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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극선법 현동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
부산의 신종교는 이 곳의 지리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항구도시여서 물법이란 독특한 사상이 있고, 일본과 가까워 일본종교 유입의 관문이 되고 있다. 물법은 봉남 김재성이 창도한 종교로 그는 물의 청정함과 같이 사람도 수련을 통해 마음의 티끌을 씻어내면 심수(心水)와 심법이 생겨 자성을 찾게 된다고 한다. 그 수련법으로 심전작정주 등 주송과 법방을 제시했고 치유법으로 찬물을 사용했다. 제주출신인 그는 부산에서 도를 펴 물법은 남쪽지방이 강하다. 일본의 종교는 1900년에 들어온 천리교와 일련정종 세계구세교 계열이 있으며, 그 중 자주교단을 선언한 대한천리교의 원남성교회는 단일교당으로는 기성종교를 능가한다. 송도에서 다대포로 가는 중간에 감천동이 있다. 아미동에선 반월령을 넘으면 곧 감천동이다. 감천은 원래 한적한 해변마을인데 지금은 2개 동으로 나뉠 정도로 큰 동리가 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태극도이다. 감천을 성지로 삼아 오늘의 모습으로 발전시킨 근간이 된다. 따라서 감천동은 오랫동안 태극도 그 자체로 인식되어 왔다. 그 것은 이 곳의 지형에서도 엿보인다. 비록 높지는 않지만 동에는 천마산, 서에는 옥녀봉이 있어 양과 음을 이루고 두 산마다 4봉이 솟아 8괘를 상징하니 자연 그대로의 태극이다. 태극도 본부는 옥녀봉 기슭에 자리잡아 있다. 대강전을 중심으로 12동의 건물이 법도있게 배치되어 도장은 웅장함과 경건함이 깃든다. 성전인 대강전의 상층에는 신앙 대상을 모신 영대가 있다. 중앙에 구천상제의 진영이 있고 우측에 옥황상제의 진영과 좌측에 석가여래의 위영이 있으며 모두 15신위가 봉안된다. 성소이므로 일반인의 출입은 불가하다. 본 도를 창도한 이는 정산 조철제 도주로 도인들은 옥황상제로 받든다. 그는 1895년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을사늑약 때 분사하고 부친과 숙부들이 의병활동을 하는 등 항일가정에서 성장해 평생을 일본 대신 ‘왜’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강건하고 몸에는 신표가 있으며 음성은 용성인데, 7세에 한학을 배웠으나 9세에 이미 영성이 깊어져 홀로 마음공부에 힘썼다. 15세에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떠났는데 그 과정에 생애의 일대사를 맞게 된다. 경전인 ‘진경’에는 “기차가 대전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한 신인이 나타나 그대는 삼계의 진주니 나의 도통을 이어 무극대운의 대공사를 성취하되…태극의 진법을 용하면 무위이화로 광구삼계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이며 이도일체(도로써 한몸)이니라…나는 구천의 천존상제니라” 하였다. 즉 그는 구천상제인 강증산에게서 천명을 받았고 이로부터 50년 공부가 시작되니 본 도에선 이 해를 도기 원년이라 한다. 23세시 다시 증산의 계시로 기도주와 태을주를 받으며 득도했고, 이를 당시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증산교인 김혁에게서 계시와 교리가 부합됨을 확인한다. 귀국 후 정산은 전국을 다니며 공부하다 25세에 증산의 매씨인 선돌댁을 만나 비장되었던 천서인 현무경을 찾고 천보인 둔궤를 보천교에서 가져오니 이로써 증산의 삼천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27세에 그는 정읍에서 무극대도의 교단창립을 선포하고 3년간의 공사 끝에 태인도장을 건립한다. 영대와 도솔궁 등 19동 건물의 방대한 규모이다. 도인 수가 십만에 이르자 34세 봄 정산은 ‘진업단’을 조직해 수리 황무지 간석지를 개간하며 산업장려에 나섰고, 2년 뒤에는 함경남도와 북만주로 파견해 벌채사업을 하는 일변 무극광산 등을 운영해 많은 수익을 올렸다. 