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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출 1: 8-14
야곱의 가족 70인은 7년 대 기근의 때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하여 애굽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 애굽으로 이주한 그들의 숫자는 70인 이었는데 430년이라는 세월동안에 12장37절에 가보면 여자와 아이의 수를 제하고서도 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계산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고 하신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7절에는 이러한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때에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복을 주십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나는 월급쟁이인데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도 거기서 거기이지 뭐 별다른 수가 있겠나?"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인간의 계산법과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르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계산법은 1+1=2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법은 1+1=무한대입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하나의 씨를 심으면 30배, 60배, 100배, 그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자신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용기를 잃고 더욱 큰 비전과 축복의 꿈을 잃어버릴 때가 많은데 오히려 하나님의 계산법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앙의 도전을 할 수 있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끔찍한 환난이 닥쳐왔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강제노역을 시키며, 이스라엘백성 멸종정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1.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 이스라엘 민족에게 닥친 환난
8절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했는데, 여기 '일어나서'란 말은 '반기를 들고일어나다'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란 애굽의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들어선 제 18왕조(B.C. 1580-1314)의 세 번째 왕인 투트모스 1세(Thutmose Ⅰ, B.C. 1539-1514)를 가리킨 것입니다.
힉소스 왕조는 셈족으로 애굽 왕을 몰아내고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셈족인 요셉과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굽인들이 이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제 18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들은 그 동안 유대인들이 누리던 모든 특권을 박탈했습니다.
그런데 이 새 왕이 두려워한 점이 무엇입니까? 9, 10절을 보십시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창성하는 것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쫓겨난 힉소스 왕족들과 합세하여 애굽을 대적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또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도 애굽 사람들과 같지 않고, 문화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더욱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묘책을 구하던 중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경제번영에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또 강제노동을 시켜 이스라엘을 괴롭혀 번식을 억제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모든 특권을 상실하고 바로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왕은 이들 위에 감독을 세우고, 왕의 국고성인 라암셋과 비돔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거기에 잉여 곡식을 저장하고, 또 군량미와 무기도 보관하여 동방제국의 침략을 대비하고, 원정을 준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중노동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당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몸과 마음이 더욱 튼튼해졌습니다. 양만 치다가 힘든 운동을 하니 몸이 더욱 건장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노동으로 많은 괴로움을 당했으나 오히려 더욱 번성하고,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인하여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유명한 윤리학자이며 전기작가인 [풀루타르코스]-"인간의 위대성은 그가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고 했답니다. 고난이 온다고 낙심만 하지 말고 믿음으로 극복하는 성도가 되어야하겠습니다.
※ 삶은 달걀 같이!
탈무드에 보면 "인생은 삶은 달걀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이 오거나 고통을 기념하는 날이면 삶은 달걀을 먹는다고 합니다. 더욱 인상깊은 것은 그들의 결혼식에도 종종 삶은 달걀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대개 뜨거운 불 위에서 끓으면 끓을수록 액체로 변하는데, 오직 달걀만은 끓으면 끓을 수록 단단하여 집니다. 우리의 인생도 고난이 오면 약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강하여 지고 놀랍게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스런 날이면 삶은 달걀을 먹으며 자신의 삶에 용기와 힘과 소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 교통사고로 모든 행복을 잃었던 한 여인
빌리 그래함의 <소망 그 상한 마음을 위하여>라는 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1982년 어느 날 아주 행복한 삶을 살던 여인이 술에 만취한 운전자와의 충돌로 차는 폭발하고, 함께 탔던 어머니는 즉사하고, 그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행복과 꿈을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6주 동안이나 혼수상태였으며, 수술을 70번이 넘게 하였고,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눈은 없어지고, 코가 삐뚤어 졌으며, 몸은 상처투성이이고, 한쪽 팔도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기 싫어서 7년 동안 집에서 텔레비전만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전도집회를 시청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시청하다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숨어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 가운데서 구원시키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능한 사람들을 돕는 재활센터에서 봉사하며 축복의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 어느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가 가장 기쁜 순간입니다."
바로 왕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엄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13, 1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엄하다는 말은 '산산조각을 내다', '부수다'는 뜻으로 노예와 같이 철저히 부려먹고, 조금이라도 말 안 들으면 사정없이 때려죽일 만큼 잔인하게 학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벽화 중에는 나체가 된 노예들이 땅에 엎드려 있고, 가죽 채찍을 든 감독들이 사정없이 내려치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그림 중에는 "내 손에 채찍이 있다. 게으르지 말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애굽 왕이 얼마나 잔혹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흙이기, 벽돌 굽기, 운하를 파고 댐을 건설하는 일, 또 높은 곳으로 물을 퍼 올려 농장에 물을 대는 일도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대 절대 군주들은 이런 일에 엄청나게 많은 노예들을 동원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운하를 팔 때 동원된 인원이 15만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 2만 명의 노예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거대한 피라밋 같은 것을 쌓을 때도 수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이러한 고통 속에 두셨겠습니까?
2. 이스라엘 민족이 환난을 당하게 된 원인
1)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 코카콜라 회사의 상술
세계적인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코카콜라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공짜로 콜라를 나누어주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맛에 입맛이 길들여져서 다른 음료는 입에 대기도 싫고, 콜라만 마셔야되는 그야말로 중독상태까지 빠진다는 겁니다. 어떤 분은 심지어 콜라에 밥을 말아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코카콜라는 불티나게 팔렸고 세계적인 굴지의 회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세상 것에 맛들여 놓으면 하늘의 신령한 것들이 맛이 없어집니다. 진짜 맛은 신앙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세상에 빠져버리면 마치 파리가 꿀을 빨아먹다가 거기에 묻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 듯이 영적인 사망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나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구미를 당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이 혹시 하나님과는 멀리하고 떠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절제하고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300년 이상 애굽에서 살면서 거기서 얻은 부귀영화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애굽이라는 세상에 안주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괴롭힘을 당하면서 불신자들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이기적이며, 물질적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며 부패한 인간들인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또 더 이상 애굽에 머무르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떠나야 함을 알도록 도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심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박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끼리 합심하게 되고, 민족의식과 동포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섭리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야 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을 떠날 마음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모세 한 사람을 키우시고, 출애굽의 대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조상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변치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창 15:13,14).
