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야마구치 여행2 - 조슈번의 옛 수도인 동해의 하기시를 찾아 옛일을 생각하다!
일본의 47개 지방 중에 단 한명의 총리도 배출하지 못한 현이 수두룩한데... 이토 히로부미에서
아베 신조 까지 총리 8명을 배출한 야마구치현의 시모노세키 에서, 산음 본선 이소카제
특급 기차 를 타고 바다를 끼고 북상해서는 나가토 (長門 장문) 를 거쳐 두시간이 채 안되어
모리씨 가 다스리던 옛날 조슈번의 수도 인 하기시 히가시하기 (東秋 동하기) 역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히가시하기 역에서 내리지만 특급 기차는 계속 달려 야마구치시 로 가는 삼거리인 마스다
ますだ 益田(익전) 역을 지나서 요나코 까지 가는데.... 이제는 특급이 없어졌으니 시모노세키
에서 후쓰 (普通 보통, 완행) 를 타야 하는데, 열차에 따라서는 나가토 長門(장문) 역에서 한번
갈아타거나..... 또는 고구시 小串(소환) 역 과 나가토 長門(장문) 역 에서 2번 갈아 타야 합니다.
동해 (일본해) 바닷가에 자리한 하기(秋 추) 시는 옛 조슈번(야마구치) 모리씨의 수도 로 현재 인구
5만의 소도시인데.... 한때 서부 일본과 북규슈등 7개국을 지배하며 히로시마 에 큰 성을
쌓고 위세를 떨렸던 모리씨 가문이 변두리 벽촌인 동해 (일본해) 바닷가로 쫃겨온 사연 이 있습니다.
일본의 270개 번 중에서도 조슈번(야마구치) 에서는 중신들이 번주에게 매년 새해 문안인사 를
할때 “주군! 올해는 막부를 쳐야하지 않겠습니까? - 아니야, 아직은 때가 아니야! ”
라고 268년간 저런 문답이 이어져 내려왔다는데 실제로는 간크게도 저리 말하기야 했겠습니까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인 1600년에 일본의 운명을 가르는 동서 20만 대군 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가 벌어졌는데.... 비와 호수 너머 동북쪽 주전투 현장에 집결한
병사는 20만명 이지만.... 여러 지방에서 싸운 병력까지 합치면 30만 이 훨씬 넘었습니다.
정유재란 때 왜군 14만, 명군 11만7천에 조선군 3만8천등 30만이 채 안되는데 비해 큰규모로,
야마구치등 서일본 6국의 대영주 모리 데루모토 는 의리 때문에 도요토미씨의 어린 아들
을 야심 만만한 도쿠가와씨 로 부터 지키고자 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진영에 참가합니다.
임진왜란에서 가토 기요마사등 다른 장수들이 간신히 1만 을 동원한데 비해 모리씨는 3만을 동원
했는데.... 세키가하라에도 2만 5천 대군을 동원했지만 야심이 없는지라 모리씨는 부하 장수
들만 전장에 보내고 자신은 오사카성 에 머물면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등 소극적이라 패합니다.
이때 부하 장수로 모리씨 일족의 사촌 동생인 깃카와 히로이에 는 모리 가문의 존속 을 위해
동군인 구로다 나가마사 를 통해 사전에 밀약 하고는..... 전투시 동군측으로 돌아서서
서군 안코쿠지와 조쇼카베 등 일부 부대가 전투에 참가하려는 길목을 차단하고 방해 합니다.
깃카와 히로이에 의 부친인 모리 모토하루 는 모리 가문의 창시자인 모토나리의 차남 으로
깃카와가에 양자 로 갔으니, 성(性) 은 달라도 모리 데루모토와는 핏줄로 4촌 인데...
모토나리는 아들 셋에게 화살 한대에 비해 3대를 부러뜨리기는 어렵다는 고사 를 남겼지요?
모토나리는 3형제가 단결 하고 교토 정치에 관심 갖지 말고 신중하라는 유훈 을 남긴건데...