또한 안면도와 원산도에 논과 염전을 간척하는 등 급속한 교세의 신장을 보였으나, 1936년 조선총독부는 ‘유사종교해산령’을 발동해 이 모든 것을 수탈하고 만다. 교단 해산 후 정산은 10년 동안 전주 마산과 고향에서 은거하며 공부에 몰두하는데 이를 잠룡도수라고 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광복 직전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태극진리를 설하면서 교단명칭을 태극도로 개칭한다. 교인 수가 다시 급증하자 1948년 교단 선포와 함께 본부를 부산 보수동에 두고 “이제는 허령 지각시대가 지나가고 신명시대가 당도했다. 우주의 대도인 진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 있으니 업고 안고 숨쉬는 것이 모두 도라”고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민 가운데 수천명이 도장으로 내려와 인근에 판자촌이 형성되자 정부와 협의해 새로운 지역을 택할 때 그는 미리 예정했던 감천동으로 이주한다. 감천을 9개 구역으로 나누어 옥녀봉과 천마산 산록까지 형성된 태극도 도인촌은 한국신종교사에서 단일종교취락으로는 가장 방대한 것이었다. 1956년 정산은 ‘태극도통감’을 내어 교단의 체제를 확립한다. 신앙 교리 의식 제도 등 모든 종교체계를 세운 후 본 도 특유의 수도공부를 시행하니 시학 시법공부이다. 그는 “내가 정한 수도법방은 공부종필의 총결정이며 전무후무한 삼계의 진법이니 유구 5만년 도인의 규구라. 수신 수도 영통 도통이 이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1958년 3월 6일 정산은 마지막 유훈을 내린다. “50년 공부 종필이며 지기금지 사월래가 금년이니라. 나는 가노니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나의 법방과 사업을 분각도 어김없이 잘 행하여 나아가되 일심으로 믿고 닦아서 다시 만나자” 잠시 입정하고 “대강 대강”을 발한 후 세연을 마치니 세수 64세이다. 그의 묘소는 미리 마련한 천마산 감나무골에 안장되어 정산릉이라 부른다. 도조의 사후 태극도는 역대 도전들에 의해 운영되면서 갖은 굴곡을 겪지만 법난 분파 등의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재단법인을 구성했고, 출판부를 활성화 해 많은 도서를 발간했으며, 도장을 정비하고 수도에 전념하는 등 차분한 모습이다. 이러한 정중동의 교단을 현재 김영복도전이 맡고 있다. 본 도의 신앙대상은 무극주 구천상제(증산)과 태극주 옥황상제(정산)의 이도이위일체이다. 더불어 2위는 체와 용의 관계로 본다. 테극도의 교의에 대해 정산은 ‘태극도취지서’에서 “우주의 우주됨은 원래 본연의 법칙이 있어서 그 신비의 묘리가 태극에 있으니 이 밖에 더함이 없으므로 태극이며, 둘이 없고 오직 하나 뿐이므로 태극이라 한다”고 했다. 이를 수행함에 있어 성경신과 안심 안신으로 몸과 마음과 일을 다하게 한다. 신조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이다. 경전은 선도진경을 보완한 ‘진경’으로 무극진경과 태극진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부록으로 현무경을 수록했다. 주문은 봉축주 기도주 태을주 진법주 등 12종이다. 의식은 기도 치성 제향 등으로 구분되는데 치성시간은 축시를 원칙으로 한다. 도장의 선령각에는 도인들의 혼령을 봉안한 위패가 2천에 달하며 9월 9일에 제향의식을 올리고 있다. 수도는 본 도의 생명으로 외수(남자)와 내수(여자) 도인들이 짜여진 법도수에 맞추어 시학과 시법공부를 하며, 마치면 초강식 합강식 봉강식의 의식을 갖는다. 이제 태극도는 도기 97년을 맞고 있다. 백여년의 도사 속에 성쇠도 있었지만 과거지사는 돌아보지 말라는 도주의 법언대로 묵묵히 일심수도에 진력한다. 그 가운데 감천이 세계의 지운을 통일할 핵심인 새서울이요, 지구상 만국 유일한 태극의 핵점이며 그 진리를 결실할 날이 결코 멀지 않았음을 깊이 새기고 있다. 이 경 우 한국새종교연구원장
[종교신문]부산 감천동 태극도
"세계 地運 통일할 핵심의 새서울"
현재 부산에는 7계통 18개의 신종교 단체가 있다. 계통별로는 증산계 5, 단군계 1, 물법계 1, 신기독교계 1, 신외래계 6, 무계 2, 일반종교계 2개 등이다. 〈신불교계 제외〉.
