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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신화' 해부하기 |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귀하께서는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현대경제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귀하께서는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귀하께서는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귀하의 삶에는 끊임없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가장 수입하고 싶어하는 인물 박태준에게 프랑스의 대통령 미테랑이 지난 90년말 바친 헌사다. ‘한국에 봉사하는 것이 당신의 인생’이란 그의 헌사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일수도 있겠지만, 찬찬히 박태준이라는 인간의 삶의 여정을 좇아가다보면 이보다 더 정확한 평가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77)에게는 군인, 기업인, 정치인이라는 강한 이미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중심에는 늘 ‘국가’가 있었으며, 이 국가를 살리기 위해 그는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어서 모두 불가능하다고 한 제철산업을 불과 반세기반만에 세계 최고의 철강 기업으로 이끌었다. 미국이 자랑하는 철강인 카네기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박태준 회장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한 소설가의 8년에 걸친 작업끝에 나왔다. 소설가 이대환씨가 집필한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이 그것이다. 1927년 경남의 시골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여섯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대 기계공학과를 다니다가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6기로 들어가 당시 중대장이던 박정희 대위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동료 중대장 12명 가운데 10명이 사망하는 6·25동란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그는 5·16때도 거사에는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혁명주체’로 부상한다. 혁명에 실패할 경우 군을 이끌어 가야하고, 또 박정희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씨앗’으로 박정희가 심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박태준은 혁명세력들이 ‘즐기던’ 권력놀음에 끼지 않고 1963년 대선 전후 박정희의 정치참여 설득을 거부한 채 미국 유학을 준비한다. 물론 1964년 새해 박정희의 특명에 따라 유학을 포기하고 일본 특사로 떠나지만, 항상 권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썼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대일청구권 자금’과 ‘베트남 특수’라는 밑천을 바탕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사는 국가의 건설에 있었다. 그래서 박태준은 틈만나면 포철의 동지들에게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과 “제철을 일으켜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자”는 ‘제철보국 정신’을 불어넣는다. 조업개시 6개월만에 흑자를 달성한 그는 1기 건설의 성공을 바탕으로, 2기, 3기의 550만톤 체제를 완성하여 세계적 제철소의 기반을 마련한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박태준은 단호한 원칙과 번개같은 기지로써 돌파하며 전화위복의 기회로 바꾼다. 그의 최대 시련기는 1988년 민정당 비례대표로 정치에 발을 담그면서부터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는 광양 3기, 4기 건설에 집중하면서 21세기의 포철을 위한 경영다각화와 기업체질강화를 강력히 추진해나갔으나, 결국 김영삼과의 갈등으로 평생 몸담았던 포철과 결별하고 해외유랑에 나선다. 그가 도쿄에 머무는 동안 권력은 박태준 주변의 부정한 돈을 찾기 위해 샅샅이 파헤쳤으나 허탕만 치고 만다. 오로지 정도의 길을 걸어온 그의 인생 덕분이다. 식민지와 전쟁, 빈곤과 부패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당대의 변혁을 위해 달려온 박태준 회장. 희수를 맞은 그는 다시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복귀, 후배 기업가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
2004.12.20 [월] 이타임즈넷 |
첫댓글 타짜님 좋은글 올렸네요. 대한민국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지요.
타짜님!좋은 글입니다...잘 읽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