깃카와 히로이에 는 임진왜란 때는 4천명을 이끌고 모리 데루모토 부대의 선봉 에
서서 행주산성 전투 에 참가하여 제2 목책을 불사르는 과정에서 부상 을 당한 바도 있습니다.
모리 데루모토 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선조의 유훈 때문인 것 일까요?
1600년 패전후 모리 가문은 멸망의 위기 를 맞았으나,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에 섰던
깃카와 씨가 도쿠가와에게 읍소 하는등 적극적인 주선으로 모리씨는 6국 120만석 에서....
히로시마와 북규슈등 4국 84만석을 빼앗기고 30% 에 불과한 "스오와 나가토
2국 36만석 으로 조슈번" 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는데.... 깃카와 씨는
조슈번의 동쪽 이웃인 이와쿠니국 번주 가 되어 긴타이교 다리 를 건설합니다.
그럼 원래 모리씨 가문으로 이웃인 깃카와 가문에 양자로 왔던 깃카와 히로이에
는 자기 주군 모리씨 에게는 역적 인가? 아님 2국으로 조슈번 이라도
보존하게 주선을 했으니 충신 인가?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 絶命詩 가 있으니....
무사로 전하여지는 것이야말로 아마도 본래의 삶인가 하노라.
( 武夫の取り伝へたる梓弓 かへるやもとの栖なるらん ) 라....
*** 모리씨는 저 백제계 오우치 요시타카의 영지중 山城(산성, 교토) 만 빼고 모두 차지했다 ***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주군을 배신한 가장 극적인 사건은 “혼노지의 변” 이었으니.....
오와리(나고야)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 는 1582년 6월 동쪽의 효웅 가이국 다케다씨 를
멸망시키고 일본의 중부 지방과 교토를 손에 넣었으니 일본을 반쯤 통일 한지라 이제
이즈모 까지 7국 을 지배하는 서쪽 히로시마 의 강대한 적인 모리 毛利 씨 를 공격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모리씨 토벌 을 명하니 오카야마의 다카마츠성
高松城(고송성) 을 포위했는데..... 성주는 시미즈 무네하루 로 결사 항전을 합니다.
히데요시 는 구로다 요시타카(간베에) 의 진언으로 강을 막아 터뜨리는 수공 작전을 씁니다.
히데요시는 수공작전 중에 노부나가 암살 정보를 듣고 사력을 다해 공격해 성을 함락 시키는데
시미즈 무네하루 는 십여년 전에 모리 데루모토 가 동진하여 오카야마현 서부에 해당
하는 빗츄의 미무라씨를 칠때 항복한 자 인데.... 이번에는 모리씨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전에 오카야마현 동부 비젠의 우키다 나오이에 는 동서 양쪽의 두 세력으로 부터 협공을
당하니 자력으로 2곳 적을 막을수는 없는지라.... 서쪽에 모리군의 압박 을 견디다 못해
동쪽 오다 노부나가에게 귀의 하며 아들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田秀家) 를 인질로 바칩니다.
우키다 히데이에 는 노부나가의 부장 히데요시 에게 맡겨지는데, 인질로 바쳐진
어린 나이에도 주눅이 들지 않고 총명해서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으니...
훗날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 로 히데요시의 양녀가 된 고히메와 결혼 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서 임진왜란 때는 제8군 1만 병력 으로 젊은 나이에도 총사령관 을 지냈으며....
정유재란때는 모리 데루모토가 우군, 그는 좌군의 총수 가 되어 남원과 전주 를 점령합니다.
정유재란때 총사령관도 어린 고바야카와 가 맡았으니 히데요시는 신임할수 있는 핏줄을 택했다는?
히데요시는 간토에 150만석을 가진 거대한 세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가 전공을 세울까 두려워 조선에
파병하지도 않았으니.... 예전에 모리 데루모토 는 노부나가 견제 를 위해 무라카미 수군 을 혼간지
(本願寺 오오사카) 에 파견해 첫번째 전투는 승리했으나, 두번째는 구키 요시다카 의 수군에 패배했습니다.