◇부산 사하구 감천동 서편 옥녀봉 기슭에 자리잡은 태극도 성전인 대강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상층 성소에는 도주 정산 등 신앙대상을 모신 영대가 있다.
( 2005/05/26 17:12 )
충남 향토사학자 신상구씨 태극도의 초기 포교과정 밝혀
2004년 새봄을 맞이하여 태안문화원(원장:정우영)에서 『소성의 향기 9집』을 발간해 지역 주민들에게 읽을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고 있다. 이 향토지는 태안문화원 정지수 사무국장의 주관 하에 해마다 발간되고 있으며, 태안지역의 정신문화 진흥과 향토사 정립 및 문학 인구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 하고 있다. 이 번에 발간된 『소성의 향기 9집』에는 학술논문 4편, 논설문 4편, 향토사료 2편, 기행문 1편 등을 비롯해 시 14편, 수필 5편 등 여러 장르의 주옥같은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충남 향토사학자이며 시인인 신상구(辛相龜,54세)씨는 이번 「소성의 향기 9집」에 "태안지역 태극도의 역사적 전개 과정"이란 향토사 관련 논문을 발표해 태안지역의 종교사 정립에 많이 기여하고 있다.
우리의 토착적인 민족종교 중의 하나인 무극도(無極道) 즉 태극도(泰極道)는 대대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선생이 1917년에 창도하기 시작한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이다. 교주 정산 선생은 만주에서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하며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 28일 귀국했다. 그는 그 해 9월 초 어느 날 전북의 함열(咸悅) 지방을 순회하던 중 구천상제(九天上帝)인 강증산(姜甑山)의 계시를 받고 서해 제일도인 안면도로 들어와 정당리와 창기리를 중심으로 포교를 하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신도수가 3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919년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항일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안면도의 태극도 신도들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명령했고, 일제 말인 1935년 봄에는 창기리 동쪽 천수만의 쇠섬(鐵島)에서 80정보(24만평)의 간석지를 논으로 개간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였으나 왜정 당국의 강압으로 개간된 논 전부를 억울하게도 왜인회사인 마생(麻生)에게 강탈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극도(태극도)는 태안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와 종교사 및 지역개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태안지역의 향토지에는 무극도(태극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태극도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조사 연구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1990년에 태안지역에서 태극도의 도맥(道脈)이 끊어진 이후 태안지역 주민들은 태극도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충남지역 향토사학자인 신상구씨가 현재 부산직할시 사하구 감천 2동에 위치하고 있는 태극도 본부의 협조를 받아 『태극진경』·『무극진경』·『조정산 전기』·『태극통감』 등 태극도 관련 각종 서적을 수집해 탐독하고, 안면도의 정당리·창기리·승언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조사를 실시해 무극도(태극도)의 초창기 포교 과정과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내 우리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그는 이 번 논문에서 먼저 무극도(태극도)의 기본 교리와 역사를 요약 소개하고, 무극도 초창기의 신도 30여 명 중 18명의 인적 사항을 어렵게 밝혀냈으며, 태극도인들의 순회교육 내용과 쇠섬의 간척사업 실태를 어느 정도 밝혀냈다. 그리고 해방 직후인 1948년 봄부터 1951년까지 3년 동안 안면도에서 태극도와 쌍벽을 이루며 활동하던 우리 나라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1889-1958) 선생과 대산(大山) 김석진(金碩鎭,76세) 선생을 비롯한 주역패들의 정체도 상당히 밝혀내 향토사 정립에 많이 기여했다. 그러나 태안지역의 태극도 관련 선행논문이나 단행본이 단 하나도 없고, 태극도 관련 사료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태안지역의 태극도 포교 과정을 증언해 줄만한 사람들은 이미 타계했거나 타지로 이사가고 없어, 아직 조사 연구가 미진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무극도 초창기의 공부처인 우일재(宇一齋)의 정확한 위치·초창기 무극도 신도 30명 중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나머지 신도 12명의 인적사항·안면도 지역 무극도인들의 3.1독립만세운동 실태·태극도와 주역패와의 관계 등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해 후속 연구가 긴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정당리의 우일재터를 정학히 밝혀내 서천의 마량진(馬梁鎭)이나 당진의 천주교 성지 3곳(솔뫼성지, 합덕성당, 신리성지)처럼 성역화하고 관광자원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서천군 문화공보실 오천환씨에 의하면, 지금 서천군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성경 