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병인박해 때 다섯분이 치명 순교한 곳
양주 관아는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김윤호 요한, 권 마르타, 김 마리아, 박서방 등 다섯 분이 치명 순교한 곳으로 《치명일기》에 나와 있다.
박해 시기 경기 북부 지역의 신앙 전통은, 초기 교회 이래 신앙을 지켜 오던 포천과 마재, 19세기 전반과 중반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고양과 송도 지역이 그 중심을 이루며, 이어 송도에서 장단, 고양에서 파주, 포천에서 양주 등 주변 지역으로 신앙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이 이처럼 확산되는 현실 속에서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양주·송도·장단 등지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주의 경우는 기록상 5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와 있다(《치명일기》No. 413~417).
즉 덕산 출신 김윤호 요한은 용인 굴암에서 거주하다 1866년 10월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고, 권 마르타는 김윤호 요한의 아내로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 마리아는 용인 한덕골에서 거주하다 1866년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는데 당시 나이 42세로 중국에 들어가 죽은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다.
홍성원 아우구스티노는 양주 일담리(세거지인) 출신으로 포천 고약리에서 거주하다 1868년 5월 19일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는데 당시 나이 46세로 광주에서 치명한 홍 아우구스티노의 아우다. 그리고 양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 서방은 양주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55세로 홍주에서 치명한 박사행의 부친이다(《치명일기》No. 413~417).
그런데 이 다섯 순교자 가운데 양주와 관련된 신자는 박 서방과 양주 일담리 출신으로 포천 고약리에서 체포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정도이며, 용인에서 잡힌 3명은 전혀 양주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순교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에 양주에서 신자들이 처형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양주를 비롯한 경기 북부 지역의 신자 집단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양주 쪽에서도 신자들을 체포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지난 2008년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심포지엄을 통해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양주의 정확한 치명지를 찾았고, 앞으로 치명 성지로 가꾸어 나갈 예정이다.
▒ 양주 관아지(楊州官衙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있는 조선 시대 관아터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서울을 한성부로 고치면서 양주의 치소를 견주(見主, 현양주시 고읍동)로 옮겨 양주군을 설치하였다. 중종 1년(1506년) 이곳에 양주군 관아가 세워진 이후 1922년까지 417년 동안 양주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현재 복원한 관아가 있는 자리는 목사의 정청이었던 매학당(梅學堂)이 있던 곳이다. 매학당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외동헌과 가족이 생활하던 내동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0여 칸 규모였다.
매학당 앞쪽 좌우에 향청(鄕廳), 중영(中營) 등 각종 부속 건물이 위치하였으며, 객사는 관아 서북쪽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아터 중앙에는 옛 동헌을 복원하여 신축하였는데, 한식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이다. 화강암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웠으며, 두공은 간결한 모양의 익공을 두 겹으로 얹은 무출목 이익공식 건물이다. 동헌의 오른편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양주목사들의 송덕비들을 모아 놓았다. 비가 모두 18기인데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다. 이 비들의 비좌는 화강암으로 새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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