이 구키 가 시코쿠의 도도 다카토라 와 더불어 임진왜란때 일본 수군 을 이끌게 되는데, 7개국
영주 모리씨 는 노부나가 사후 교토를 평정한 히데요시에게 굴복 합니다만.... 히데요시는
7국 중에 이즈모만 뺏고는 나머지 6국은 모리씨의 수중에 남겨 규슈 시마즈씨를 치도록 합니다.
이후 1585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과 다음 해에 규슈의 90% 를 통일한 사쓰마군 을 치자
모리씨 는 선봉에 서서 무공을 세워 주고쿠(中國) 6국 120만석 영주 를 유지한 것입니다.
사쓰마 (가고시마) 의 시마즈씨는 숱한 전투를 통해 용맹을 떨쳐서 규슈를 거의 평정
했다가 영지를 잃은 규슈 다이묘들이 히데요시를 불러들이자 중과부적으로 굴복한 것이라?
모리 데루모토 는 임진왜란 때는 다른 무장의 3배가 되는 3만으로 제7군에 출전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귀국해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 하니..... 조슈번
36만석으로 강등당하고 물러난 후에 딸을 이와쿠니번 깃카와에게 시집 보내게 됩니다.
그전에 아케치 미쓰히데 는 노부나가의 명으로 히데요시를 지원 하기 위해 주코쿠로
진군하던 6월 2일 주군이 머무는 교토 혼노지 本能寺 에 난입하는 반역 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시중에 우스개 말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를 대머리라고 놀린적이 있으니 “ 심한
쫑코는 살인을 초래 한다!“ 갑작스런 변고에 오다 노부나가는 자결 하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시대가 열리는데.... 노부나가를 대신해 아들 오다 노부타카의 절명시 가 전해집니다.
옛부터 주인을 치는 간사한자!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
(昔より 主を討つ身の 野間なれば 報いを待てや 羽柴筑前)
그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복수를 당해 죽는 아케치 미쓰히데 의 절명시!
순역에 두 문은 없고 큰 길은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도다.
오십 오년간의 내 꿈이여, 깨고 나니 원래로 돌아가누나.
( 順逆無二門 大道徹心源 五十五年夢 覚来帰一元 )
아케치 미쓰히데 는 모반 후에 사돈과 사위인 호소카와 타다오키 細川忠興(세천충흥) 에게
간절히 도움을 호소하지만.... 타다오키는 부인 타마(세례명 가랴사) 를 단바국 미토노에
유폐 시키고 주고쿠 오가에시 라고 부르는 전광석화 같이 회군한 히데요시 수하로 참전 합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히데요시가 교토를 장악하고 다시 서쪽으로 진군해 모리씨의 항복
을 받은후 1587년 규슈의 90% 를 장악한 시마즈씨 를 를 정벌할 때도 앞장을 섭니다.
나카쓰와 고쿠라 영주 가 된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임진왜란 때는 1군 고니시, 2군 가또,
3군 구로다에 이어 제9군 을 이끌고는 진주성 싸움에서 경상 우병사 류숭인 을 격파합니다.
주군 노부나가를 위해 아케치 미쓰히데를 죽이고 이후 숱한 전투를 치르며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죽을 때 절명시 를 남겼으니.....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는 이 몸이여. 나니와(浪速)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련가.
(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
이만 각설하고 저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후반에 맹활약 하는 서군의 사쓰마(가고시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 가 병사를 불과 1,500명 밖에 동원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으니....
시마즈씨는 정유재란 시 1598년 9월 사천 에서 8천의 병력 으로 동일원의 명나라군 3만
7천과 정기룡의 조선군 2천 5백등 도합 4만을 맞아 1만여명을 몰살 시키는 대승 을 거둡니다.
