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 다녀오다.
1박 2일 장거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즐겨 하지 않는 저에게는 거의 첫 여행이라고 해도 될 만한 여행이었습니다. 여행 일정은 토요일 오후 2시까지 전남 장흥 동학 농민기념관에 집결해 장흥과 땅끝마을 해남 출신의 여러 작가의 생가를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의 시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가 내가 소개해줄 사람이 있는데, 변OO 동지라고 현대자동차 다니는 분인데, 이분도 글을 써. 오마이뉴스 기자이기도 하고. 이 작가 글과 책 보여주니까 변 동지가 글이 좋다고 하네. 그리고 좋은 모임이 있다며 추천하는데...”
울산과학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분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울산 연대 노조 김OO 위원장님의 전화를 받은 후, 고민하다가 변OO 님과 함께 1박 2일 전라도 장흥과 해남을 다녀왔습니다. ‘민족작가연합 노동자문예학교 여름 캠프 프로그램’에 얼떨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해남까지는 승용차로 쉬지 않고 5시간이 넘는 거리로 꽤 멀었고, 제 차에서 처음 만나 함께 여행하기로 한 예순 살 변OO 님과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전날 뉴스에 나온 이야기로 가벼운 대화를 던졌습니다.
“어제 뉴스에서 7개월째 고공농성 중인 구미의 두 여성 노동자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2022년 10월 공장에 큰불이 나서 생산시설이 전소되어 190명은 희망퇴직을 했는데, 열 분은 고용 승계를 주장하고 그중 두 분이 이 더운 날씨에 옥상에서 농성 중이라고 하네요. 전 190명에 포함되는 사람이라...”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흥분해서 되받아치는 변OO 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작가님은 재주가 좋아서 그런 생각일지 몰라도, 그 공장일을 평생 업으로 삼은 사람, 나 같이 재주 없는 사람에게는 삶만큼 목숨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변OO 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제가 실수와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곧 변OO 님을 만나기 전 그분의 오마이뉴스 기사를 읽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현대자동차를 비정규직으로 오랜 세월 다니다가 겪게 되는 7년 동안의 해고와 투쟁, 복직. 예순 살임에도 정규직이 된 지는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변OO 님의 지난 세월과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제가 간과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화는 앞으로 일어날 해남에서의 1박 2일의 기시감이 되었습니다.
민족작가연합 노동자문예학교 여름 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한 열 명 남짓의 분들은 전국 각지에서 왔습니다. 저는 모두 초면이었지만, 다른 분들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첫날 일정이 끝나고 숙소에서 저녁을 먹은 후, 강의가 있었는데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로 37년을 감옥에서 보낸 아흔 살의 양희철 선생님의 강의였습니다. 순간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정신적 공황(멘붕)이 왔습니다. 강의가 있다는 프로그램 목록을 봤지만, 강의자의 정체(?)는 몰랐습니다. 제 삶에서 비전향 장기수분을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비전향 장기수가 있다는 것에 관심조차도 없었는데, 양희철 선생님의 책 〈신념의 강자〉를 얼떨결에 사고 강의를 듣는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습니다. 사회주의에 관한 이야기와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가 거리낌 없이 토론되었습니다.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내가 여기 왜 왔을까(?)’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답은 찾을 수 없었고, 다만 차에서 변OO 님과 한 대화만이 반추 됐기에 저 자신과 지금의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차에서처럼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둘째 날은 해남 출신의 유명한 문인들의 생가를 방문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숙소와 5분 거리의 고산 윤선도 시인의 고택을 방문했고, 고인이 되신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의 생가를 방문했습니다. 첫째 날 방문한 장흥 출신 이청준 소설가와 송기숙 소설가의 생가를 포함하면 생가만 4, 5곳을 방문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누구 생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을뿐더러, 조선 시대 시인 윤선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면인 작가였기에 흥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청준 소설가는 독서 모임에서 영화 ‘밀양’의 원작인 〈벌레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었지만, 너무 재미없었기에 억지로 다 읽은 기억만이 유일했습니다. 이런 저와는 다르게 함께 간 그분들에게는 이 모든 작가가 소중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김남주 시인의 생가에서는 각자의 시들을 읽으며 김남주 시인을 추모했고, 현지에 살며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관리하는 친동생분이 오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이번에 김남주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유명한 분이라고 합니다.
1박 2일의 일정을 모두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고 2주가 지났습니다. 생애 첫 여행의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백방 굴려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제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지독한 집돌이로 여행 가는 것에 전혀 관심 없는 저였지만, 입버릇처럼 땅끝마을 해남에는 가고 싶다는 말을 읊조리곤 했습니다. 삶의 자동주문처럼 저도 모르게 했던 버킷리스트가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왜 해남에 가고 싶어 했는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다만, 평생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고 계신 양희철 선생님의 책을 산 제게 써주신 문구 “왜 사냐건 웃지요”. 이 문장이 제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해남 여행에서 이 한 문장을 다시 떠올리고 기억했습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