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금서면 동의보감[東醫寶鑑] 촌탐방
일시:2021년11월14일 오전12시~1시 장소: 산청군 금서면소재 참여:윤호상 박종래,정국래.김명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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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관 허준이 중국과 조선의 의서를 집대성하여 1610년에 저술한 의서. 의학서.
25권 25책. 1610년(광해군 2)에 완성하여 1613년 내의원에서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 목활자로 첫 간행된 조선 최고의 의학서적이다.
이 책은 원래 1596년(선조 29)에 태의(太醫) 허준이 왕명을 받아 유의(儒醫)인 정작(鄭碏)과 태의 이명원(李命源)·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찬집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그 뒤 선조가 허준에게 다시 명하여 계속 편집하도록 하였으며, 내장방서(內藏方書) 500권을 내주어 고증하게 하였다. 허준이 전심전력하여 1610년에 마침내 완성하자, 왕은 곧 내의원에 명하여 인출(印出), 널리 반포하게 하였다.
책 제목의 ‘동의(東醫)’란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전통에 비견되는 동쪽의 의학 전통 즉, 조선의 의학 전통을 뜻한다. ‘보감(寶鑑)’이란 “보배스러운 거울”이란 뜻으로 귀감(龜鑑)이란 뜻을 지닌다. 허준은 조선의 의학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과 조선 의학의 표준을 세웠다는 뜻으로 ‘동의보감’이라 이름 지었다.
『동의보감』의 편찬사업은 1596년 왕명으로 시작되어 14년 후인 1610년에 완수되었다. 처음에는 허준을 비롯한 5인이 공동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했으나, 사업 초반 사정이 생겨 허준이 단독으로 집필하여 책을 완성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는 이듬해인 1593년 서울에 돌아와 전쟁 피해의 회복에 힘을 썼다. 조선은 전쟁의 참화로 피폐해졌으며, 민간에서 이용되던 대다수의 의학 서적들도 없어지게 되어 책을 구하기 힘든 형편에 놓였다. 1596년(선조 29) 선조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수의(首醫) 허준에게 이런 상황을 일신(日新)할 새 의학서적의 편찬을 지시했다.
허준은 왕명을 받아 당시의 뛰어난 의원을 망라해 의서(醫書) 편찬작업을 시작했다. 어의인 양예수(楊禮壽)·이명원(李命源)·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 등 4인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유의(儒醫) 정작(鄭碏)이 그들이다. 양예수는 허준보다 선배 세대의 어의로 신의(神醫)로 평가받은 인물이고, 정작은 어의는 아니지만 민간에서 형 정렴(鄭磏)과 함께 도교적 양생술의 대가로서 의학에 밝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이명원은 침술에 밝았으며, 김응탁·정예남은 신예 어의였다.
이렇게 많은 의관(醫官)와 의원(醫員)들이 모여서 의서 편찬에 투입된 사례는 세종 때 10인이 참여한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 밖에 없었다. 이처럼 『동의보감』의 편찬사업은 처음부터 국가의 지대한 관심에 따라 대규모로 기획되었다.
초창기에 이 책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이고 병이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당연히 몸을 잘 지키고 병을 예방하는 것이 병 걸린 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무수히 많은 처방들의 요점만을 간추린다.” 중국에서 수입된 의학책이 매우 많았는데,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저 책은 저렇게 말하는 등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셋째,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조선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 시골에는 약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나는 약을 써야하는데, 그게 어떤 약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시골사람이 부르는 약초 이름을 쓴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차례가 겨우 정해졌을 때, 1597년(정유년) 1월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오는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서 참여한 인물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려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일이 중단되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1601년 봄 선조는 허준을 불러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금의 의서 500여 권을 내주면서 의학 책의 편찬을 맡겼다. 이 때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단독으로 편찬할 것과 함께 더욱 시급한 의학 책인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등 3종을 우선 지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세 책은 그 해에 지어서 바쳐졌으나, 『동의보감』 편찬에는 허준이 공무(公務)로 틈을 내지 못하여 1608년이 되도록 절반도 끝내지 못했다. 이해 선조가 승하하자 그 책임을 물어 허준은 의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허준은 의서 편찬에 전념했다.
1609년 말 허준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인 1610년 8월 완성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 바쳤다. 광해군은 허준이 선왕의 유업을 완수했다고 하여 그에게 좋은 말 1필을 상으로 내렸다. 전란 직후라 출판할 사정이 좋지 않아 인출본은 3년이 지난 후인 1613년에 내의원의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 목활자를 사용하여 출판되었다.
허준 [許浚]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낸 허곤(許琨)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역임한 허론이다. 허론의 정실은 일직 손씨였으며 허준의 생모였던 영광 김씨는 소실이었다. 허준의 이복 형 허옥(許沃)은 임금의 신변보호와 궁궐수비를 책임지는 내금위에 있었고, 동생 허징(許澄)은 서자이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교검, 교리 등 내직을 지냈고 선조때 영의정이었던 노수신(盧守愼)의 사위가 되었다.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에서 태어났다. 비록 서자였지만 차별받지 않고 명문가 출신답게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 등에 밝았다. 허준이 형제들과 달리 어떤 계기로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의하면 1569년(선조 2)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하였고, 1573년(선조 6)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9년 이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양천 허씨 세보》에는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알려져 있어 두 가지 설 모두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1575년 어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기 시작했으며, 1578년 내의원첨정이 되었다. 1587년 10월에는 태의 양예수(楊禮壽) 등과 함께 선조를 진료하여 건강이 좋아지자 호피(虎皮)를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1590년에는광해군의 두창(痘瘡)을 치료하여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어의로서 선조 옆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셨으며, 그 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병을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제수되었고, 이때부터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 등 여러 의원들과 함께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발발로 의서 편찬이 어려워 보류되었다가 본격적인 편찬은 16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601년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에는 양평군(陽平君)에 올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으나 중인 신분으로는 과도한 벼슬이라 하여 대간(臺諫)들의 반대로 보류되기도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그는 광해군 대에 주로 의서를 편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醫方類聚)》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림촬요(醫林撮要)》를 비롯하여 중국측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된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오늘날까지 애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과 중국에까지 전해져 중국판 서문에는 ‘천하의 보(寶)를 천하와 함께한 것’이라 하였고, 일본판 발문(跋文)에서는 ‘보민(保民)의 단경(丹經)이요 의가(醫家)의 비급’이라 평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9년 7월 31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는 또 《구급방(救急方)》을 언해한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2권, 《창진집(瘡疹集)》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2권,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개편하여 언해한 《언해태산요집(諺解胎産要集)》을 비롯하여 《벽역신방(辟疫神方)》《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 등의 저술이 있다.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