명군은 이 참패로 울산을 공격하던 마귀의 군대도 후퇴하고 4로 병진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아래 사진 하단에 사쓰만군의 군기가 십자 모양이라 예수교도가 아닌가 싶지만... 저건
열십자 로 병사 중에야 신자가 많겠으나 그보다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독실한 크리스찬
이니 고니시는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 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운 채 부산포에 상륙합니다.
고니시는 1584년에 영세를 받았으니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 인데, 아버지는 요나단이고 어머니
는 막달라 이며 처는 쥬스타 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였으니 신앙심이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 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으며, 세스페데스
신부가 1593년 12월 27일 남해안 웅천왜성(倭城) 으로 들어와 왜군에게 일요일 미사 를 주관합니다.
명군 양호는 1만 6천 가토 기요마사 의 서생 왜성은 방비가 엄중하니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북쪽에 새로 쌓는 중인 울산의 도산성 을 택해, 명군 2만을 양산에 보내 부산에서 올
왜군 원군에 대비시킨 후 명군 3만 8천에 권율의 조선군 1만 1천 5백등 5만 연합군 이
명군의 대포 공격으로 승기를 잡았다가.... 왜군 8만의 구원으로 패하고 경주로 달아납니다.
1598년 9월 마귀의 명나라군 2만 4천에 김응서의 조선군 6천등 3만 연합군이 재차 울산을 공격하다가
사천성 패배 의 소식을 듣고 후퇴했으니..... 이는 모두 시마즈씨의 공 이라! 조선군의 병력이
명군보다 훨씬 적은 것은, 전란으로 나라가 황폐화된지라 재정이 궁핍하니, 명군이 11만 7천을
동원한데 비해 조선군은 불과 3만 8천이고 이 병력도 서울을 지키니 실제 전투 참가 병력은 2만 남짓?
조선군은 왜군과 열심히 싸웠는데 명군은 전투를 회피하고 백성들에게 행패나 부린줄로 알지만, 임진왜란때
평양성을 탈환한건 조선군 8천에 승병 2천과 명군 4만 3천으로 명군 대포 가 위력을 발휘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 12만 에 맞선 조선군은 황석산성에 5백과 남원성 1천 인데 비해, 명군은 남원성 3천에
이어 직산에서 구로다 1만과 모리 3만을 막아선건 명군 해생과 파새 4천 으로 조선군은 모두 도주했습니다.
명군은 12만 병력을 파병하면서 은과 쌀 을 보냈으니 만주로 운반하거나 영파에서 배로 보내는데 풍랑에
배가 침몰하고 당진에 도착해도 지게에 지고 소백산맥을 넘어 울산에 이르면 절반도 안남은 데다가
조선 백성까지 규휼 해야 하니 엄청난 전비를 쓰는지라, 경리 양호는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소환돼 죽을
것이니 명군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사력을 다해 울산 도산성과 사천성으로 돌진해 죽어 나갔던 것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탓으로 일본의 주인 자리를 두고 내란 이 일어날 상황이라 조선에서 철수
하는데 남해안 28개 왜성 중에 27개성의 왜군은 조선군이나 명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평화롭게
철수하지만, 오직 서쪽 순천에 주둔중인 고니시 만 이순신 장군이 길목을 차단하니 구원 요청 을
받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는 구원을 하는 시늉만 하여야 하는데 시마즈씨는 전력을 다 동원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여수를 지나 순천 바다를 봉쇄 하자.... 사천의 시마즈씨 는 300척 왜선을 동원해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 (노량해전) 하다가 조명 연합군에 무려 200척이나 잃습니다.
장차 일본에서 가문의 존망을 걸고 내전이 벌어질 판인데 자신의 병력을 다 쏟아 붓다니???
조선군은 모두 왕의 군대지만 왜군은 다이묘 개인의 군대 이니 저건 어리석거나 아님 미쳤다는?
