 냈다. 그러나 쥬디 할머니의 젊음은 그런 억지 하곤 본질적으로 달랐다.
쥬디 할머니는 권태로운 듯 은에 칠보를 입힌 우아한 담배합을 끌어당겨서 담배를 꺼내 꼬나무는 포즈가 보기 좋을 수 없었다. 소녀처럼 곧은 머리는 빗어 올리기 전이어서 뒤에서 묶은 채인 게 반백이었음에도 어색하지 않았고, 벌어진 나이트가운 사이로 은은하게 드러난 앞가슴은 희고 아직도 풍만했고, 포갠 다리에서 엉덩이까지의 선은 선정적이었다.
상환 엄마는 시어머니 흉을 보기 시작했다. 속초에서 시어머님이 올라오셨는데 글쎄 또 이런 걸 잔뜩 가지고 오셨지, 뭐예요. 노자나 빼신다고요. 여자가 입을 삐죽거리며 흉을 보기 시작했다. 아들 며느리에게 “신세 지기 싫어져 그러시는 거 아닌가“ 쥬디 할머니는 점잖게 타이르고 오징어를 큰 걸로 두 축이나 내놓았다. 미국에 부치련다. 한다. 그리고 손님에게 쥬스를 한 잔 내놓는다. 상환 엄마는 막내 아들 좋은 소식이 없냐 물으면서 중매를 서려고 한다. 규수 가문이 학벌이나 인물이 어디 내놓아도 꿀릴 데 없으니까 말씀드린단다. 제 외사촌 동생인데, 저희 외삼촌은 국회의원이시고, 기업체도 몇 가지고 계시고, 규수는 명문대학 영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곧 미국 유학한단다. 쥬디 할머니 아들은 현대 ‘스탠퍼드’에서 박사 과정 중이다. 글쎄 언제 한번 봅시다. 정식으로는 곤란하고 뜨뜻미지근하게 말한다. 여자는 쥬디 할머니에게 규수의 사주가 적힌 정보를 주면서 아파트에 궁합 잘 보는 점쟁이 집까지 소개했다.
상환 엄마는 7호 집과 같이 점쟁이 집에 갔는데, 제 남편이 박사라며 점쟁이 박사를 사기꾼 취급하더니 제 식구를 대는데, 작년에 수영하러 갔다가 익사한 장남을 눈 하나 까다 딱하지 않고 넣었다. 제 딴은 점쟁이를 시험하자는 속셈이었다. 그랬더니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는데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다, 혀를 내두르고 벌벌 떨었단다. 덕분에 7호는 쫓겨났지만, 점쟁이가 용하다는 소문은 신문광고에 낸 것보다 더 펴졌다. 아래층 4호는 할머니네 밑에 사는 집이다. 근데 우리 층 8호하고 그 집으로 점을 보러 갔다가 탄로가 났다. 점쟁이가 대쯤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 펴 보이며 당신 이거지? 그러더라지 뭐야? 그 일이 있고부터 4호가 8호 한때 쩔쩔매는 건 말도 못 해요. 그 소문은 한 입 건너 두 입, 쑤군쑤군, 쏙달쏙달, 지금 우리 아파트에 그 여자를 아는 사람치고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요. 할머니는 그 여자의 수다를 대범하게 들어넘겼다.
