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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김학중목사/영웅의 최후-스퍼트 (삿 16:21-31)
어제(런던 현지시간 7.27)부터 ‘2012 런던 하계 올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약 보름동안(8.12) 세계 200여 국가의 건강한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수 년 간 연마한 기량을 마음껏 겨루게 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크게는 26개 종목, 세부적으로는 302개 종목의 경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종목들 중에 하나가 바로 마라톤입니다.
현재 마라톤의 세계최고기록이 2시간 3분대이므로, 각각의 마라톤 선수들은 최소한 2시간 이상을 조금도 쉬지 않고 뛰어야만 합니다.
이런 점에서 마라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최고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기나긴 고통의 달음질을 인생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스퍼트’를 잘해야 합니다.
순화된 우리말로는 ‘끝판 힘내기’ 또는 ‘막판 힘내기’라고도 합니다.
마라톤의 스퍼트는 30km 이상을 달리며 ‘평상시의 힘’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서, 마지막 목표점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라톤 선수들은 아무리 초반에서 잘 달렸어도, 이 스퍼트에서 실패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도 훌륭한 ‘인생의 스퍼트’가 필요합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 ‘와타나베 쇼이치’ 교수는 그의 최근 저서 <지적으로 나이 드는 법>(2012)에서,
‘하고 싶은 일을 죽을 때까지 실컷 해보라.
삶의 긴장을 내려놓는 순간 이미 죽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생의 스퍼트’를 포기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고, 인생의 희망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역사적인 위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마치기 전, 자신의 남은 모든 힘을 쏟아붓는 ‘인생의 스퍼트’를 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미 사회적 부와 명성을 얻었다고 해서 남은 여생을 허비하거나,
또는 반대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히려 인생의 후반부에 젊은 시절보다 훨씬 더 왕성한 연구나 사회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인생의 스퍼트’를 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 대한 최종평가도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서도, 삼손은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를 합니다.
모든 소망을 잃고, 두 눈을 뽑힌 채 감옥에서 처량하게 맷돌을 돌리던 삼손이 자신의 남은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삼손이 과연 성공한 영웅인가, 실패하고 타락한 인물인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를 하기 원했고 하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인생 마라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중한 구원과 회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혹시 오늘 이곳에도 ‘나는 이미 끝났다!’며 절망하는 분이 있습니까?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없다며 자포자기하는 분이 있습니까?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를 하는 삼손을 보며,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미래가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1. ‘살아있음’ 자체가 희망이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떠나신 후, 삼손은 두 눈이 뽑힌 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끝 모를 학대와 멸시를 당하던 삼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루하루 힘겹게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삼손이 비참한 모습으로 맷돌을 돌렸다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절망의 시간이 사실상 회복의 시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사사기 16:22).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삼손의 머리털 자체가 초자연적인 힘을 내는 원인은 아닙니다.
다만 삼손의 머리털은 ‘하나님과 삼손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삼손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머리털이 자라는 동안, 삼손은 많은 감정의 변화를 겪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던 여인의 배신과 블레셋 사람들의 심한 고문 때문에 분노가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삼손은 이 모든 것이 교만하고 방탕했던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철저히 회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육체의 눈이 뽑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의 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가 ‘살아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일 당시의 수치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자살을 선택했더라면,
그에게는 회개도, 회복도, 소망의 기회도 생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힘만 세고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한낱 이스라엘의 건달꾼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하루 빨리 잊고 싶은 수치스럽고 불쾌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경제적 불황이 장기화 되면서, 서민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상류층들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또한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학업 스트레스와 학교 폭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마치 자살이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자살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아닐뿐더러,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최악의 상처를 남기는 길입니다.
또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그들의 명예조차 온전히 회복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살아남은 가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만 변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자신에게 그토록 큰 고통과 상처를 준 가해자들을 더 대담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잠깐의 소란만 생길 뿐, 모든 것은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갑니다.
여러분이 살아있어야 진정한 회복의 기회도 생깁니다.
여러분이 살아있어야 새로운 소망과 가능성도 생깁니다.
여러분이 살아있어야 세상의 온갖 부정의를 몰아내고, 이 사회를 아름답게 바꿀 일꾼도 생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순간, 이 모든 것도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죽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조선왕조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살아있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입니다.
그가 집권하기 전, 조선의 왕족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우하게 살았습니다.