노량해전에서 병사의 6 0% 이상을 잃고 귀국한데다가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교토는
먼 거리라, 사쓰마의 시마즈씨 는 동서 20만 대군이 일본의 운명을 놓고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병사는 불과 1,500명 밖에 동원하지 못했지만 치열하게 싸웠으니.....
서군 내부의 배신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사쓰마군은 후퇴 하는데... 고향인 서쪽이 아닌
동쪽 도쿠가와군 본영 으로 쳐들어 가는 기상천외한 전술(?) 을 선보입니다.
본래 후퇴 라는 것은 적에게 등을 보이고 고향으로 달아나는 것이 보통인데 말입니다?
예기치 못한 난데없는 돌진에 기겁한 도쿠가와 본영이 흩어지자 그틈을 이용해 포위를 뚫었는데
사쓰마군은 본대 후미에 결사대를 100명씩 남겨두고 후퇴하니, 이른바 신가리(しんがり)
인데.... 1570년 오다 노부나가 가 아사쿠라씨를 치기 위해 가네가사키성에 머물다가 후방의
아사이씨가 배신해 후퇴할 때 히데요시가 후방의 신가리 를 맡아 큰 전공을 세운게 유명 합니다.
후미에 10여차례 남겨지는 결사대 천여명 은 차례차례 모두 몰살 당하지만 본대는 후퇴에
성공해서 80명이 번주를 옹위해 규슈 남쪽 사쓰마(가고시마) 에 도착 했던 것이지요?
사쓰마군 1,500명 병사중 1,420명이 전사 했지만 주군이 귀환했으니 성공적인 전투 입니다!
사람 목숨은 하나뿐인데 결사대들이 도망치지 않고 번주의 후퇴를 위해 목숨 을 버린 이유는?
다이묘가 영지를 뺏기면 가신(무사) 들도 봉록(연봉)을 잃고 낭인(실업자) 이 되는데....
이는 새로 오는 영주 역시 자신의 오랜 가신(무사) 들을 데리고 단체로 이사를 오기 때문 이라!
왕이나 다름없는 영주 가 망하면 무사들도 지위와 연봉 을 잃으니 충성 을 다하는 것이라!
임진왜란때 일본의 무장 20여명 중에 전투에서 전사한 자가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후 사쓰마번에서는 결사항전 을 하니, 도쿠가와군이 몇번 공격에 실패하고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타협 하니.... 무용으로 영지를 보존한 시마즈 요시히로 의 절명시!
봄 벛꽃도 가을의 낙엽도 가버리누나.
인생 한철 세키가하라로 부터의 귀향길 같이 덧없는 것이로다.
( 春秋の花も紅葉もとどまらず 人も空しき関路なりけり )
일본 270개 번의 번주는 아들에게 세습 되며, 세금을 거두어 가신과 무사에게 연봉 을 주고 군대
를 기르며 백성을 재판하니 사실상 국가 라고 불리는데, 그중에 큰 번이 60개 정도 되니....
원한을 간직한 조슈 (야마구치, 모리씨) 번과 사쓰마 (가고시마, 시마즈씨) 번이 성장을 합니다.
결국 1868년에 무진전쟁 반란을 일으켜서 265년을 이어온 에도(도쿄) 의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을 타도 하고 일왕(천황) 을 옹립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 이 되는 것이라!
이제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에서도 주역 야마구치현 "조슈번의 수도 하기시" 를 둘러봅니다.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도쿄만에 나타나 함포로 위협하니 막부가 굴복하여 개항하자 하기시의 요시다
쇼인 은 서양 오랑캐에 의해 일본의 혼이 더럽혀졌다며.... 막부 타도를 위해 존왕양이론 을 주창하면서
쇼카손주쿠 학숙을 열어 1년 반 동안 "맹자" 를 강의해 90명 제자를 기른후 서른살 나이에 막부에 의해
처형당하니, 제자들이 에도 막부와 싸워서는 3분지 1이나 죽으면서 이룩한 것이 메이지 유신 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