전래지인 마량진에 기념비를 세우고,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가 하면, 성역화를 해서 관광자원화할 계획을 세워놓고, 단계적으로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중도일보(2004.3.30일자)에 의하면 당진군에서는 43억 2천만원을 투자하여 성지 3곳을 성역화하고 테마관광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이 서려있는 솔뫼성지에는 2004년에 33억을 들여 270평 규모의 기념관을 신축하고 4억원을 들여 19평 규모의 생가를 복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사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인 신리성지는 6억 2000만원을 들여 진입로를 새로 개설하고 순례객을 위한 편익시설을 확충한다고 한다. 또한 도지정 기념물 145호로 지정된 합덕성당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지난 2003년에 6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본당 건물을 정비한 바 있다고 한다. 다행히 태안군에서도 지역 소재의 문화재를 관광자원화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태극도의 우리 나라 최초 포교지인 안면읍 정당리의 우일재 터도 정확한 위치를 밝혀내서 기념비를 세우고 성역화하여 테마관광지로 개발하고 백화산의 태안마애삼존불과 동학혁명기념탑과 연계관광을 추진함으로써 지금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태안지역을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를 조사연구하고 있는 향토사학자 신상구씨는 충북 괴산군 청천 출생으로 청주고와 청주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만기 제대한 후 잠시 한국상업은행에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해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27년 간 제자를 양성해 왔다. 그리고 주경야독하면서 사비로 현장조사를 실시하여 「대천시의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등 4권의 저서와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과제", "천안시 연극사", 등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1991년에 전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한 제6회 전국향토문화논문공모에서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任淑宰) 연구"로 우수상인 국사편찬위원장상을 받았고, 2003년에는 전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한 제18회 전국향토문화논문공모에서 "태안지역의 무속문화에 대한 현장조사연구"를 발표하여 우리 나라 최초로 태안지역의 무속문화의 특징을 밝혀냄으로써 영예의 대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그리하여 그는 중학교의 현직교사로서는 아주 드물게 인터넷의 네이버·야후·다움·엠파스 등에 프로필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고, 2004년도에 서울에서 발행된 한국인물사에 3군데나 소개되었다. 그리고 태안중학교 역사문화반 담당교사로 재직하며 2학년의 역사문화반 학생 12명을 대상으로 태안지역의 문화재와 종교기관을 탐방하며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사비로 태인지역의 2개읍 6개면을 대상으로 현장조사를 실시하며 『태안의 무속사』,『태안의 종교사』,『시목리지』 등 3권의 단행본을 저술 중에 있는데, 조사연구비와 출판비가 턱없이 부족해,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독지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2004. 4. 16일
향토사학자(시인) 신상구(辛相龜) 올림 * 참고 인터넷 사이트 : 태안소식, 태안신문, 태안문화원, 대전일보, 중도일보, 대전매일, 중부매일, 충남신문, 경향신문, 서울신문, 오마이뉴스, 연합뉴스, 전국문화 원연합회, 충북일보, 한빛일보, 충북연합신문 등의 자유게시판과 독자마당 참조. *인터넷 네이버, 야후, 다움, 엠파스, 라이코스, 심마니에 들어가 향토사학자 신상 구를 검색하면 약력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음. * 본 향토사학자가 태안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연구하고 향토지를 발간하는데에 학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싶은 독지가께서는 다음 주소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연락처 : 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300번지 태안중학교 역사문화반 담당교사 신상구(TEL:041-674-5323)
첫댓글 무극진경 때문에 가져왔습니다.
태극도의 무극진경과 태극진경까지 광룡정에서 보게 되네요.^^;;; 과거에 단체에서 생활할 떄가 새록 새록 떠오른다는...
도주 조철제님의 뜻이 제 인생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셨죠...ㅋㅋㅋ
글고...새로운 단체 중에 '다생소활' 이라고 있는데 거기도 좀 신선한 무언가가 있는 거 같던데
저도 다생소활'이 기억났었는데... 거기는 인터넷에서 무언가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지, 여기저기 링크를 많이 걸어놔서 가보게 되었지요. 볼 거 없지 않나요?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의 의지에 그리고 민족의 암울한 시기에 분투하셨던 의기에 대해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