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이병률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에서
이병률 시인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바다는 잘 있습니다}와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을 통해서 대한민국 제일급의 시인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병률 시인의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그의 베스트 셀러의 표제시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병률 시인의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의 시이며, 이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높이 높이 끌어올리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플라톤의 스승은 소크라테스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은 플라톤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고, 쇼펜하우어의 스승은 칸트였다. 나폴레옹 황제의 스승은 알레산더 대왕이었고, 장 자크 루소의 스승은 플라톤이었다. 이처럼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들은 어느 누구를 헐뜯고 경멸하기 이전에 자기 스승의 인품과 그 업적에 끊임없이 존경과 찬양을 바친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존경과 찬양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욱더 높이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전인류의 스승으로 만드는 지름길인 것이다. 끊임없는 존경과 찬양은 ‘일일삼성一日三省’이 되고, 이 ‘일일삼성’은 천재생산의 최고급의 교수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끊임없는 존경과 찬양은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고통의 지옥훈련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적’이란 어떤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며, 그 어떤 일들의 잘, 잘못을 따져보거나 성찰해보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가 될 것이고,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은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이 있었지 않았던가”가 될 것이다.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은 이별의 슬픔 앞에서 진정으로 울어본 적이 없었다가 될 것이고,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은 타인의 시선과 조롱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토록 어리석고 부끄러운 짓을 자행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은 이상적인 스승을 정하고 그 스승에게 존경과 찬양을 바쳐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고,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은 매사에 게으르고 우유부단하며,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도 없었지만, 그리하여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도 없었던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적’은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이고, 또한 그의 ‘적’은 끊임없는 자기 학대와 제일급 시인이 되기 위한 화두이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그러나 아주 단순한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이 아니라,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이 있었던가라는 시구에서처럼, 미래지향적이고 선구자적인 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의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천재는 이상적인 미래를 향해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고하게 나아가고,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이리저리 우물쭈물하다가 허송세월을 보내고, 가장 어리석고 못난 최하천민들은 이상적인 목표 따위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병률 시인의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적의 시학’이며, 이 ‘적의 주인공’은 그가 가장 사랑하고 그를 위해 끊임없이 무한정진하고 있는 고귀하고 위대한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깊이 있게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배운다는 것이고, 잘 질문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과 그 가치관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다는 것이다. 시인은 가치창조자이며, 미래의 인간이고, 따라서 그의 이상적인 낙원으로 만인들을 인도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병률 시인의 ‘당신’은 ‘우리모두’가 되고, 그 당신들을 위해 ‘절차탁마의 정신’으로 시를 쓰며,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아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적’은 이병률 시인의 시학이며, 시인 정신이고, 영원한 명시의 텃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