또 이 때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점차 관영하여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는 때였습니다(창 15:16). 우리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작정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 길에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의미 없는 고난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어 탄식하고 절망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원대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우리 인생 길을 주관하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크고 놀라운 뜻과 섭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택하신 자들에게는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어떤 곳이든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크고 놀라운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가장 절망적인 때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둘 째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와 같은 환난을 당하게 된 원인은?
2) 선민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음에 고센이라는 땅에 구별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의 문명에 혼합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기억치 못하게 됐던 것입니다. 완전히 애굽화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의 손에 붙여 고난의 불 속에서 시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혼합되어 얄팍하고 일시적인 세상 것에 매력을 느껴 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노예, 죄악의 노예, 마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있을 곳에 있고, 있지 않아야 할 곳에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강단종이 있는데요, 이 강단 종은 여기 있어야 구별되게 쓰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단종이 화장실 쓰레기 통 옆에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추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성도가 주일날 예배시간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 시간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든지, 산이나 들에 놀러가서 있다든지, 낚시터에 가서 있다든지, 논밭에서 일하고 있다든지, 심지어 술자리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한 것입니다. 제때에, 그 적절한 장소에 있는 것이 구별된 것이요,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반드시 있어야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아서 구별된 삶을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징계의 환난과 고통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서 주님께 인정받고 복 받는 성도들이 되도록 해야하겠습니다.
⊙ 결론(決論)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삼고 학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갑자기 끔찍한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환난을 당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1)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2) 선민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사는 참 성도가 되겠다고 새롭게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힘입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이스라엘과 애굽(출 1: 8-14)
신자가 신앙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모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무시하고, 때로는 핍박을 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은 신자들을 이해해주지 않다.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린다는 것 자체까지도 아무 쓸데없는 일로 여겨버린다. 오히려 조롱하고,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일들이 허다한다. 그런 세상에서 신앙으로 산는 것은 그들과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과 결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세상을 사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해 버린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문제이고, 세상을 사는 것은 자신의 사생활 정도로 여겨버리는 것이다. 기껏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펴는 좋은 일에 나서고, 주일이면 예배당 가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다.
신앙은 세상으로부터 결별을 의미한다. 세상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이다.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 것을 억고 지키기 위해서는 신앙의 양보와 타협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모습은 결코 신앙이 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신앙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지요,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기뻐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 그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부터 우리는 춮애굽기를 통해서 세상에서 벗어나는 신자의 모습을 배워보고자 한다. 애굽에서 구출되는 이스라엘의 모습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란 여러분이 잘아시는 대로 애굽에서 빠져나온 일에 대한 기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이라는 남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서 다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십니다. 그때 있었던 일이 출애굽기입니다. 신앙은 옛사람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그때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 같은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옛사람의 자리로부터 벗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들의 신앙과 능력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과연 기존의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기존의 자리는 좋은 것을 제공하고, 세상의 기쁨을 제공해주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자리는 오히려 고달프고, 번거롭고,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새사람의 자리를 소원하며 기존의 삶의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시겠습니까?
그런 간절한 소원이 있는 신자는 출애굽기가 매우 유익하고, 힘을 주는 말씀이 될 수 있지만, 어려움을 회피하고 싶고 세상의 좋은 것을 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출애굽기는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같이 새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의 자리에 서 있는 내가 되기를 소원하면서 출애굽기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출 1:1-7까지 보면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번성하게 되었다는 내옹입니다. 이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으로서 살아야 했던 것은 이미 창 15:13절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때문에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가게 된 것, 그리고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으로 살게 된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계획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서 인도된 삶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른 자들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존재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의 근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을 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과 다르다는 것은 생활풍습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외모에서 신자의 티를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면서 뭔가 세상의 것이 목적이 아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삶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의 것이 자기들이 힘이고 소망이기 때문에 모든 근심과 걱정이 땅의 것으로부터 발생되지만 복의 근원된 신자는 세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열광과 열성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광적이고 열성적인 신앙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열광과 열성을 통해서 스스로 확신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열광적이고 열성적인 신앙 생활들이 식어지고 사라질 때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보이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여지는 신앙의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종교적인 열성을 증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말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한 왕’이라는 것은 요셉 때에 요셉에 의해서, 즉 요셉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애굽이 강대국이 된 은혜를 모르는 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 나느냐면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는데 하나님이 왜 있어야 하고, 교회가 왜 필요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재주로, 자기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능력있는 지도자를 더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이 보존되고 있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신자는 그들의 사고방식과 함께 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셉을 모르는 왕과 같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애 힘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것이 없으니까 세상에 미련이 없습니다. 미련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이 여유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무슨 열광적이고 열성적인 종교적 모습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는데 왜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는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애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믿어냐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느냐?, 내가 인도하는 대로 나를 따라 나올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출애굽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에 의한 자기 소신이 없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16절을 보면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한 히브리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깁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세상의 힘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는 이유는 세상에서 사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세상에서 살아있으면서 목숨을 포기한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들의 힘을 구축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지금 신자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오해한 모세와 이스라엘을 통해서 현재 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출애굽을 공부하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양보하고, 타협하고, 뒤로 물러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믿음으로 살 때 여러분을 통해서 많은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열매로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