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누구인가.언제 오는가.갈수록 많은 사람이 길거리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면 불현듯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20세기 후반 서구 연극사의 방향을 설정한 중요한 작품중 하나다.1,2차 대전의 대량 파괴와 살상 이후 허탈감에 빠진 인류는 존재와 문명 전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우주는 사라지고 대신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한 우주가 대두한다.새로운 환경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는 주체가 된다.
카뮈와 사르트르 등은 인류의 부조리한 상황을 문학 및 철학적 글로 다룬다.이오네스코 베케트 핀터 등 극작가는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사실주의 극을 배격하고 현실에 배어있는 삶의 부조리성을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올린다.
○현실에 밴 삶의 부조리함
‘고도…’는 전통극과 어떻게 다른가.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그때의 ‘이야기’는 대개 재미있는 사건을 말한다.친구가 좋은 영화를 보았다고 말하면,제일 먼저 ‘무슨 이야기인데’라고 묻게 된다.줄거리의 요점을 듣고 볼만한 작품인지를 가리는 방법이다.그런데 ‘고도…’는 첫 공연에서부터 관객에게 즐거움보다는 당황과 실망을 더 많이 주었다.거기엔 극장에서 늘 만나던 낯익은 사회가 없었고,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막이 오르면 어느 저녁의 시골길을 나타내는 무대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있을 뿐 관객은 말 그대로 텅 빈 공간과 마주한다.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브루스 윌리스나 아널드 슈와제네거처럼 악당을 소탕하는 정의의 용사가 아니다.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정념의 화신도 아니다.출신도,직업도,주소도 불분명한 부랑자들이다.
그들은 고도를 만나기로 했다지만 정작 고도가 누구인지,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이 정확한 시간에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확실히 모른다는 점이다.
○기다림 갈수록 권태감이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아무 의미도,줄거리도 없는 잡담과 장난기 어린 동작을 반복한다.하던 놀이가 시들해지거나 상황이 지겨워지면 그곳을 떠나려 한다.그런데 겉으론 무척 자유로워보임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한다.“가자/안돼/왜?/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걸./(절망적으로) 아,그렇지”라는 대사의 반복에서도 드러나듯 그들은 현재의 공간에 갇힌 신세다.잠시 서로 헤어지거나 그곳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그러나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에게 연결된 것처럼 두 사람은 이내 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포조와 러키가 잠시 들렀다 간다.
소년이 들어와 고도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 온다고 전하고 나간다.1막이 끝난다.다음날,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거의 같은 내용의 2막이 펼쳐진다.변화라야 나무에 이파리 몇 개 난 것과 포조는 장님이,러키는 소경이 된 것이다.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권태감이 점점 증가한다.더 자주 한 사람은 ‘떠나자’고 하고 상대방은 ‘갈 수 없다’고 대꾸한다.도대체 그들은 왜 고도를 기다리며,그 동안 무엇을 하는 걸까.
○그래도 삶은 멈추지 않고
캘리포니아 산켄틴 교도소 공연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의외로 ‘고도…’가 그리 난해한 작품이 아님을 시사한다.감독은 여배우도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우스운 사건도 없는 이 작품을 보고 수감자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초장에 모두 나가버리지 않을까 염려한다.기우였다.극이 시작된지 얼마 후 1천4백여명의 관객은 침묵하며 극에 빠져든다.막이 내리자 그들은 내심 충격받은 표정으로 공연장을 나선다.그중 어떤 이는 “고도는 바깥세계야”라고 중얼거린다.
이 세상은 어떤 의미에선 감옥이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도를 기다리며 산다.신이 될 수도 있고,사랑이 될 수도 있고,죽음이 될 수도 있다.분주한 일상에 쫓기며 순간순간 잊고 살 뿐이다.인생의 아이러니는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비로소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점이다.열심히 생활하되 기다림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기다리면서도 삶을 멈추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