말만 왕족일 뿐, 조금이라도 두각을 드러내면 오히려 안동 김씨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혀 큰 핍박을 받았고, 때로는 목숨도 잃었습니다.
이 때, 이하응은 안동 김씨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거렁뱅이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술 취해 돌아다니며 건달패들과 어울렸고, 권력자들의 잔칫집을 돌아다니며 빌어먹기를 일삼았습니다.
잔칫집에서 권력자들이 부침개에다 침을 뱉어 내던지면,
그는 그것을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닦고는 크게 웃으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모욕까지도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 대한 의지’에는 충분한 보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고종의 친아버지가 되었고, 사망한 후에는 ‘대원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온갖 핍박과 모욕 가운데서도 끝까지 살아남았기에 얻은 상급이었습니다.
몇 년 전(2010), ‘오하라 미쓰요’ 씨의 베스트셀러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가 10년만에 개정되어 출간되었습니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 심한 왕따를 당해 할복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녀는 폭주족과 어울려 다니며 마약과 혼숙을 일삼는 비행소녀가 되었고,
마침내 16살에는 야쿠자 보스의 아내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그녀는 호스티스 생활을 하며 밑바닥 인생을 전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오래 전부터 알았던, 아버지의 친구 ‘오히라’ 씨가 그녀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최대의 복수는 네가 보란 듯이 꿋꿋하게 일어서는 거야!”
그 한마디의 말을 듣고, 그녀는 23세부터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한자도 제대로 못 읽었던 그녀가 공인중개사, 사법서사 자격시험에 연달아 합격하고,
1996년에는 29살의 나이에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비행 청소년 전문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오사카>시의 부시장도 역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든 자서전 제목이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입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는 살아있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도서 9:4).
그렇습니다. 밀림의 왕 사자도 일단 죽으면 살아있는 똥개보다 못한 법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간에, 살아있는 모든 자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여러분의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소중하게 간직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즉 우리의 생명 자체가 우리 인생의 ‘스퍼트’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또한 그것이 ‘다시 자라나는 삼손의 머리털’이 보여주는 은혜입니다.
2. ‘현재의 최선’을 찾으라.
그런데 삼손이 견뎌내야 했던 치욕과 수모는 두 눈이 뽑힌 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 ‘다곤’이 원수 삼손을 이기게 해주었다며, ‘다곤’을 위한 큰 축제를 열었습니다.
한창 축제의 흥이 돋았을 때, ‘다곤’ 신전에 모여든 수천 명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철천지원수였던 삼손을 불러내어 놀잇감을 삼자고 요구했습니다.
마침내 그들 앞에 끌려 나온 삼손을 향해, 그들은 온갖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우스꽝스러운 ‘쇼’까지 벌여야 했습니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삼손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자신을 이끌던 소년에게, 자신을 ‘다곤’ 신전의 중심기둥으로 인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즉 삼손은 ‘다곤’ 신전을 떠받드는 중심기둥들을 무너뜨림으로써 그 안에 들어온 모든 블레셋 사람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품었습니다.
그것이 삼손이 그 당시 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던 예수님께로 몰려 들자 다양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식량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수천 명의 군중들을 인근 마을로 흩어 각자 식사를 하게 만들자고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가복음 6:37)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말도 안 된다며 아우성치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마가복음 6:38).
그러자 제자들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얼마 되지 않는 양식을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나누기 시작하자 성인 남성만 5천 명이 식사를 했고, 남은 부스러기가 12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장 그곳에 있는 것’을 점검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삼손이 하나님께 ‘내가 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해야겠으니, 저에게 군사 1천 명만 붙여주십시오’라고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비록 하나님의 입장에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예수님과 똑같이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먼저 그곳에서 네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라.’
많은 사람들은 큰 문제를 만나면 침착하게 ‘현재의 최선’을 찾기보다,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거나 암울한 현실을 놓고 불평만 터뜨립니다.
판사나 변호사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당장해야 할 일은 법전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과목을 충실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판사나 검사가 될 건데, 이런 수학 미적분이 왜 필요해요?’라며 투덜거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현재의 최선’은 법전 외우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현재의 최선’을 찾기보다, 자신의 교회가 자신의 이상과 꿈에 맞지 않는다며 불평만 늘어놓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양한 시설, 행정체제, 서비스 그리고 사역 등을 언급하며, 그런 것이 완비되지 않은 현실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그런 미비한 현실 때문에 자신은 실제 사역과 봉사에 뛰어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어차피 ‘못 먹는 감, 한번 찔러나 보는’ 셈입니다.
