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성사를 본다고 표현하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는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라고 답변을 드려야겠습니다. 우리말 ‘보다’라는 말은 몇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다의어입니다. ‘보다’를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성사를 본다’는 표현은 성사의 의미를 잘 담은 좋은 표현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눈으로 지켜본다는 뜻에서 ‘성사를 본다’는 표현을 썼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된다면, 성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는 사라지고, 마치 남의 일인 양 구경하고 있다는 뜻이 되고 말 겁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바라본다는 의미의 ‘성사를 본다’는 표현은 전례 개혁 이전의 미사에 참례하던 교우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하도록 허락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 이전에는 모든 미사를 라틴어로 봉헌했습니다. 이 시기, 라틴어를 할 줄 모르는 교우들은 사제와 함께 하는 계응에 참여하지 못하고, 조용히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전례에 수동적으로 임했던 모습이 ‘성사를 본다’는 표현에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라면, ‘성사를 본다’고 표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제 성사와 전례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보다’라는 말에는 ‘어떤 일을 맡아서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사무를 본다.’, ‘장을 본다.’ 등의 용례에서 그러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해당 뜻에 따라 ‘미사를 본다’고 표현하는 관례는 초창기 박해 시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남의 눈을 피해서 몰래 신앙생활을 했던 그 시대의 교우들이 신자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도록 사용한 은어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일 보았는가?’였으며 이는 ‘고백성사 받았는가?’라는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우가 아닌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으면서도 소통할 수 있도록 ‘보다’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여기에서 ‘미사를 본다’는 표현이 유래했다는 설명입니다.(가톨릭신문 1985년 11월 17일자 기사 <미사본다>는 말 참조) 이렇게 성사와 관련된 일을 맡아서 행한다는 의미에서 ‘미사를 본다’고 표현한다면, 이는 우리말의 고유함을 잘 살리는 좋은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성사≫,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편찬 참조)
그 외에도 ‘성사를 받는다.’, ‘성사에 참례한다.’ 등 성사에 참여하는 것을 일컫는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어떤 표현이 됐든, 우리가 성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직자가 집전하는 성사에 평신도가 관객처럼 서 있는 구도만을 상상한다면, 성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직자가 직무사제직을 수행하는 것과 별도로, 세례받은 모든 이가 보편사제직으로 부르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성사 안에서 고유한 역할을 맡아 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중임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사제직을 받은 백성으로서 전례를 거행한다. 전례 안에서 각 신자는 성령으로 하나 되어 각자의 고유한 임무에 따라 행동한다. 세례 받은 이들은 자기 자신을 영적 희생 제물로 바치고, 성품을 받은 봉사자들은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섬기고자 받은 품계에 따라 전례를 거행하며, 주교와 사제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행동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235항)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서울주보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