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비행기 환승을 위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래 출발하는 시간보다 무려 3시간 연착되었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너무 났습니다.
비행기 대합실에서 할 일도 따로 없었고, 늦은 시간이라 쇼핑을 할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공항이 워낙 작은 곳이라서 그런지 인터넷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힘들다면서 공항 측에 항의를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즉, 통제할 수 없는 경우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상황에 영향을 받아서 화를 내고 있는 제 모습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이 상황에서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입니다.
화가 나는 마음은 내 것이기에 분명히 통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책을 보다보니 3시간이 후딱 지나가더군요.
많은 이들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시간을 쏟으면서 정작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에는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손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두말 할 필요 없이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러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기도보다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칠 때가 많지 않나요?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모습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바꾸려는 억지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통제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 자신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뛰어넘는 통제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분께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일과 세상의 일, 이 둘 사이를 올바로 정의하고 분리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더 이상 주님께 불평불만의 모습으로 다가서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 찬미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