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살아가면서 자주 발끈한다면?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위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더 큰 사랑으로
아무리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이런 말 정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런 명언을 남긴 주인공은 기원전 470년에 태어난 대철학자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철학자가 되기까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지식 탐구를 향한 끝없는 갈망, 철학이라는 특정한 분야에 대한 평생에 걸친 한 우물 파기,
선택과 집중, 인간과 세상을 향한 깊은 애정,
탁월한 지적 능력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한 가지 특별한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크산티페’였습니다.
그녀는 오늘날 까지도 ‘악처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크산티페의 특징은 입이 거칠고 성격이 포악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현자 중의 현자인 소크라테스가 도대체 왜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았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질 때 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승마의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은 고분고분한 길들여진 말을 타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승마 기술의 발전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성질이 고약하고 난폭한 말,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친 말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떤 말도 잘 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이 여자의 괴팍함을 잘 견뎌내다 보면
천하의 어떤 사람도 무섭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향해 1분에 한 번씩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들으면 시끄러운 물레방아 도는 소리도 자꾸 듣다보면 전혀 괴롭지 않게 됩니다.”
한번은 크산티페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소크라테스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가 천연덕스럽게 앉아있자,
찬물을 한 바가지 떠와서 남편에게 확 들이부었습니다.
갑자기 물까지 한 바가지 얻어맞은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비참하기를 넘어 처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천둥 번개가 친 후에는 큰 비가 오는 법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중요한 삶의 지혜를 전수해주시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에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것입니다.
악에 악으로 보복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욕설에 욕으로, 주먹에 주먹으로, 복수심에 복수심으로 대응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응할 때 우리가 너무나 잘 체험하며 살듯이 결과는 심각한 상처입니다.
결국 패가망신입니다. 모두가 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따른다는 것,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너무나 어려운 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바보천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길처럼 현명한 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정말 어렵지만 바보가 되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죽기 살기로 따르게 될 때, 그 결과는 잔잔한 평화입니다.
지속적인 마음의 평정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것입니다.
악이 다가올 때 악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내 큰 인내와 내 큰 관대함, 내 큰 사랑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분명히 악인을 만납니다.
꼭 악인이 아니어도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현실을 만납니다.
그럴 때 마다 내 선에서 악이 더 이상 증식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 더 큰 희망, 더 큰 인내와 측은지심으로 악을 억제시키는 그런 노력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5,38-42 : 나는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오늘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 윤리적 특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은 기원전 1700년경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 복수법’(lex taleonis)이다. 이것이 역시 구약성서의 윤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탈출 21,22-25에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임신한 여자와 부딪쳤을 경우, 그 여자가 유산만 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벌금형을 받아야 한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벌금을 치른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방에게도 악한 행실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율법은 사악한 자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율법 때문에 선한 이들을 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법은 재판관을 위한 것이지 개인이 복수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 또 문자 그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다. 당한 피해 이상을 벌을 주지 말라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39절) 이 말씀은 단순히 인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어떤 교회와 신앙을 비방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지닌 믿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1베드 3,15 참조)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교리를 알게 도와주면 그들은 비난을 그치고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손찌검에 당신 뺨을, 채찍에 당신 어깨를 내 주실 것이다.
“네 속옷과 겉옷을 내주어라.”(40절)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이나 박해하는 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소송을 걸어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의 겉옷을 그들의 손에 던져 주고 더 좋은 옷인 의로움을 입고 달아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육신의 옷을 찾으려 하는 동안에 영적인 가장 고귀한 옷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41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모욕하는 이들에겐 용감한 정신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또한 비신자나 아직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만물을 세우신 분, 곧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라는 뜻이다. 즉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을 ‘이웃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하신다.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다. 시간을 요구할 수도 있고,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렇게 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기다리고 기회를 보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