할머니는 슈퍼마켓 위 상가 4층 건물의 인생 문제 연구소 주 박사의 점쟁이 집을 찾았다. 매표소에서 번호표를 받고 정해진 시간에 갔는데도 대기실에는 사람이 다섯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들이 묻지도 않는데 할머니는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막내 아들 궁합 보러왔다고. 벌써 몇 년째 외국에 있는데 아들이 데리고 살 색시를 늙은 어미한테 골라 보내라니 외국물 헛먹었다”고 너스레를 펼친다. 상담실 벨이 울리고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작고 피곤한 얼굴의 대머리가 가까스로 위엄을 지키고 있었다. “박사님 제가 노망이 들었는지 아들의 생년월일도 적어둔 것을 봐야 한다니까요“ 맨 밑의 수첩을 꺼내기 위해 핸드백을 쑤시는 동안 덩달아서 항공우편 봉투가 꾸역꾸역 빠져나오고 있었다. 수첩을 꺼내서 맏아들 부부부터 신수를 보기 시작했다. “아드님 잘 두셨군요. 드문 사줍니다. 열 명에 하나 아니 백 명에 하난 있을까? 말까? 한 사준데요.“ ”어데 가서 물어봐도 그러더군요. 실제가 또 그렇고요“.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 점을 할머니가 치고 물어보는 것은 주 박사였다. 자식 오 남매가 하나같이 드물게 좋은 사주를 타고났고 그 좋은 사주가 보장한 인생을 할머니는 자신이 만든 예술품을 전시하듯이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주 박사가 정신이 들면서 이런 상팔자 노인이 무엇 때문에 점을 치러 왔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을 때는 할머니가 딴 종이를 꺼내며 막내와 색싯감의 궁합을 보아달랄 때였다. 뭐 늦었지만 적절한 때였다. 주 박사는 여태껏 수세에서 기고만장해졌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팽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북을 치니까 꽹과리 치는 격으로 할머니가 장단을 맞추느라 초조하게 애가 탄 시늉을 한다. 연애냐? 중매냐? 를 묻고 중매라니 다행이라며, 이런 백호살이 뚜렷한 규수를 이 잘난 신랑에게 감히 갔다 대다니, 없단 걸로 하세요! 백호살이야 인생 달고 다니는 것이니까?, 쯧쯧 좋은 집안에 나무랄 데 없는 규수인데!, 주 박사는 행여 미련 두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들어갈 때 태도를 버리고 친화감 넘치는 시선으로 대기 중인 여자를 훑어보면서 주 박사의 인생연구소를 나선다.
할머니가 귀가하려 누른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침 상환 엄마가 나오면서 ”아이고! 쥬디 할머니 어디 갔다. 오세요? “친구를 배웅하기 위해 아래층까지 내려온 것이다. 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그 친구의 얼굴을 보자 후딱 엘리베이터로 오르고 말았다. 친구는 상환 엄마에게 ”너 그 할머니 아니”. “옆집 쥬디 할머니야!” “쥬디가 개냐 고양이냐?” “미국에 살고 있는 손녀 이름이야.” “얘 너 수다 좀 그만 떨고 내 얘기를 들어 봐!” “친구야 너 그 할머니하고 그전부터 아는 사이냐?” “아는 사이? 알면 이만저만 아는 사이? 그 여자 우리 큰아버지 세컨드이었잖아.” 그의 큰아버지는 국회의원 경력에다 A 상사 창업주며, 장관 경력도 있다. “화려한 경력 어른처럼 다 들어먹고 돌아가셨지만, 아마 저 할망구가 반은 넘게 빼돌렸을 겨야. 여전히 호화판으로 산다는 소문은 듣고 있지만, 이 정도의 아파트라면 별로다 얘. 하긴 혼자니까 삼십 평도 관람하긴 하지.“
쥬디 할머니가 허둥지둥 돌아온 아파트의 방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공허했다. 할머니는 식탁에 앉으면서 식탁으로 몸을 던졌다. 식탁이 기우뚱하며 쥬디 사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듣지 못했다. 할머니의 귓속에선 여자들의 수많은 입이 쑥덕거리고 깔깔거리는 소리가 한 덩어리의 날카로운 아우성이 되어 점점 기승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힘이 되어 겨우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의 둘레엔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거의 촉각으로 전화기를 돌리고 있었다. “부동산 이사장이야? 난데! 우리 아파트 좀 급히 처분해 줘야겠어, 물론 대신 하나 사줘야지. 혼자 살아도 큰 게 낫겠어. 이웃을 봐야 하니까 상종 안 해도 이웃은 이웃 아냐. 이웃이 정떨어지니까 한시가 급해. 처분될 때까지 농장에 내려가 있을까 봐. 밑져도 할 수 없지. 부탁해.” 말이란 것 좋은 거였다. 말하니까 한결 기운이 났다. 그래 난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울타리를. 할머니는 서둘러 간단한 여장을 꾸렸다. 짐을 챙기느라 흩어진 잡동사니를 발로 대강 그러모았다. 그 중엔 쥬디 사진도 있었다.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그건 그냥 잡동사니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거야. 할머니는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1981)
2026.03.09
쥬디 할머니
박완서 단편 소설
문학동네
첫댓글
소설 한 권을
섬세한 정서는 잘 몰라도
한 페이지로 단숨에 읽었네요.
여러 장르를
섭렵하는 것도
맛깔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