하지만 찔러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한번’ 찔러나 보는 것이지만, 교회 입장에서는 자칫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과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상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당장 해야할 일은 ‘현재의 최선’을 찾는 것이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비되면 좋겠지만, 어차피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중형 장로교회에서 실제로 발생한 일입니다.
연말 당회에서 장로들이 갑자기 담임목사에게 사임을 요구하더니,
몇 주 뒤 주일 낮예배 후에는 일부 중직들이 주동이 되어 담임목사 불신임투표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직들이 담임목사에게 사임을 요구했던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에게 도덕적 문제나 재정문제 등의 비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교회가 부흥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멀쩡한 담임목사를 쫓아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담임목사만의 책임입니까?
오히려 장로들을 비롯한 중직들이 연대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교회의 부흥이 정말 걱정이라면, 오히려 중직들부터가 전도지들고 직접 길거리로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목사님을 쫓아낸 그 교회는 그 후 부흥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후에 들어온 목사님이 실제로 그 교회를 부흥시키긴 하였으나, 또 다시 얼마 견디지 못하고 사임하였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그 충격으로 이전보다 더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 교회는 끝 모를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 2010년 후반부터 2011년 초까지, 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기억하십니까?
그 드라마의 주인공 김주원(현빈)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현재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혹시 여러분은 지금 현실에 없거나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을 놓고 쓸데 없이 힘만 빼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대한 꿈과 이상을 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길부터 찾기를 원하십니다.
3.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다.
마침내 삼손은 수천 명을 수용할 정도로 웅장했던 ‘다곤’ 신전의 2개의 중심기둥들을 두 손으로 붙들고 섰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과연 그 기둥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에 대하여, 그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괜히 어설프게 기둥을 밀며 낑낑대다가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더 큰 조롱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사사기 16:28).
간절히 기도한 후, 삼손이 기합을 주며 거대한 중심기둥들을 밀자,
그 기둥들은 우지끈 소리를 내며 금이 가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삽시간에 ‘다곤’ 신전 건물 전체가 그 곳에 모인 무리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바람에, 지붕에만 3천 명이 모일 정도로 인파가 몰렸던 ‘다곤’ 신전은 순식간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그 곳에는 블레셋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도 대규모로 참여했었는데, 그들도 함께 봉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삼손도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날 삼손 때문에 죽은 블레셋 사람들의 숫자가 삼손이 그때가지 죽인 블레셋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았습니다.
즉 이날 삼손은, 이스라엘 민족을 외적들로부터 보호해야 할 임무를 지닌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인생 최대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삼국지>에서 유래된 한자 고사성어 중에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후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도 유사한 말씀을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우리가 최선을 다한 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 한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어떠한 결과를 주시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손은 그곳에 누가 그리고 얼마나 모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삼손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후, 간절히 기도하며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더니 하나님은 그의 인생 중 최대의 업적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삼손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사사기 16:31).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조상의 묘에 장사되는 것을 중요한 영예와 복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성경은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20년 동안 봉직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록합니다.
이것은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최종적으로 인정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삼손은 그의 최후 업적을 통해 잃었던 과거의 명예를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삼손이 원래 계획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기도하며 최선을 다한 삼손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최근 각종 통계와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극도의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극심한 경기침체와 경제불안으로 미래가 너무나 불투명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민층의 경우에는 노후대책은커녕,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살얼음판 걷기입니다.
상당수의 서민들은 저축은 아예 꿈꿀 수도 없고, 사채이자나 생기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 결과 많은 서민들이 최후의 경제적 보루인 적금통장과 보험까지 다 깨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위험하고 불안한 인생길을 어떻게 완주하실 계획입니까?
1800년대에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님으로 봉직하셨던, E. M. 바운즈 목사님은 <기도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단지 우리가 일할 뿐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곳에도 혹시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 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불안한 미래를 위해, 오늘도 정신 없이 동분서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최선을 다한 후에는 불안해 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걷는 인생길의 방향과 끝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6).
지난 4주간 우리는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문제투성이 삼손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스스로 방심한 결과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다시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를 하며, 또 다른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마라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훌륭한 ‘스퍼트’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