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라 (고린도후서 1:3-4, 데살로니가전서 4:13-18)
1.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긍휼, 거룩, 사랑, 순수등이 있고, 위로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디테일한 것이 위로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힘들고 어려운 것을 위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요. 요즘은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2. <리즈 부르보>라는 프랑스의 상담가는 35년 동안 수백만 명을 상담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상처” 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의 첫 마디는 “실제로 나쁜 사람은 없다. 그저 고통스러운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인생의 상처가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지요.
다섯 가지 상처를 소개합니다. 받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두세 가지의 상처는 있게 마련입니다.
(1) 거절당한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늘 도피하고자 한답니다. (2) 버림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의존적인 사람이 된답니다. (3) 모욕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숨기며 산답니다. (4) 배신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한답니다. (5) 차별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완고한 사람이 된답니다.
자신을 꼭꼭 감추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라면서 모욕을 당한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모욕을 당하지 않고자 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람을 많이 의존하는 편입니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지요. 저 같은 사람은 버림 받은 상처가 있는 것이지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지요.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위로의 하나님” 을 소개합니다. 위로라는 말은 <파라클레시스>입니다. 성령의 이름,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서로 뿌리가 같습니다. 성령의 하는 일이 위로의 일이고, 서로 위로하는 일이 곧 성령의 일인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위로의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특이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엄격한 사람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서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처럼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자조차도 용서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고자 한 자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4. 저도 하나님의 위로 때문에 목사가 된 자입니다. 사춘기 때에 집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겨우 찾아간 곳이 교회였습니다. 나같은 사람도 나갈 수 있는 곳이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기면서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어준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저는 항상 제 속에 나쁜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도 하지만, 죄인이기에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가 있기에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욕망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까? 욕망과 이기적인 것이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유명한 분들을 봅니다. 그 중에는 이름난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모두 욕망 때문이지요. 재물욕, 출세욕, 권력욕, 성욕에 의한 것이지요. 그들은 우리보다 더 악하기 때문에 감옥에 간 것인가요? 아니지요. 그들은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삽니다. 재물도 많습니다.
부러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욕망 때문에, 오직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그런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서 “나도 그런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위로하면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마음들이 새로워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새롭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5. 모든 종교는 인생이 반듯하게 사는 것을 가르칩니다. 경전의 가르침대로 살면, 한번 사는 인생 욕먹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고 살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는 자신을 비우고 사면 부처가 된다고 합니다. 유교는 사서삼경의 배우고 살면 인자하고 덕망 있는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수천년을 내려왔지만 인간은 여전히 죄일일 뿐입니다. 세상도 여전히 복잡하고 시끄럽기만 합니다. 더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더 악해지는 모습입니다. 가르침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은혜를 강조합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통하여 이런 인생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한국에 어머님을 뵈러 나갈까 하다가 10월로 연기하였습니다. 지금 나가나 그 때 나가나 못알아보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거의 못알아보십니다. 당신이 집사인 것도 모르고, 아들이 목사인 것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것도 모릅니다.
오직 남아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어머님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 뿐입니다. 그렇기에 은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6. 오늘 성경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고 하십니다. 여기서 위로하라는 말은 격려하라는 뜻입니다.
서로 격려하면서 용기를 잃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로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보살펴주는 것입니다. 감싸주는 것입니다.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끝이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죽을 때까지 위로를 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면서 참된 위로와 격려가 따로 있음을 말해줍니다.
7. 당시에 데살로니가교회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1)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짐으로 인하여 신앙이 나태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주님이 재림하므로 모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20년, 30년이 지나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약해지고 나태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나라로 갈 것만을 생각하였기에 이 땅 여기에서 먹고 사는 것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오래 믿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기에 신앙이 약해지고 나태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물질의 복주시는 이로 믿었는데, 안 믿는 사람들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점점 퇴보하는 것입니다.
(2) 두번째는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에 관한 관심이었습니다.
재림이 늦어지니, 자기들도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를 가지고, 이야기거리를 삼았습니다.
신앙이 나태해지다 보니, 염려는 많아졌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죽고 난 뒤의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내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과 같지요.
8. 이러한 내용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바울은 두 가지로 격려하십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면 산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나 산 자들이나, 반드시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덕이 있어도 예수님은 결코 변덕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할지라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그들을 먼저 일으켜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호각소리와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들이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믿음의 격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따지거나 탓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께 수고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서로 격려하여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9. 전도서에 “너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였고, 또 “청년이여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의 때에 너무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에만 마음 빼앗겨 살지 말라는 것이지요. 인생을 심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지요.
청년일지라도 세월흐르고 나면 노년이 되고 죽을 날이 찾아오니, 너무 젊다고 기고만장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이러한 말로 위로하라는 것은 단순히 나이가 든 노년의 언어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청년의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게 살 것을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10.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고, 인생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지요. 안 믿는 사람들도 “죄 값을 치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가리켜 “죄 값을 치르는 중이다”고 합니다.
어떤 어머니께서 죽기 전에 아들 딸들을 불러놓고 “너희에게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는 말씀을 남기었습니다. 죽으시면서 무엇이 그리도 미안한 것일까요?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던지, 저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그 고생을 하며 살게 한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고생만 남겨놓고 어미만 먼저 가게 되서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죄 값이 이처럼 끝이 없고 무거운 것입니다.
누가 죄 값을 다 치르고 살겠습니까? 어느 인생이든 스스로 죄값을 다 치르고 평안하게 죽기가 쉽지 않습니다. 죽고 난 뒤에 나를 향해 누가 침을 뱉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자식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 죄 값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에 무엇이 참된 위로가 될까요? 어떤 말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생에게 소망과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11. 너싱 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오래 하였던 어떤 간호사께서 쓴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죽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후회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답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싶은 인생 한 번 살지 못하고, 늘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에 마음 빼앗겨 살다가 마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인정받고자 늘 눈치 보며 산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로 인해 누구가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다면, 그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인 것입니다. 남을 나처럼 여기면서 사는 것은 참 겸손한 모습입니다.
12. 한국의 제주도에 예멘이라는 나라의 난민들이 들어와서 난리입니다. 예멘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남쪽에 있는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서 살 곳을 찾아 도착한 곳이 제주도입니다.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날카롭게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은 인도주의 입장에서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어찌 남까지 받아들여 더 힘들게 하냐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입장은 저들이 이슬람의 모슬램 사람들인데, 저들이 가까운 나라도 마다하고 한국까지 온 것은 한국을 이슬람문화로 침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날 밤에 꿈을 꾸었는지, 다음 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난민이 되어 저들 가운데 있고, 오갈데 없는 사람을 서로 싫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난민일 수 있습니다. 세상 풍파에 난민이 되어서 죽음이라는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있는 것이라고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믿음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시기기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고 또 주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13. <이름트라우트 타르>라는 분이 “나도 위로받고 싶다” 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위로가 영혼의 양식이다”고 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더욱 위로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점점 더 약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위로하지 못하는 것은 위로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임에도, 초상집에서나 하는 말로 취급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초상집에서 하는 위로의 말은 실질적으로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인사치레이지요.
저자는 “적합한 말 한마디가 절망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듯이, 위로의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게 한다” 고 말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잠언서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잠언서 25장 11절에, “경우에 함당한 말은 아로새신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하였습니다.
“은쟁반의 금사과”라는 표현은 가장 귀하고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경우에 합당한 말”을 이사야는 50: 4절에서 “하나님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바로 곤고한 자를 위로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말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위로의 말이 학자의 혀와 같은 것입니다.
위로를 귀하게 여기고 위로하고 살면 그 위로가 자신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위로의 백성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