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가 남북 인적 교류 관련 시민사회단체와 개인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일본 내 조선학교 구성원들와의 접촉을 문제 삼았다. 배우 권해효씨가 운영하는 '몽당연필’ 등 단체들과 조선학교 차별 실태를 폭로한 영화감독 김지운씨가 포함됐다. 통일부는 '법 질서 바로 세우기'라는 반면, 당사자들은 '남북 교류를 원천 차단하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통일부가 지난달 17일 시민단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측에 요구한 북한 주민 접촉 경위서 공문. 몽당연필 제공
사전 신고 여부 조사...권해효의 몽당연필 등 무더기 조사
조선학교와 재일 동포의 차별 문제를 다룬 영화 '차별'의 김지운 감독과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를 제작한 조은성 감독은 지난달 통일부로부터 경위서 제출을 요구받은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통일부는 '영화 제작과정에서 조총련과 조선학교 인사를 접촉했다'는 언론보도를 근거로, 만남 전후 과정과 통일부에 사전 신고하지 않은 경위 등을 제출하라고 했다.
남북교류협력법(협력법)은 북한 주민과 접촉할 경우 통일부에 사전 신고 후 승인을 받아야 한다. 사전 계획에 없는 접촉이 이뤄졌거나 외국 여행 중 우발적인 경우 사후 신고도 가능하다. 통일부가 문제 삼은 조선학교는 조총련 산하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협력법상 접촉 신고 대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협력법에 따르면 조총련 소속이더라도 한국 국적자인 경우에는 접촉 신고 대상이 아니다. 조선학교 학생의 80% 이상은 한국 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몽당연필은 지난 5월 사전 신고 없이 일본 교토 내 조선학교를 방문했다는 이유로 '경고' 처분을 받았다. 단체 측에서는 갑작스러운 일본인 소개로 방문한 것이라며 사후 접촉 신고를 했지만, 통일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외동포 조직인 6·15 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도 일본에서 조총련 인사를 사후 접촉했다고 신고했다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통일부의 엄격한 잣대는 연구하는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최근 조선학교 커뮤니티와의 접촉이 불허된 박사과정 김모씨는 "연구 영역에까지 정부가 간섭을 하면서 그나마 구축됐던 학술 연구들이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실태를 고발한 배봉기 할머니를 연구하려 했던 석사과정 우모씨는 2차 접촉신고 과정에서 "남북관계가 좋지 않다"며 승인을 받지 못했다.
나이키의 재일(在日)조선인 차별 문제를 다룬 일본 광고 영상. 나이키 유튜브 캡쳐
통일부 "질서 있는 남북 교류를 위한 조사"
통일부 당국자는 "질서 있는 남북교류 협력을 위한 조사"라며 "정부를 배제한 남북 시민사회단체끼리의 접촉에 대해 정부가 분명한 입장을 갖고 그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에 근거한 접촉과 자의적인 접촉을 엄격히 구분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인도주의적 지원도 북한 내부 변화와 함께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통일부는 남북교류협력 위반 신고센터를 새로 설치하고, 법 위반자는 북한 주민 접촉을 최장 1년간 제한하도록 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반면 조사 명단에 오른 시민단체와 개인은 "통일부의 조사는 남북 교류를 위축시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김명준 몽당연필 사무총장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 통틀어 조선학교와 교류 자체를 문제삼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과거 교류 사안까지 경위서를 쓰라고 하니,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은성 감독은 "조선학교 구성원 다수는 한국인이고, 무국적자인 조선적도 한국 방문도 할 수 있게끔 여행증명서도 발급되는데 이들을 만나는 데도 사전신고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인가"고 반문했다.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회원들이 2019년 11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일본 정부의 조선학교 차별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 내에서도 "한국 시민단체와 교류도 위축"
일본의 시민단체들도 윤석열 정부 들어 한국 시민단체와의 교류가 위축되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도쿄 소재 한 단체 인사는 "한국 분들이 조선학교에 방문해서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현장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혹시나 남북교류협력법에 저촉되지는 않을까 우려해 꺼리는 경우를 봤다"고 말했다. 다른 시민단체 인사는 "조선학교에는 한국이나 일본 국적 재일동포 학생이 다수 재학 중"이라며 "한국 시민들이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일본어가 사실상 모국어인 재일동포 4, 5세가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배울 수 있게 지원한다는 의도뿐인데 이런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최진주 특파원 (pariscom@hankookilbo.com)